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군 신도비의 유연재 선조님 필적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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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3-11-26 20:35 조회1,597회 댓글0건본문
하남문화원에서 발행한 위례문화에서 확인한 운산군 신도비와 그 신도비를 서(書)하신
유연재 선조님의 필적을 확인했습니다.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하남문화원에 탁본이 보관돼 있었습니다.
운산군 신도비
위치 : 하남시 초이동 산4번지
연대 : 중종13년(1518)
크기 : 전체 높이 295cm, 비신 165cm, 폭 82cm, 두께 23cm
찬. 서. 전 : 남곤 찬, 김희수 서, 이언호 전
<原文>
有明朝鮮國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懸祿大夫雲山君謚諡恭昭公碑銘
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南袞撰
嘉善大夫全羅道觀察使兼兵馬節度使李彦浩篆
奉正大夫守宗簿寺正兼承文院參校金希壽書
後略
<번역문>
유명조선국 병충분의 익운 정국공신 현록대부 운산군 익시공소공비명
숭정대부행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춘추관사 남곤이 글을 짓고
가선대부 전라도관찰사 겸 병마절도사 이언호는 전액을 쓰고
봉정대부 수종부시정 겸 승문원 참교 김희수는 글을 쓰다
후략

☞전면

☞측면

☞후면


☞南袞撰, 李彦浩篆, 金希壽書가 보입니다.

☞비에 새겨진 유연재 선조님의 필적

☞하남문화원에 소장중인 탁본
운산군 이계(雲山君 李誡)1453년(단종 1)-1510년(중종 5)
조선 초기의 종친. 본관은 전주(全州). 세종의 손자로, 밀성군 침(密城君琛)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판윤증찬성(判尹贈贊成) 민승서(閔乘序)의 딸이다.
세종말경에 운산군(雲山君)에 예봉(例封)되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에 처하도록 논죄되었으나
연산군이 “운산군은 지위가 높고 오랫동안 사옹원제조를 지냈으니 정배할 수 없다.”고 옹호함에 따라 면죄되었고,
1506년(중종 1) 9월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 때에 구수영(具壽永)·덕진군
예(德津君濊)와 함께 진성대군(晉城大君)에게 파견되어 거사한 사유를 갖추어 아뢰고 동시에 군사를 거느리고 시위, 그 공로
로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유연재 김희수(金希壽)1475(성종 6)∼1527(중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
할아버지는 감사 자행(自行)이며, 아버지는 숙연(叔演)이다.
1507년(중종 2) 참봉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검열 권벌(權#벌02), 봉교 이희증(李希曾)·김영(金瑛), 대교 윤인경(尹仁鏡) 등과 함께 무오사화에 대해 논계(論啓)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또, 왕은 천륜에 따라 덕치정치를 행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측근의 신하들이 필요하고 간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언하기도 하였다.
그뒤 1509년에 정자·박사가 되고, 이어 지평·검상이 되었다.
1514년 장령을 지냈으며, 1517년 집의·참찬관 등을 거쳐 1520년 우부승지, 이듬해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1524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 대사헌과 경상도감사로 나갔다.
그때 그곳의 사송(詞訟)이 적체되었다 하여 중앙에서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1527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楷書)에 능하였다. 동래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되었다. 글씨로는 〈계주문 戒酒文〉·〈영상김수동비 領相金壽童碑〉·〈영상성희안비 領相成希顔碑〉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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