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광해군 모후(인목대비) 폐비사건 = 戊午(1618)收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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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1-26 05:40 조회1,454회 댓글0건본문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3/10/23 21:09 (from:211.57.153.114) 조회 : 38
Re:광해군 모후(인목대비) 폐비사건 = 戊午(1618)收議
反正軍의 수뇌들이 칼을 씻은 洗劍亭
광해군 15년(1623) 3월13일 새벽 김유, 李貴(이귀), 崔鳴吉(최명길), 金自點(★김자점 ), 沈器遠(심기원) 등이 쿠데타軍 6700명을 거느리고 弘濟院(홍제원:홍제동)에 모였다 . 綾陽君(능양군:나중의 仁祖)의 친병과 장단부사 李曙(이서)의 부하 700명도 합류했다. 이들은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대오를 가다듬고 깃발을 세웠다. 새벽 3시경이었다. 反正軍(반정군)은 洗劍亭(세검정:지금의 종로구 신영동)을 거쳐 彰義門(창의문:도성의 서북문)을 통과하여 창덕궁으로 진군했다 . 洗劍亭이란 반정군의 지도자 김유·이귀 등이 이곳을 흐르는 내에서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덕궁을 수위하던 훈련대장 李弘立(이홍립)은 사전약속대로 궁문(돈화문)을 열어주고 몸을 피했다. 반정군이 궁궐에 난입하자 광해군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은 다음 내시에게 업혀 도망갔다가 생포되었다.
反正軍이 내세운 명분은 두 가지였다. 그 첫째가 형(임해군)과 아우(영창대군)를 죽이고 母后(모후:인목대비)를 폐한 反인륜적인 행위였고, 둘째는 明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後金=淸)와 교분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1618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西宮(서궁)이라고 낮춰 부르게 했다. 따라서 폐비 문제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後金(후금)과의 관계 개선은 국가이익 확보에 있어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 대목이었다. 따라서 인조반정은 당시의 집권당 大北의 독주에 대한 반대 정파의 반격이었다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인조반정의 주체세력은 광해군 시절에 배척을 받았던 西人들이었으며, 모두 李恒福(이항복:반정 당시 故人)의 문하 생들이었다.
西宮에 유폐되었다가 反正으로 궁중의 최고 어른이 된 인목대비는 자신의 소생 永昌大 君(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을 증오하여 『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라며 『 목을 잘라 망령에 제사지내고 싶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만류로 광해군은 신문과 형벌을 겨우 면하고 강화 喬洞島(교동도)로 귀양을 갔다.
● 김적(金適, 1564- )
조선 중기의 문신, 안렴사 김사렴의 7대손이며 호는 牛川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안동이다. 1610년 (광해군2)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조정랑을 역임한 문장가이다.
광해군의 학정에 대하여 대의를 밝히고 정론을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미움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진천 서쪽 5리 지점에 江亭을 짓고 살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말하기를 江亭이 고을 서쪽 5리에 있고 주인 정랑 김적이 文翰의 사람에 지나고 지조가 굳고 확실하여 혼조를 당해서 명리를 사양하였다.
● 부사공 김희(金熹, 1567-1635)
1567(선조원년)-1635(인조13). 자 여구(汝懼). 안렴사공 10세손. 공은 1588년(선조21) 무자에 생원, 진사 양과에 급제하고, 1610년(광해2) 경술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형,이조좌랑을 거쳐 장흥부사를 역임하였다.
광해주 폐모정론에 불참하여 외직에 출보되었다가 인조 특명으로 승차되어 통정대부에 이르다. 묘갈(영상 조현명 찬, 제학 조명구 서)이 있으며, 장흥에 거사비가 섰다.
● 증대사헌공 김지(金志, 1569-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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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신조2)-1633(인조11). 자 사상(士尙), 호 망세재(忘世齋). 안렴사공 10세손. 화산군 주의 손. 공은 기유(1609)에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이이첨을 소척하다가 강계에 적거하게 되었다.
또한 광해 폐모론을 항소하다가 제주에 7년이나 정배되었다. 인조반정 후에 풀려나 찰방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하고 정충경절로 사헌부 대사헌에 특위 증직되었다. <안렴사공파 문중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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忘世齋공의 諱는 志요 字는 士尙이니 문단 주의 손이라. 鄭守夢 선생 譁(화)를 師事하여 학문이 精深이라. 丙午년에 진사하여
丁巳년에 泮儒로서 광해폐모후를 당하여 상소에 春秋 책의 아들은 어머니를 원수로 함이 없다는 의와 경전에 아버지는 비록 사랑치 않하나 자식은 효 않을 수 없다는 말을 이끄러서 말함이 심히 강직하니 이첨등이 ?鍊(하련)으로 獄을 만들어 여러번 刑問을 당하였으나 공의 안색이 변치 아니하고 석서공이 가로되 신은 태학생이라 다만 明倫 2자만 아를 뿐이라 하고
인하여 탐라로 적 보낸 7년에 戶庭(호정)에 나오지 아니하고 오죽 강학하는 선비라. 가르침을 不倦하니 제자가 백여인에 지나더라.
癸亥에 인조가 개옥하사 찰방을 시키니 사양하여 취직치 아니하더니 그후 대신 연주로 인하여 대사헌을 贈하고 관원을 보내어 致祭하니라 <1956 안동김씨보감>
● 김언 (金 王+言) (1588-1637)
1588(선조21)-1636(인조14). 조선 인조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은 汝潤(여윤). 아버지는 진사 洛瑞(낙서)이다. 1609년(광해군1)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7,8년뒤 겨우 봉상시주부에 머물렀다.
인조반정후 부안현감, 예조정랑, 병조정랑, 성균관사예, 예빈시정. 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1628년(인조6)에 영천군수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천부사로서 흩어진 관병을 정렬하여 관찰사 홍명구에게 예속시키고 의병을 모집하여 적의 진로를 막고 항거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뒤 홍명구의 아들 중보의 주선으로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려문을 세웠다.
그러나 현종때 허적이 성천부사를 지낼 때 그의 행적이 모호하다고 하여 旌表를 환수하였다. 1680년(숙종6)에 허적이 처형된뒤 아들 世輔등 삼형제의 상소로 다시 정표문제가 제기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愍肅(민숙)이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 현종실록 숙종실록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徐信錫>
▣ 김윤식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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