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송시열 湖西士林과 우리가문 13 --- 낙서공(김자점)은 이이, 성혼, 이항복의 문하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11-29 05:28 조회1,587회 댓글0건

본문



■ 인터넷 검색



광해군 15년(1623) 3월13일 새벽 ★김유, ★李貴(이귀), ★崔鳴吉(최명길), ★金自點(김자점 ), ★沈器遠(심기원) 등이 쿠데타軍 6700명을 거느리고 ▲弘濟院(홍제원:홍제동)에 모였다 . ★綾陽君(능양군:나중의 仁祖)의 친병과 장단부사 ★李曙(이서)의 부하 700명도 합류했다.



이들은 김유를 대장으로 삼아 대오를 가다듬고 깃발을 세웠다. 새벽 3시경이었다. 反正軍(반정군)은 ▲洗劍亭(세검정:지금의 종로구 신영동)을 거쳐 ▲彰義門(창의문:도성의 서북문)을 통과하여 ▲창덕궁으로 진군했다 . 洗劍亭이란 반정군의 지도자 김유·이귀 등이 이곳을 흐르는 내에서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창덕궁을 수위하던 훈련대장 ★李弘立(이홍립)은 사전약속대로 궁문(▲돈화문)을 열어주고 몸을 피했다. 반정군이 궁궐에 난입하자 광해군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은 다음 내시에게 업혀 도망갔다가 생포되었다.

-----



反正軍이 내세운 명분은 두 가지였다. 그 첫째가 형(★임해군)과 아우(★영창대군)를 죽이고 母后(모후:★인목대비)를 폐한 反인륜적인 행위였고, 둘째는 明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後金=淸)와 교분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1618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西宮(서궁)이라고 낮춰 부르게 했다. 따라서 폐비 문제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後金(후금)과의 관계 개선은 국가이익 확보에 있어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 대목이었다.



따라서 인조반정은 당시의 집권당 大北의 독주에 대한 반대 정파의 반격이었다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인조반정의 주체세력은 광해군 시절에 배척을 받았던 西人들이었으며, 모두 ★李恒福(이항복:반정 당시 故人)의 문하 생들이었다.



西宮에 유폐되었다가 反正으로 궁중의 최고 어른이 된 ★인목대비는 자신의 소생 永昌大 君(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을 증오하여 『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라며 『 목을 잘라 망령에 제사지내고 싶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만류로 광해군은 신문과 형벌을 겨우 면하고 강화 喬洞島(교동도)로 귀양을 갔다.









■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01.3-11쇄, 이덕일, 김영사)



광해군15년(1623) 3월 전부사 ★김류, ★이귀, ★이괄,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 서인들이 이끄는 6,7백여 명의 병력들이 서울 북쪽 ▲홍제원에 모였다. 이들은 광해군과 북인정권을 무너뜨리려 모인 서인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추대받은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도 친병을 거느리고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00과 합류해 먼저 ▲창의문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했다.



이때 광해군은 쿠데타에 가담한 ★김자점이 이미 총애하는 상궁 ★김개시에게 보낸 술과 안주로 궁인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다가 쿠데타군의 급습을 받고 무력하게 무너졌다.



-----

당시 송시열을 비롯한 산림은 소현세자와 강빈의 불행 뒤에는 ★조귀인과 낙당(洛黨)의 영수인 ★김자점(金自點)이 있다고 믿었다. 조귀인과 김자점은 사돈지간이었다. 조귀인 소생이자 인조의 외딸인 효명옹주(孝明翁主)의 남편 김세룡(金世龍)이 김자점의 손자이었던 것이다.

김자점의 낙당 또한 서인의 한 갈래지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이 주도하던 산림은 당시만 해도 이런 정치공작에 반대했다. 이때만 해도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 여주군지



pp1746 仁祖反正(인조반정)의 성공

-----

그런 가운데 가장 심하게 박해받은 것은 서인들로서 광해군 말기 즉 1620년대에 들었을 때에는 조정에서 서인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서인 가운데서는 1620년대 초부터 역모의 혐의가 있었던 사람은 함흥판관을 지낸 ★李貴(이귀)와 儒生(유생) ★金自點(김자점)이다.



이 두사람은 다같이 栗谷(율곡 ★이이)과 牛溪(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들이요. 이귀의 딸이 김자점의 아우 김자겸의 부인이었으니까 사돈지간이기도 했다.



먼저 양사에서 이귀. 김자점 두사람이 큰일을 꾸민다고 들고 일어나자 김자점은 재빨리 이귀의 딸인 弟嫂(제수)를 궁중에 들여보내 광해군이 가장 총애하는 상궁 김씨를 뇌물로 포섭하였다.









■ 조선일보 (2003.02.06)



[帝王들의 성공학] 효종-조선판‘뉴프론티어’운동의 기수

-----

김자점은 인조반정 공신이기도 했다. 이시백 등 다수의 반정공신들과 함께 명망있는 ★이항복의 문하생이었던 김자점은 청나라에 항복하여 통역관을 담당했던 정명수까지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반정공신들 중에는 김상헌 이시백 같은 강력한 반청파도 있었지만, 당시 친청파 김자점의 인맥과 친화력에서 나오는 권력은 누구보다 막강했다.









■ 디지털한국학



김자점(金自點)

1588(선조 21)∼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억령(億齡), 아버지는 ★함($함04)이다.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였다.

-----



3. 반(反)사림사회 행동 및 평가

1646년, 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林慶業)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인조 말년에는 ★신면(申冕)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1649년 거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자 새로 즉위한 ★효종은 즉시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시(權#시45)·★이유태(李惟泰)·★김상헌(金尙憲) 등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공격에 의하여 1650년(효종 1) ▲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새 왕이 구신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청나라에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에서는 즉시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였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익(#익12)이 수어청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폭로됨으로써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그의 무리인 ★김응해(金應海)·기진흥(奇震興)·이파(李坡)·심지연(沈之演)·황헌(黃#헌07) 등도 각자의 직에서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문과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행위 등 당시 사림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하여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淸選考,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吳洙彰〉









▣ 김태서 - 잘 읽었습니다.

▣ 김윤식 -

▣ 김윤만 -

▣ 솔내 -

▣ 김발용 -

▣ 김태영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