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충렬공의 주변인물들 (59)고종(高宗)의 강화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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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11-25 17:36 조회1,451회 댓글0건본문
강화천도
▶ 고종12년 몽고사신 저고여(著古如) 피살사건의 책임문제로 몽고와 고려간의 미묘한 긴장이 감돌던 시기였다. 최이 집권 초기의 국방상의 이러한 긴장감은 최이정권의 안정성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이는 어떤 점에서는 최이 자신이 조장한 측면도 적지 않다.
고종18년(1231) 몽고군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개경근처에서 고려는 몽고군과 불리한 조건의 강화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최이는 몽고의 계속되는 고압적인 자세에 맞서 항전의 의지를 가지며 고종19년 6월 강화천도를 단행함으로써 몽고에 대한 항쟁의지를 표명하였고, 이후 30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을 수행하였다.
▶ 강화천도의 주장이 처음 대두된 것은 1231년 12월부터였다. 강화천도를 둘러싸고 국왕 및 대다수의 관료들은 주저하였지만, 최이는 천도를 강행하였다.
최이는 녹전차 100여대를 동원하여 자기집 재산과 물건을 모두 강화도로 운반시기기 시작했고 궁궐의 모든 기관들도 강제로 강화도로 옮기게 하였다. 300여년이나 되는 오랜 시간동안 도읍이었던 개경을 하루 아침에 버리고 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최이는 떠나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명하고 군사들을 동원하여 강화도에 새궁궐을 짓도록 하였다.
그가 강화천도를 강행한 데는 몽고의 1차침입으로 인해 약화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것이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몽고와의 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최씨정권의 약화가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 천도초반 제반 여건의 미숙으로 관인들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한 관인층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또한 강화천도 직후 그동안 잠잠했던 민들이 항쟁을 시작하여 고종19년 7월 이통(李通)의 난, 19년 8월 충주관노의 난, 20년 4월 용문창(龍文倉)의 난, 같은 해 5월 동경적(東京賊)의 난, 24년 봄 이연년(李延年)의 난 등이 이어졌다.
최이는 이같은 내외의 도전을 강력한 항몽의지를 표명하면서 몽고의 침입에 대한 국가의 수호자로서 자신을 위치지음으로써 극복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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