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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장군 기념사업회 허용기 회장 인터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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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제) 작성일03-11-27 13:37 조회1,9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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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학공파의 김태서(진욱)입니다.

저는 사단법인 21세기군사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 연구소에서 매달 월간 군사세계(KDR)라는 군사잡지가 나오는데 이 책은 현역군인이나 예비역 군인 군사관련 전문가들이나 군사마니아들이 읽고 있는 책입니다.

이번에 충무공 김시민장군 기념사업회에 군사세계 홍광희 기자가 다녀와서 허용기 기념사업회장님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읽어보고 감동이 있어 게시판에 올립니다.



후손으로서 이런 일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다는 반성도 있고,

또 자랑스러운 할아버지를 두었다는데 대한 자부심도 느끼게 됩니다.

언젠가 뵙게 되겠지만, 허용기 회장님과 또 함께 일하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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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지명 ; 전례를 찾아서

제목 : 충무공 김시민장군과 진주대첩

홍광희 (본지 기자)





진주대첩은 임진란 3대첩중 하나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수륙병진책이 실패하자 일본은 해로가 아닌 육지를 통해 호남으로 진출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침입의 거점으로 선택한 것이 진주성이었다. 진주성은 조선군이나 일본군에게 있어서 주요 군사거점이었다. 당시 진주목사를 하고 있었던 김시민 장군은 선조 25년(1593년) 10월 5일부터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치루게 되었고 6일간 밤낮으로 신무기를 들고 총공세를 하던 일본군에 대항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1차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동계가 아닌 하계작전으로 전환하여 다시 선조 26년(1594년) 6월 21일부터 진주성을 침투하여 9일간의 제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졌다.



진주성은 평지성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사실 요새(要塞)의 의미에서 보면 취약한 성이었다. 김시민은 심리전과 위장술을 포함,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2차 전투에서도 끝까지 성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악천후 기상의 영향과 일본군의 신병기 등장으로 진주성은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 한산대첩이 하루동안의 결전이었고 행주대첩도 하루동안의 결전이었다는 점과 비교해볼 때 진주성은 그야말로 기나긴 혈투였다고 볼 수 있다. 한산대첩, 행주대첩에 가려져 임진 3대첩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진주대첩이 별로 후손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가운데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선양사업을 하고 있는 허용기 충무공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 회장을 만났다.





-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후손도 아니신 것 같은데 기념사업회를 운영하고 있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기념사업회를 운영하게 된 지는 10년 정도 됐어요. 서울에서 공직에 있다가 고향이 천안이기 때문에 천안에 내려왔어요. 천안에 내려와서 천안을 한번 알아보자는 마음에 천안의 역사적 인물을 쭉 훑어 보니까 김시민 장군이 나오더라고요. 김시민 장군을 일반적으로 진주분이라고 생각들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천안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내가 그분이 천안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 양반이 태어났던 고장을 가서 보니까 거기에 아무런 유적도 없고 너무나 쓸쓸하게 되어 있어서 임진왜란 3대 영웅이 왜 이렇게 예우를 받고 있는가,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천안이 충절의 고장이라고 맨날 말로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이래가지고 어떻게 충절의 고장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이 분에 대해서 기념사업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여러가지 자료를 보고 함께 생각을 같이 하던 분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가지 좋은 게 많이 나오고 그러다 보니까 천안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전국적으로 이어지도록 하자라는 의견들이 대두되었고 앞으로 할 일이 상당히 많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기분을 가지고 하고 있습니다.』



- 기념 사업회에서 특별히 부각할만한 그런 사업이라든지 추진중인 사업이 있습니까?



『지금 김시민장군과 관련된 사업은 우리가 두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들어가는데 하나는 이분에 대한 정확한 자료와 업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이고 그 역사적 평가를 널리 알리는 홍보사업에 대한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분이 태어나서 자랐다고 하는 탄생지 유적에 대한 발굴과 이를 복원하는 문제 등 유형적인 것입니다.

지금은 무형적인 쪽에 집중해서 하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을 실체적 진실에 입각해 가지고 규명하는 것과 또 김시민 장군을 널리 알리는 홍보쪽에 중점을 두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2회 심포지엄이 있었지만 이런 심포지엄을 통해서 김시민 장군의 역사적 진실에 대해 약 70~80%를 우리가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김시민 장군 기념사업을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내년도부터는 외형적이고 유형적인 측면에서 사업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산이 많이 들어갑니다. 예를들면 발굴조사 문제라든가 복원문제, 기념관이나 사당을 짓는 문제 등등 이런 것입니다. 우리 기념사업회는 일종의 NGO입니다. NGO는 알다시피 어떤 재정적인 것이 충분히 있는 것이 아니고 여론을 조성한다거나 아니면 관계 기관에 어떤 일을 해달라고 촉구하는 압력 단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 진주성 전투가 육전에서 한산대첩에 못지않은 전략적 가치가 있는 승리였고 전례적으로 크게 강조되어야 할 역사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잘 평가되지 않고 있고 또 같은 충무공으로서 이순신 장군에 비하여 김시민 장군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에 대해서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순신 장군은 물론 김시민 장군보다 업적도 많고 훌륭하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1962년도부터 이순신 장군이 성장하신 아산시 염치읍 일대를 성역화시켜서 국가에서 전폭적으로 예산을 지원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박대통령의 의지에 의해서 널리 알져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과 같은 경우는 이 분이 진주성 싸움에서 돌아가셨고 묘도 괴산에 있다는 그 정도만 알고 있지 이 분에 대한 역사적 의미라든가 인물적 연구라든가 하는 것들이 전혀 안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책임은 내가 볼 때 첫째로 김시민 장군의 후손들인 안동 김씨 문중에 있습니다. 문중이 그것을 제대로 못한 것입니다. 아까 발표자들이 얘기한 것과 같이 김시민 장군은 친아들이 없었습니다. 김시민 장군이 돌아가실 때 양자가 들어오다 보니까 자기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얼굴도 모르는데 그 분에 대하여 아는 것은 더 더욱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순신 장군을 충무공이라고해서 너무 정부에서 이순신 장군만 추켜세우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똑같은 충무공 시호를 받은 김시민 장군에 대해서 그분을 거론하는 그 자체가 이순신 장군을 폄하하는 것이다 하는 그런 의식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또 책임은 천안의 시청이라든가 이런 공무원들이 이런 종류의 일을 안한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충절의 고장이라고는 하는데 실제 행동은 안했다는 것입니다. 또 학자들이나 관련된 단체들도 등한시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것은 문중의 문제이고 우리 고장 주민들이나 국민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전투가 오늘날의 우리 세대에 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김시민 장군을 존경하는 것은 그분이 충과 의를 생활신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것이라는 것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양심에 비춰서 하는 것입니다. 김시민 장군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했어요.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좋은 게 좋다’라는 식으로 비판도 없이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김시민 장군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했고 공명정대했습니다. 그건 내가 볼 때 목민관으로서 상당히 귀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충인데 그 당시 임진왜란때 왠만하면 다 도망갔어요. 싸우면 죽으니까요. 그런데 김시민 장군은 그런 상황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직접 와서 오히려 군사들을 모으고 처음부터 결사항전을 하겠다고 했지요. 그것은 강한 충성심의 발로입니다. 이런 충과 의가 김시민 장군의 인격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후세에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한 인간으로서도 자기의 소명을 충분히 다했습니다. 전장터에서 자기가 장군이지만 그 밑에 병사들과 숙식을 하고 같이 생사고락을 하였으며 돌아다니면서 격려를 하고 어버이같이 따듯하게 대한 것은 물론이고 두려움에 떨면서 진주 성민들이 다 도망가려고 하는 것을 못 도망가게 하고 그들을 설득하는데 스스로 솔선수범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귀감이 되고 솔선수범 하지 않으면 생명을 위협받는 그런 전쟁 와중에서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이 성민들을 그렇게 통솔할 수 있었던 것을 볼 때 그분이 매우 훌륭한 장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아마 앞으로 김시민 장군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하겠지만 여러 가지 전략적인 전술적인 점들이 높이 평가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사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육군사관학교라든가 기타 군사관련 기관이나 단체에서 김시민 장군에 대한 전략 전술을 깊이 연구를 해서 현재 현대전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심리전이나 위장술, 첩보전, 국민들의 안보의식 등의 분야에 상당히 연구할 필요와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 인터넷에 김시민 장군 기념카페와 같은 공간을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홍보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쪽으로 국가가 어떠한 방식으로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지금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NGO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단체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우리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NGO가 나온 것은 당연히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해야 될 일을 안하거나 안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들이 능력이 없어서 안할 수도 있고 관심이 없어서 안했을 수도 있고 하기 싫어서 안할 수도 있고 여러가지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 시민들이 볼 때에 “이대로 그냥 놔둬선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하는 것이지요. 언제까지 정부에 의존하고 지방자치 단체에 구걸만 할 것인가. 우리가 나서서 직접 해보자. 그러면 나중에 정부에서도 도와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지요. 내가 2000년도 4월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3년 4개월정도 사업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오히려 방해를 했습니다. 자기들이 못한 것을 일반 시민들이 하니까 자기들이 거꾸로 직무유기를 했다는 것이 부각되기 때문에 방해를 했습니다. 국회도 찾아가고 청와대에 진정도 하고 문화공보부에도 찾아가서 의뢰도 하였지만 여의치 않았고 2001년도에 천안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자발적인 10만명 서명운동을 했습니다. 우리 천안시민이 똘똘 뭉쳐서 정부에 제안을 해보자는 결의를 가지고 ‘10만명 서명운동’을 해서 10만3천6백21명이 9일동안 서명을 받아서 정부에 제출하였습니다만 지금까지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 같이 이런 연구발표를 하게 되니 천안시청에서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학자들이 발표하니까 가만히 있다가 오히려 자기들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못하고 있는 대신 작년부터 조금씩 조금씩 예산을 일부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지원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한 행사때만 지원을 해주지 그 외 일반 연구사업시에는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요. 그래서 아까 발표자들이 많은 주문을 하셨는데 우리 기념 사업회에서 사실 솔직한 얘기로 예산이 한푼도 없고 독지가들이 조금씩 보태서 하는 것인데 그거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국가조직도 아니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봉급받으면서 하지만, 우리는 내 돈을 쓰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힘이 듭니다. 이런 일은 국가에 정신문화를 올바로 세우고 지역 향토에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지방자치단체나 국가에서 적극 나서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향후 김시민 장군 기념사업회를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키실 것인지?



『김시민 장군이라고 하는 한 자연인이 진정한 충과 의로서 조국을 위해서 큰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분의 국가에 대한 호국애 정신을 계속 우리가 발현하고 선양시키는 일을 마땅히 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금 천안시에서는 김시민 장군 기념사업회 말고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와 그 외 몇개 기념사업회가 있어요. 그런 사업회들은 정부에서 다해주고 지방자치단체에서 다해주거든요. 이름만 가지고 일년에 한번 정도 제사지내는 그 정도 입니다. 그러나 우리같은 경우는 이제 막 생겼기 때문에 모든 사업도 우리가 다해야 하고 그런 행사도 우리가 다 마련해서 해야되는 그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중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더욱 정착이 될 것이라고 보고 그 다음부터는 운영이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 사업계획은 김시민 장군을 국민들에게 더욱 널리 알리기 위해서 김시민 장군의 전기소설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지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내년 2월경에 발간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오늘처럼 김시민 장군의 탄생기 전반에 대한 학술조사가 더 심층적으로 진행이 되어 내년 상반기 중에도 학술조사 연구 보고서가 나올 것입니다. 김시민 장군 탄생기 일대에 대한 전반적인 데이타를 기본으로해서 우리가 유적 발굴이나 정화사업을 해나가야 할 것이고, 또 하나는 역사 교과서에 김시민 장군이름이 중학교 교과서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반줄정도 밖에 안들어 있기 때문에 교과서에 반영하는 작업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외 충남 천안시나 교육청과 협조하여 해야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연구발표에서도 나왔듯이 김시민 장군의 조형물로서 동상건립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여러 가지 사업들을 하나씩 하나씩 단계적으로 해나갈 것입니다.』









▣ 김항용 - 허용기 회장님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문중의 한 사람으로서, 충무공의 방손인 자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협조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런 글을 작성하여 전문 월간지에 게재할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고 계신 태서아저씨께도 감사드립니다.

▣ 솔내 - 태서씨 감사합니다.

▣ 김은회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그 책임은 첫째로 김시민 장군의 후손들인 안동 김씨 문중에 있습니다." 충무공께는 죄스럽고 세인에게는 부끄럽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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