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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백 김장군 묘비 (송시열 찬)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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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1-13 16:00 조회1,5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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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역 송자대전 9 (1982.9, 민족문화추진회)

p.357

조증요동백(詔贈遼東伯) 김장군(金將軍) 묘비(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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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白沙) 상공 이항복(李恒福)이 초천(超薦)하여 변수(邊守)로 삼았는데, 부임차 떠나려 할 때 귀가(貴家)의 딸을 소개하여 유혹하는 자가 있으므로 장군이 사양하기를,

"저 사람은 귀가(貴家)의 딸인데, 그를 처(妻)로 맞이한다면 명분(名分)이 문란해질 것이요, 잉첩으로 삼는다면 저 사람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 하였다.



장년(壯年) 시절에 선조(宣祖)의 국상을 당하여, 좌막(佐幕)으로 성기(聲妓)가 번화한 곳에 있으면서도 주색(酒色)을 매우 엄하게 끊었으니, 그의 지신(持身)과 제행(制行)이 대개 이와 같았다.



효종조 때 장군의 아우 응해(應海)가 역옥(逆獄)에 연루되자 상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응하의 아우이다. 또 일찍이 노(虜)와 싸우다가 패전하자 자문(自刎)까지 하였으니,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고, 바로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대개 의리(義理)가 꽉 막혔던 광해조를 당해서도 장군에게는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융로(戎虜)들까지도 탄복하였으며, 마침내는 황상(皇上)의 포총(褒寵)까지 있었는데, 우리 성고(聖考)의 덕음(德音)도 이와 같았으니, 이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숭정 정묘년(인조5, 1627)에 의론하는 자들이, 용만의 사당이 불편한 점이 있다고 하므로 그 비(碑)와 함께 철거하였다가, 금상 병오년(현종7, 1666)에 응교(應敎) 김만균(金萬均)이 철원부의 수재(守宰)가 되어 처음으로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그리고 지금의 군수 세귀(世龜)와 병사(兵使) 유비연(柳斐然)은 장군의 내외손(內外孫)인데, 풍비(豊碑, 공덕을 찬양하는 큰 비석)를 세우고 와서 글을 청하여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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