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고문헌 자료-김충갑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3-11-13 16:36 조회1,621회 댓글0건

본문

<김충갑 역사 자료 기록 내용>

  출전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1. <지퇴당집>내 기록내용

 <知退堂集> 卷之五,  雜記

     壽春雜記 
李文楗。乙巳。爲承旨。?順朋等引對時入待。錄勳。未幾。以
煇切親削勳。竄配星州而卒。以善筆法稱。
金忠甲。李煇之婦弟也。丙午。登第。爲承文正字。劾以付會
詭論。門外黜送。今上朝。復爲司成而卒。


2. 地理類 方誌 郡邑誌 京畿道, 훈도방주자동지(薰陶坊鑄字洞志. 古 4790-16)


 漢陽의 薰陶坊 鑄字洞의 연혁과 풍물, 인물 등을 정리한 洞志. 표지서명은 "鑄字洞志"로 되어 있다. 작성시기가 17세기이며, 흔치 않은 洞志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密昌府院君 朴承宗의 서문에서는 주자동이 逐名 規利하는 사람들이 살지 않고 書冊을 인쇄하는 工人들과 讀書 養病하는 사대부만이 살고 있는 한적한 동네이지만 己卯年(기묘사화)과 乙巳年(을사사화)에 걸쳐 忠孝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음을 칭송하였다. 내용은 公館·祠宇·古跡·風俗·孝子·節婦·名宦으로 구성되어 있다.

 [公館]은 校書館의 업무와 관원의 구성을 적은 것인데, 鑄字洞이라는 이름이 校書館이 자리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연혁 대신 서두에 들어간 것이다. 내용의 중심은 [名宦]으로서 주자동에 거주한 주요 인물들의 약력을 정리하였다. 舊宅의 소재를 아는 경우 이를 말미에 부기하였다.

 열거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安從約·安瑚·安琛·鄭甲孫·曹錫文·權擥·權健·終南守(인명미상)·奇遵·朴世喜·鄭膺·趙佑·安瑛·金?·蔡世英·李賢輔·丁?·權應昌·李瀣·柳辰仝·鄭世虎·李之蕃·李山海·朴忠元·朴啓賢·黃琳·金忠甲·韓準·權遂·鄭淑·權?·金時敏·慶暹·權昕.
 
 

4.  고전국역총서 乙巳傳聞錄 김충갑전(金忠甲傳) 이중열저
 
 김충갑의 자는 서초(恕初)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병오년에 과거에 올라, 권지 승문원 정자(權知承文院正字)가 되었는데, 정미년에 정언각의 고변으로 대간에서, 이휘의 처남으로 윤임과 더불어 한 마을에 살면서 때때로 간사한 논의를 내어 억지로 붙여서 우겨댐이 많았다는 이유로써 아뢰어 벼슬을 빼앗기고 성문 밖에 내쳐 보내졌다가 뒤에 풀려 돌아와서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공이 아뢰기를, “정미년 가을에 논핵을 받아 파출(罷黜)되었고, 또 매부(妹夫 이휘)가 을사년에 죄를 입었는데, 지금 같이 그때의 나를 의논하는 데에 참여하면, 남의 말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편하지 못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5. 고전국역총서-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김신동 전(沈神童傳)  
   
참봉 김신동은 을사생이고 자(字)는 성이(聖而)이며 벼슬은 한림에 이르렀다. 상주(尙州)가 본관이며 서울에 살았다. 생원 김재(金?)의 아들이다.
보유 : 경오년에 생원이 되었고 무인년에 공천으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천목에는 심행(心行)이 구차스럽지 않고 식량(識量)과 재기(才氣)가 있다는 것이었다. 발탁되어 한림으로 제수되었고 을사년에 천과(薦科)가 회복된 뒤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로 임명되었다. 아들 김기(金?)문과ㆍ김양(金讓)현감ㆍ김영(金詠)ㆍ김담(金譚)ㆍ김심(金諶), 사위 김충갑(金忠甲)문과, 손자 김영남(金穎男)문과ㆍ김숙남(金淑男)ㆍ김철남(金哲男), 외손 김시회(金時晦)문과가 있다.
 
 


 
▣ 솔내 -
▣ 김윤만 -
▣ 김태서(제) - 항용조카님, 빼빼로 모임은 좋으셨어요.


▣ 김항용 - 예, 잘 보냈습니다.
▣ 김영윤 - 잘 보았습니다
▣ 김은회 -
▣ 김성수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