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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효자비(孝子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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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1-27 16:20 조회1,5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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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121권 - 열전 제34 > 효우 >

김천

김천은 명주(溟州) 아전이며 아명은 해장(海莊)이다.

고종 말년에 몽고병이 침범하였을 때 그 모친과 동생 김덕린(金德麟)이 포로로 잡혀 갔다. 그때 김천이 나이는 15세였는데 밤낮 울며 지내다가 잡혀 간 사람들이 도중에서 다수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모친 상을 예법대로 지켰다. 그 후 14년에 백호(百戶) 습성(習成)이란 자가 ★원나라에서 돌아와서 장마당에서 사흘 동안이나 ‘명주 사람 있소!’라고 외쳤다. 때마침 정선(旌善) 사람 김순(金純)이 응답하니 습성이 말하기를

“김씨라는 여자가 ★원나라 동경(東京)에서 말하기를 ‘나는 본래 명주 사람인데 해장이란 아들이 있소’라고 하면서 이 편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당신은 해장을 아는가?”라고 하였다. 김순이 “나의 친우이다”라고 말하고 그 편지를 받아다가 김천에게 전해 주었다. 그 편지에

“나는 살아서 어느 주(州) 어느 마을 누구 집에 와서 노비로 되었다. 배고파도 얻어 먹지 못하고 추워도 얻어 입지 못하고 낮이면 밭 매고 밤이면 절구질한다. 그 동안 갖은 고생을 다 겪었다. 누가 나의 생사(生死)를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김천은 이 편지를 읽고 통곡하였으며 식사 때마다 목이 메어 밥을 넘기지 못하였다.

김천은 가서 모친을 속신(贖身)하려 하였으나 집이 빈한하여 재물이 없었으므로 남에게서 은(銀)을 꾸어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 모친을 찾으러 가겠다고 신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가하지 않으므로 되돌아왔다. 그 후 충렬왕이 ★원나라로 입조(入朝)할 무렵에 또 서울로 와서 청하였으나 조정의 결정은 지난번과 같았다. 김천은 오랫동안 서울에 묵고 있으면서 옷은 해어지고 식량도 떨어져 우울하게 지나가던 중에 도상에서 같은 고을 중 효연(孝緣)을 만나서 눈물을 흘리며 슬픈 사정을 하소연하니 효연은 말하기를

“내 형 천호(千戶) 효지(孝至)가 지금 동경으로 가니 당신은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곧 주선해 주었다. 어떤 사람이 김천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모친의 편지를 받은 지 벌써 6년이 지났는데 그간 모친의 생사를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도중에 불행히 강도나 만나면 목숨과 돈을 빼앗길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천은 “가서 못보더라도 목숨과 몸덩이를 어찌 아끼겠는가?”라고 말하고 드디어 효지를 따라 동경에 들어가서 우리 나라의 역어 별장(譯語別將) 홍명(弘命)과 함께 북주(北州) 천로채(天老寨)로 가서 모친이 있는 곳을 찾았다.

★원나라 군졸 요좌(要左) 집에 갔더니 한 노파가 나와서 절을 하는데 누더기옷에 머리는 쑥대머리요. 얼굴에는 때가 더덕더덕 묻었다. 김천은 그 노파를 보고도 자기 모친인 줄 모르고 “너는 어떤 사람이냐?”라고 물으니

“나는 본시 고려 명주 호장(戶長) 김자릉(金子陵)의 딸인데 동생인 김용문(金龍聞)은 이미 진사(進士) 급제하였고 나는 호장 김종연(金宗衍)에게 출가하여 해장과 덕린 두 아들을 두었더니 덕린은 나를 따라 이곳에 와서 있은 지 이미 19년이 되었소! 지금 서쪽 이웃에 사는 백호(百戶) 천로(天老)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소! 오늘 뜻밖에 다시 우리 사람을 보게 되었구려!”라고 하였다. 김천은 이 말을 듣고 꿇어앉아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울었으며 어머니도 김천의 손을 쥐고 울면서 “네가 진정 내 아들이냐?! 나는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고나!”라고 하였다. 요좌가 마침 집에 없어서 김천은 어머니를 속신하지 못하고 동경으로 가서 별장 수룡(守龍)의 집에 한 달이나 유숙하다가 수룡과 함께 요좌 집에 다시 가서 속신을 요구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김천이 애걸복걸하여 은 55냥으로 겨우 속신하였다.

어머니를 말에 태우고 김천은 도보로 따라왔으며 김덕린은 동경까지 배송 와서 울면서

“편안히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따라가지 못하나 하늘의 복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자가 서로 안고 흐느껴 울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때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원나라로부터 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경에 이르러서 김천의 모자를 불러 보고 칭찬과 감탄을 마지않았으며 ★원나라 총관부(摠管府)에 부탁하여 증명서를 교부하며 식사와 숙사를 제공받으면서 귀국하도록 하였다.











▣ 김윤만 - 주회 아우님이 고려사열전 효우편을 기 소개해 주셨습니다.

▣ 김항용 -

▣ 솔내 -

▣ 김은회 - 주회 아우님 건강하시죠.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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