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Re:Re:상서공(휘孝印)의 흔적을 찾아 월출산을 넘다 (자료2-최씨무인정권과 우리선조님)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3-12-17 02:12 조회1,619회 댓글0건

본문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2/01/04 08:11 (from:211.57.153.114) 조회 : 51

金方慶 열전 02 (출생과 선계② : 1-15세)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김방경은 최씨정권 아래에서 정치적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안동김씨 가문의 후광과 최씨정권의 비호, 그리고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동김씨는 태조 왕건의 외손으로 출발하여 고려전기에 삼한공신을 배출하고 중앙의 고위직을 보유하였던 문벌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계는 무신란 등 혼란기에 처해 한때 안동지방으로 밀렸다.



이 가계가 다시 중앙으로 진출한 것은 최씨정권의 문신기용책에 의해서였다. 과거를 통해 김방경의 조부 敏成이 다시 중앙으로 진출하였고, 백부 金敞은 ★최우의 집권기에 재추를 지냈으며, 부 孝印은 상서에 이르렀다.



-----



김창 효인 형제가 요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최씨무인정권과 관계가 깊다. 이들은 ★최충헌의 집권기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최이가 정방을 설치하고 문신을 기용하는 정책을 취했을 때, 김창은 중용되었다.



당시에 김창의 위치를 아는데 다음의 사료는 참고된다.



《고려사》 제102권 - 열전 제15 >

김창

김창의 그전 이름은 효공(孝恭)이고 안동(安東) 사람이니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희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직사관(直史館)으로 있다가 여러 번 벼슬이 올라서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임명되었다. ★최이가 그를 불러서 정방(政房)에 두고 전선(銓選-인재 선발)임무를 맡겼는데 당시 이부(吏部), 병부(兵部) 관계의 선발에 응하는 자가 무려 수만 명에 달하였다. 김창이 한 번 보면 그들의 성명을 모두 기억하였으며 무슨 일로 신소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즉시 그 질문에 응답하여 해명해 주었으나 그 내용이 사소한 착오도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기억력이 강한 데 대하여 탄복하였다. 그러나 전주(銓注)할 때에는 일일이 ★최이에게 문의하고 결정하였으며 자기의 견해로 가부를 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은즉 그가 대답하기를 “하늘이 우리 진양공(晋陽公-★최이)의 손을 빌리어서 국정을 처리하는 것인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간섭하겠느냐?”고 하였다. 그의 아첨이 대개 이러하였다. 고종 때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되었다가 문하 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되었다. 김창은 세도가에 아부하여 오랜 기간 정권에 참가하고 있었던 터이라 하루 사이에 아홉 번이라도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항상 자격과 절차를 준수하였기 때문에 자기 나이 60세에 가까워서야 상(相)으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벼슬에 대한 탐욕이 적은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43년(1256년)에 수 태사 문하시랑(守太師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판 이부사(判吏部事)로 재직하다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 임종시에 그의 조카 김방경(金方慶) 등에게 유언하기를 “자기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하는 것을 사절하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김창은 ★최이에게 중용되어 정방에서 전주를 담당하였고, 권문에서 오래동안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승진이 가능할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이규보나 조충 등 최씨집권기에 재추를 지냈던 인물들도 김창과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동년이었다. 김창의 지위는 막강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고종때 기거사인을 지냈던 이?이나 ★최이의 문객으로 권력이 막강했던 유천우는 김창에 의해 추천되어 성장한 인물이었다. <남인국, 최씨정권하 문신지위의 변화, 대구사학22, p102-104, 1983,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9, 새문사, 1987> 김창은 최씨정권과 밀착하여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김창의 동생 孝印도 ★최항의 치하에서 고시관을 지냈다. 그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글씨를 잘 썼고 또 한림학사에 이르렀던 것은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의 학문적 능력이 탁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병부상서에 이르른 것은 형과 더불어 최씨정권에 밀착되어 발탁되었던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최씨정권은 왜 이들 형제를 발탁하였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이들이 한미한 가문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5>. 이 같은 지적은 이 가계가 안동지방으로 밀려났던 처지에 있었던 점에서 타당하다.



이와 더불어 형제가 최씨정권에 발탁된 이유로 이 가계가 안동으로 밀려나기 이전에 삼한공신으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점도 고려된다. 최씨정권은 일시 지방으로 밀려나 당대는 한미하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누대의 문벌귀족이었던 안동김씨 인물을 다시 기용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敞과 孝印은 최씨를 하늘이 내린 존재로 인정하여 적극 충성을 다하였다. 물론 金敞같은 공신의 후예가 최씨정권을 지지하였던 것은 최씨정권의 안정유지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류선영, 1993, 전남대)



김방경은 1227년(고종14) 16세의 나이로 삼한공신 태사대광 상서우복야였던 日兢의 음보로 吏屬 同正직인 양온사 同正으로 관계에 처음 나아갔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散員으로 처음 입사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가 처음 받은 실직이 종9품 대정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맨 처음 양온사 동정직으로 진출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어 그는 무반 실직인 隊正을 받았고 나아가 태자부 牽龍, 散員 겸 식목綠事에 임명되었다. 그는 무관직으로 출발하였으나 문하시중 ★최종준이 그를 예우할 정도로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는 선대의 후광아래 거듭 승진되었다.



이어 그는 서북면 병마綠事, 別將, 郎將 監察御使가 되었다.

1247년(고종34) 36세에 그는 서북면 병마判官으로 승진되었고,

이어 견룡행수, 유섭장군 겸 給事中 御使中丞, 大將軍, 지합문형부사, 金吾衛大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안동김씨대동보 권1 충렬공행장>



이와 같이 최씨집권기에 그는 백부와 부, 그리고 철원최씨로 재추의 자리를 지켰던 ★최종준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등의 비호아래 급속히 성장하였던 것이다.







1. 최씨무인정권과의 관련



김방경이 최초로 관직을 받은 때는 1227년 (고종14) 인데, 이때 그의 나이 16세였고 최씨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는 대외적으로 고려와 몽고 간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때였다.



1219년 (고종6년) 몽고의 공격에 쫓긴 거란인들이 고려의 강동성에 집결하였을 때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거란인들을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려와 몽고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몽고는 고려에 막대한 양의 조공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고려측의 반감이 거세어지는 가운데 1225년 (고종12) 공물을 걷어 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변에서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고가 외교를 단절함에 따라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쟁이 준비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음서로서 동정직을 받았고 이어 무반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관직을 받은 지 5년째인 1231년 (고종18) 마침내 고려와 몽고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몽고의 1차 침입을 맞은 고려는 1232년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고 장기항전을 준비하였다. <민현구, 몽고군 ·김방경·삼별초>



이로써 고려는 1259년 (고종46) 강화가 성립될 때까지 약 30년동안 6차에 걸쳐 몽고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최씨정권의 주도아래 항몽전쟁이 수행되는 이 시기에 김방경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살펴 보자. 다음 사료를 보자



고종(高宗) 때에 나이 16세 되었는데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되었다. 시중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김방경에게 맡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 서북면 병마판관이 되었으며, ----- 중앙으로 돌아와 견룡행수가 되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김방경은 시중 ★최종준의 사랑을 받아 감찰어사, 서북면 병마판관, 견룡 행수 등으로 주요 무반직에 빠르게 승진하였던 것이다.



★최종준은 철원최씨 가문으로 이 가문은 최씨 집권기에 6명의 宰樞를 배출하였으며 <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p100-101> 최우는 바로 ★최종준의 조카 사위였다. 또한 ★최종준은 강화천도를 주도하는 등 최씨정권에서 절대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열전 권12 ★최종준전>



이러한 ★최종준이 그를 돌봐 주고 있을 정도로 그는 백부, 부친에 이어 최씨정권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 중에서 최씨 정권과 결탁된 차원의 활동으로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다음의 사료는 그것을 말해 준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재상이 권신(權臣-권이)에게 고소하여 이르기를 “이번 어사는 먼저 번 어사처럼 공무를 돌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김방경이 왔으므로 권신이 꾸짖으니 김방경이 대답하기를 “먼저 번 어사처럼 일하려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나는 국가 창고의 저축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소한 자가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며 권신 역시 얼굴 색이 변하였다. <중략> 김방경이 서울에 들어와서 견룡 행수(牽龍行首-의장병의 지휘관)로 되었는데 당시에 금위(禁衛-왕궁을 지키는 관원들)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권세 있는 집안에 가서 붙어 지내기 때문에 왕궁 수비는 아주 해이되어 있었다. 김방경은 이러한 일을 대단히 분하게 생각하고 앓는 때에도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지를 아니 하였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및 고려사절요 권16 고종 35년 3월>





김방경은 감찰어사로 있으면서 재상의 청탁을 거절하고 국고를 비축하려 하였고, 또 금위대로서 왕실 숙위에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가 비록 최씨정권과 밀착되었지만, 그는 국가재정의 확보와 왕실의 보호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왕실을 정점으로 한 국가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국가체제 유지의 노력은 백성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살필 수 있다. 몽고병의 4차 침입을 맞았을 때 조정에서는 북계의 백성들을 섬으로 옮기게 조치하였는데 서북면 병마녹사를 지낸 바 있는 김방경은 이때 (고종 35년 3월)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다음과 같이 활동하였다.



그 후에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 판관(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군이 침공해 왔으므로 여러 성(城-고을)들에서 위도(葦島)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인민들을 보호하게 되었다. 이 섬에는 평탄한 땅으로서 경작할 만한 곳이 10여 리 가량 있었으나 조수물이 밀려 들어오곤 하였기 때문에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방파제(防波堤)를 쌓고 파종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었으므로 그 덕택에 살아 나갈 수가 있었다. 또 섬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어서 항상 육지에 나가서 물을 길어 왔는데 때때로 물 길러 나간 사람들이 붙잡혀 갔었다. 그래서 김방경이 비가 오면 그 물을 저축하게 하여 못을 만들었으므로 그러한 근심이 드디어 없어졌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그는 백성들을 위해 위도의 식량문제와 식수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피난지에서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뒤에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는데, 이러한 치적 등으로 그는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었으며 뒤에 무고를 당했을 때 서북지역의 후원으로 그것을 벗어나게 되었다. <고려사 열전 권17 김방경전>



최씨정권 아래에서 최씨정권의 핵심인 ★최종준 등의 비호를 받는 김방경이 최씨정권의 정책에 호응하여 항몽에 노력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김방경은 국가재정과 왕실보호,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안정에도 적극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무인정권에 비판적인 왕실과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