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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충무공 김시민 장군 학술심포지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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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12-06 17:20 조회1,5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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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주대첩과 김시민 장군 ; ‘3천이 3만을 이겼다’


  1592년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년의 전쟁에서, 일본은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이며, 순조롭게 조선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개전 초기 전투의 진행 과정을 보면, 이러한 단정은 그다지 틀린 것도 아니다. 4월 14일 부산에 도착한 뒤,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하였는데, 4월 24일에 탄금대 전투, 5월 3일에 한성 입성, 6월 10일에 평양에 진입하는 등 가히 일방적인 전투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의 이러한 판단을 수정케 하는 陸戰이 있었다. 그것이 1592년 10월에 있었던 진주성 전투이다. 일본군으로서는 육전에서의 최초, 최대의 패배였으며,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던 상황에서 반전을 도모할 수 있는 전투였다. 일본이 느낀 치욕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강화회담이 진행되는 중에도 10만의 대군에게 명하여 반드시 진주성을 함락시킬 것이며, 목사 김시민의 목을 베어와야 한다는 특명을 내린 것에서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성안에 있던 6만여 명의 사람이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몰살되었던 것도 일본이 당했던 치욕에 대한 복수의 결과였다. 그러나 진주성의 함락은 일본의 승리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조선이 이긴 것이며, 조선의 치욕이 아니라 명예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목사 김시민의 충절정신과 민·관·군 일체의 저항정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진주는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교두보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는 호남으로 진출하는 교통로였고, 호남과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진주의 함락은 호남의 함락을 의미했고, 호남의 함락은 곧 조선의 함락이라는 말로 대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진주성 전투와 권율 장군의 금산전투,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의 승리를 통해서 전라도 곡창지대를 보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8월 중순부터 병력의 일부를 김해로 집결시키고 약탈한 물자를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운반하였다. 왜군 2만여 명은 9월 24일 김해를 출발하여 진주로 향하였다. 창원에 있던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은 창원 동쪽 노현(露峴)에서 2천여 명의 병력으로 저지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진주로 후퇴하여 동문 밖에 진을 쳤다.
  9월 26일 함안에 도착한 왜군은 병력을 2개 제대로 나누어서,10월 3일에 1만여 명의 선발대를 진주 동쪽의 마현(馬峴)으로 진출시켰다. 당시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된 왜군은 3만여 명이 넘었다.
  당시 진주성은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함으로 수성장(守城將)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경상도 지역 일대에는 勤王軍의 차출로 진주를 포함한 경상우도 서부의 10여 읍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이 空城상태였다. 다만 진주성은 다른 성에 비해 나은 편으로, 오합지졸일지언정 수성군 1천여 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병기와 군량은 고갈된 상태였다.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은 고성현령 김현(金絢)을 진주 수성장으로 차정하였고, 朱大淸은 판관 김시민과 함께 진주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김시민은 군사를 수습해서 수천 명을 얻었고, 前郡守 金大鳴 등을 召募官으로 삼아 6백여 명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진주성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 증강될 수 있었다.
  이 결과, 진주 수성군은 5월말부터 8월까지 진주성에 접근하는 왜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으며, 인근지역인 泗川·鎭海·固城 등의 수복전에 참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주축이 된 군대가 김시민 부대였고, 전공을 세운 그는 7월에 진주목사로 승진되었으며, 10월에는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加資되었다.
  의병장 김면(金沔)의 지원 요청에 따라, 9월초에는 1천여 명을 이끌고 居昌에 赴援하여 金山(현 金泉)·地禮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된 김성일의 지시에 의해 진주성 수비 책임을 맡고, 진주로 돌아갔다.
  왜군 3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던 당시 진주성의 수성군은 3,800여 명 정도였다. 김시민은 이들 군대들을 소속 부대별로 각각 수비구역을 정하여 방위하도록 명하였다. 성중에는 수성군 외에 노약자를 포함하여 수만 명의 민간인도 남아 있었다. 이들 역시 수성전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음은 재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주성의 수성군 현황은 다음과 같다.




▣ 김우회 - 엄청난 수고를 계속하고 있음에 그고충에 감사를 보냅니다.
▣ 김윤만 - 직접 워드화하는 작업 수고 많으십니다.
▣ 김태서(제) - 항용 조카님, 잘 지내시지요.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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