Re:최이와 김창,김효인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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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1-07 20:36 조회1,803회 댓글0건본문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2/01/04 08:11 (from:211.57.153.114) 조회 : 51
金方慶 열전 02 (출생과 선계② : 1-15세)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김방경은 최씨정권 아래에서 정치적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안동김씨 가문의 후광과 최씨정권의 비호, 그리고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동김씨는 태조 왕건의 외손으로 출발하여 고려전기에 삼한공신을 배출하고 중앙의 고위직을 보유하였던 문벌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계는 무신란 등 혼란기에 처해 한때 안동지방으로 밀렸다.
이 가계가 다시 중앙으로 진출한 것은 최씨정권의 문신기용책에 의해서였다. 과거를 통해 김방경의 조부 敏成이 다시 중앙으로 진출하였고, 백부 金敞은 ★최우의 집권기에 재추를 지냈으며, 부 孝印은 상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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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 효인 형제가 요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최씨무인정권과 관계가 깊다. 이들은 ★최충헌의 집권기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최이가 정방을 설치하고 문신을 기용하는 정책을 취했을 때, 김창은 중용되었다.
당시에 김창의 위치를 아는데 다음의 사료는 참고된다.
《고려사》 제102권 - 열전 제15 >
김창
김창의 그전 이름은 효공(孝恭)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니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희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직사관(直史館)으로 있다가 여러 번 벼슬이 올라서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임명되었다. ★최이가 그를 불러서 정방(政房)에 두고 전선(銓選-인재 선발)임무를 맡겼는데 당시 이부(吏部), 병부(兵部) 관계의 선발에 응하는 자가 무려 수만 명에 달하였다. 김창이 한 번 보면 그들의 성명을 모두 기억하였으며 무슨 일로 신소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즉시 그 질문에 응답하여 해명해 주었으나 그 내용이 사소한 착오도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기억력이 강한 데 대하여 탄복하였다. 그러나 전주(銓注)할 때에는 일일이 ★최이에게 문의하고 결정하였으며 자기의 견해로 가부를 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은즉 그가 대답하기를 “하늘이 우리 진양공(晋陽公-★최이)의 손을 빌리어서 국정을 처리하는 것인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간섭하겠느냐?”고 하였다. 그의 아첨이 대개 이러하였다. 고종 때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되었다가 문하 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되었다. 김창은 세도가에 아부하여 오랜 기간 정권에 참가하고 있었던 터이라 하루 사이에 아홉 번이라도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항상 자격과 절차를 준수하였기 때문에 자기 나이 60세에 가까워서야 상(相)으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벼슬에 대한 탐욕이 적은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43년(1256년)에 수 태사 문하시랑(守太師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판 이부사(判吏部事)로 재직하다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 임종시에 그의 조카 김방경(金方慶) 등에게 유언하기를 “자기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하는 것을 사절하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김창은 ★최이에게 중용되어 정방에서 전주를 담당하였고, 권문에서 오래동안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승진이 가능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이규보나 조충 등 최씨집권기에 재추를 지냈던 인물들도 김창과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동년이었다. 김창의 지위는 막강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고종때 기거사인을 지냈던 이?이나 ★최이의 문객으로 권력이 막강했던 유천우는 김창에 의해 추천되어 성장한 인물이었다. <남인국, 최씨정권하 문신지위의 변화, 대구사학22, p102-104, 1983,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9, 새문사, 1987> 김창은 최씨정권과 밀착하여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김창의 동생 孝印도 ★최항의 치하에서 고시관을 지냈다. 그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글씨를 잘 썼고 또 한림학사에 이르렀던 것은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의 학문적 능력이 탁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병부상서에 이르른 것은 형과 더불어 최씨정권에 밀착되어 발탁되었던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최씨정권은 왜 이들 형제를 발탁하였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이들이 한미한 가문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5>. 이 같은 지적은 이 가계가 안동지방으로 밀려났던 처지에 있었던 점에서 타당하다.
이와 더불어 형제가 최씨정권에 발탁된 이유로 이 가계가 안동으로 밀려나기 이전에 삼한공신으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점도 고려된다. 최씨정권은 일시 지방으로 밀려나 당대는 한미하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안동김씨 인물을 다시 기용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敞과 孝印은 최씨를 하늘이 내린 존재로 인정하여 적극 충성을 다하였다. 물론 金敞같은 공신의 후예가 최씨정권을 지지하였던 것은 최씨정권의 안정유지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솔내 -
▣ 김윤만 -
▣ 김윤식 -
▣ 김항용 -
金方慶 열전 02 (출생과 선계② : 1-15세)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김방경은 최씨정권 아래에서 정치적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안동김씨 가문의 후광과 최씨정권의 비호, 그리고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동김씨는 태조 왕건의 외손으로 출발하여 고려전기에 삼한공신을 배출하고 중앙의 고위직을 보유하였던 문벌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계는 무신란 등 혼란기에 처해 한때 안동지방으로 밀렸다.
이 가계가 다시 중앙으로 진출한 것은 최씨정권의 문신기용책에 의해서였다. 과거를 통해 김방경의 조부 敏成이 다시 중앙으로 진출하였고, 백부 金敞은 ★최우의 집권기에 재추를 지냈으며, 부 孝印은 상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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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 효인 형제가 요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최씨무인정권과 관계가 깊다. 이들은 ★최충헌의 집권기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최이가 정방을 설치하고 문신을 기용하는 정책을 취했을 때, 김창은 중용되었다.
당시에 김창의 위치를 아는데 다음의 사료는 참고된다.
《고려사》 제102권 - 열전 제15 >
김창
김창의 그전 이름은 효공(孝恭)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니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희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직사관(直史館)으로 있다가 여러 번 벼슬이 올라서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임명되었다. ★최이가 그를 불러서 정방(政房)에 두고 전선(銓選-인재 선발)임무를 맡겼는데 당시 이부(吏部), 병부(兵部) 관계의 선발에 응하는 자가 무려 수만 명에 달하였다. 김창이 한 번 보면 그들의 성명을 모두 기억하였으며 무슨 일로 신소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즉시 그 질문에 응답하여 해명해 주었으나 그 내용이 사소한 착오도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기억력이 강한 데 대하여 탄복하였다. 그러나 전주(銓注)할 때에는 일일이 ★최이에게 문의하고 결정하였으며 자기의 견해로 가부를 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은즉 그가 대답하기를 “하늘이 우리 진양공(晋陽公-★최이)의 손을 빌리어서 국정을 처리하는 것인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간섭하겠느냐?”고 하였다. 그의 아첨이 대개 이러하였다. 고종 때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되었다가 문하 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되었다. 김창은 세도가에 아부하여 오랜 기간 정권에 참가하고 있었던 터이라 하루 사이에 아홉 번이라도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항상 자격과 절차를 준수하였기 때문에 자기 나이 60세에 가까워서야 상(相)으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벼슬에 대한 탐욕이 적은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43년(1256년)에 수 태사 문하시랑(守太師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판 이부사(判吏部事)로 재직하다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 임종시에 그의 조카 김방경(金方慶) 등에게 유언하기를 “자기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하는 것을 사절하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김창은 ★최이에게 중용되어 정방에서 전주를 담당하였고, 권문에서 오래동안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승진이 가능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이규보나 조충 등 최씨집권기에 재추를 지냈던 인물들도 김창과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동년이었다. 김창의 지위는 막강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고종때 기거사인을 지냈던 이?이나 ★최이의 문객으로 권력이 막강했던 유천우는 김창에 의해 추천되어 성장한 인물이었다. <남인국, 최씨정권하 문신지위의 변화, 대구사학22, p102-104, 1983,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9, 새문사, 1987> 김창은 최씨정권과 밀착하여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김창의 동생 孝印도 ★최항의 치하에서 고시관을 지냈다. 그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글씨를 잘 썼고 또 한림학사에 이르렀던 것은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의 학문적 능력이 탁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병부상서에 이르른 것은 형과 더불어 최씨정권에 밀착되어 발탁되었던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최씨정권은 왜 이들 형제를 발탁하였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이들이 한미한 가문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5>. 이 같은 지적은 이 가계가 안동지방으로 밀려났던 처지에 있었던 점에서 타당하다.
이와 더불어 형제가 최씨정권에 발탁된 이유로 이 가계가 안동으로 밀려나기 이전에 삼한공신으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점도 고려된다. 최씨정권은 일시 지방으로 밀려나 당대는 한미하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안동김씨 인물을 다시 기용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敞과 孝印은 최씨를 하늘이 내린 존재로 인정하여 적극 충성을 다하였다. 물론 金敞같은 공신의 후예가 최씨정권을 지지하였던 것은 최씨정권의 안정유지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솔내 -
▣ 김윤만 -
▣ 김윤식 -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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