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湖西士林과 우리가문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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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1-21 22:36 조회1,601회 댓글0건본문
■ 조선시대 충북지역의 학맥과 학풍 (2002.11.8, 충북학연구소)
우암 송시열의 학맥 학풍과 화양서원 ---김문준 (건양대)
2. 尤庵의 학맥
(2) 門人
송시열은 사계의 문인 가운데 가장 많은 문인을 배출했는데, 이름난 문인으로는 ★권상하(수암), ★김창협(농암), 임영(창계), 이희조(지촌), 이단하(외재), ★김만중(서포), 박광일(?재), 정호(장암) 등이 있다.
윤증(명재)은 윤선거의 묘지명사건 이후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수암 권상하, 농암 김창협 등이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고제로 일컬어진다. 여기에서는 권상하와 김창협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권상하(1641-1721)는 1660년(현종1) 진사가 되었으나 학문에만 전념하고, 숙종의 총애를 받아 참판 판윤 우의정 좌의정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山林으로 처세했다. 윤증과 함께 송시열을 따라 송시열이 그의 학통을 일으킨 華陽에서 수학하였다.
1675년(숙종1) 자의대비 복상문제로 송시열이 유배되고 남인이 득세하자 淸風(지금의 충북 제천시 한수면)에 은거하면서 독서와 사색, 講學에만 전념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송시열이 귀양에서 돌아오자 다시 화양으로 가서 이후 10년동안 정이와 주자의 저술을 適訂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다시 유배되었다가 賜死당하자 스승으로부터 그 의복과 책을 遺品으로 받았으며, 스승의 유언에 따라 만동묘를 청주 화양동에 세우고,
1704년에는 임금의 명으로 창덕궁 옆 禁苑에 명나라 태조 등을 제사하는 대보단을 설치하였다.
그의 문인인 ★윤봉구는 학문의 적통이 공자, 주자, 우암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우암 이후 권상하가 그 학문을 이어 계승하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이와 송시열의 학설을 전하고 그 문인들은 인물성동이 논변을 일으켜 한국성리학의 독특한 연구 영역을 개척하였다. 인물성동이 논변은 그의 제자 ★韓元震(1682-1751)과 李?(1677-1727)이 본격화하여 湖洛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권상하의 성리학은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하고, 그의 문하에서 비롯된 인물성동이론에서 인물성이론을 주장했다.
권상하는 우암의 문하에 가장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한원진(남당), 이?(위암), 이이근(화암), 성만징(추담), 최징후(매봉), 현상벽(관봉), ★채지홍(봉암), 윤봉구(병계)등 湖洛논쟁의 주역들이었다.
윤봉구 문하에는 위백규(존재)가 있고, 한원진 문하에는 ★송능상(운평)이 있으며, 송환기(심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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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문인 권상하 등 190인 (이중 94인은 先進, 96인은 晩進)
○수암 권상하 문인 한원진 등 35인 ▶김정좌, 김정화(안)는 권상하의 문인
○운평 송능상 문인 송환기 등 2인 ▶기헌 김기(안)는 송능상의 문인
▶김재수(안)는 채지홍의 문인
▣ 솔내 -
▣ 김윤만 -
▣ 김윤식 -
▣ 김항용 -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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