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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 자료-문영공 김순(金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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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11-13 22:17 조회1,5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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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 자료-<문영공 김순>

 출전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1.  고려사절요 제22권 > 충렬왕 4.  무술 24년 (1298), 원 대덕 2년 
○ 8월에 지밀직사사 정해(鄭?)를 원 나라에 보냈는데, 행성에서도 석말야선첩목아(石抹也先帖木兒)를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 원 나라에서 발로올(?魯兀) 등을 보내와, 국왕과 공주가 원 나라에 들어와서 조회하기를 재촉하였다.
 ○ 유비(柳庇)를 판밀직사사로, 박전지(朴全之)를 밀직부사 중경유수로, 김순(金恂)을 삼사좌사로, 허평(許評)을 동지자정원사로 삼고, 이승휴(李承休)를 밀직부사 감찰대부(密直副使監察大夫)로 삼고 그대로 치사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승휴는 판비서로 있다가 바로 동첨자정원사(同僉資政院事)에 승진되었는데, 글을 올려 아뢰기를, “본조의 제도에 나이 70이 넘어서 높은 관직에 제수된 자가 없었는데, 소신으로 말미암아 선왕의 제도를 고친다면 신의 죄가 큽니다. 청컨대, 은명(恩命)을 거두어 주소서.”하니, 왕이 웃으며 이르기를, “선생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처지가 아니다.”하고 관직에 나오기를 재촉하였다. 승휴가 억지로 부임했다가 겨우 10여 일 만에 글을 올려 은퇴하기를 간절히 청하니, 왕이 마지못하여 이를 들어 주었다.
 

2.  고려사절요 제23권. 忠宣王  임자 4년(1312), 원 인종(仁宗) 황경(皇慶) 원년 
 ○ 6월 1일 을축에 일식이 있었다.
 ○ 원 나라에서 제(制)를 내려 행성을 두는 것을 폐지하였다. 애초에 홍중희가 중서성에 호소하여 행성을 설립하려고 하므로 왕이 조종때부터 신하로 복종한 공을 서술하여 아뢰어서 폐지하게 하였던 것이다.
 ○ 모든 사람에게 자모법(子母法)을 쓰지 않고 사채를 추징하는 것을 금하였다.
 ○ 김순(金恂)을 상락군(上洛君)으로, 김자흥(金子興)을 계림군(鷄林君)으로, 권한공을 첨의평리로, 최성지(崔誠之)를 동지밀직사사 대사헌으로 삼았다.
 

3.  고려사절요 제24권. 忠肅王. 신유 8년, 원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 

 ○ 영양군(永陽君) 이호(李瑚)를 원 나라에 보내어 절일(節日)을 축하하고, 양성군(陽城君) 이천(李?)에게 동녀를 바치게 하였다.

○ 원 나라에서 왕에게 입조(入朝)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 김이용을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으로, 김순(金恂)을 판삼사사로, 오잠ㆍ박허중(朴虛中)을 첨의찬성사로, 조련(趙璉)ㆍ김태현을 평리로, 김원상(金元祥)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임명하고, 박려(朴侶)ㆍ조연수(趙延壽)를 삼사사로, 백원항(白元恒)을 밀직사로, 진양필(秦良弼)ㆍ한악(韓渥)을 지밀직사사로, 윤석ㆍ이백겸(李伯謙)을 동지밀직사사로, 전영보ㆍ유유기(柳有奇)ㆍ임서(任瑞)를 밀직부사로 삼았다. 서(瑞)는 주면(朱冕)의 집종으로서, 백안독고사의 아우이다.
 

4. 익재집  역옹패설(역翁稗說) 前集二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은 문량공(文良公) 조간(趙簡)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방(榜)에서 첫째 자리는 문량공이 차지하였다. 문량공이 늙었을 때 악성 종기로 어깨와 목을 거의 분별할 수 없었다.




▣ 김은회 -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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