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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상서공(휘孝印)의 흔적을 찾아 월출산을 넘다 (자료1-월남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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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2-17 02:10 조회1,6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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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사지 (1995, 목포대박물관, 강진군)



●월남사지의 역사문화적 배경 (이해준 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p.25

한편 청자가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기에는 수선결사가 승주의 ▲송광사를 중심으로 정치세력화하면서 강성해진다. 이러한 수선결사를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수선사 제2세이자 월남사 석비의 주인공인 ★진각국사 惠諶(1178-1234)이다.

진각국사는 원래 화순현 사람으로 수선사를 창설한 ★보조국사 지눌의 문하에 들었으며, 1210년 보조국사가 죽자 수선사의 제2세가 되었다. 그가 수선사의 법주로 자리하였을 때 무신정권의 실력자인 ★최우는 그의 아들 ★萬宗과 ★萬全(崔沆)을 보내어 제자를 삼았다.

이같은 사연은 이규보(1168-1241)와 최자(1188-1260)가 지은 월남사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에서 진각국사의 제자로 崔怡와 崔沆 등 최씨정권의 핵심인물들이 보이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주지하듯이 진각국사는 ▲송광사, ▲월등사, ▲단속사 등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인물로 정작 월남사에서의 법적은 그렇게 들어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진각국사의 석비가 ▲월남사에 세워지게 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수선사가 무신정권에 의하여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처럼 월남사도 그들에 의하여 중요한 사찰로 경영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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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는 이 시기에 강진의 ▲만덕산 백련사를 중심으로 ★원묘국사 요세에 의하여 1236년 창도되는 또하나의 불교결사로서 백련결사를 함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요세의 백련결사는 수선사와 사상적 입장을 달리하면서 발전을 이루고 있었는데, 시기적으로 월남사가 수선사의 관할로 발전하던 시기와 연계되고 있어 이점도 명확하게 정리될 필요를 느끼게 된다.







● 월남사의 연혁과 그 변천 (이병희 목포대학교 사학과 교수)



p.30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던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이 월남사는 평지가람으로서, 당시 교통상 아주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月南院이 인근에 있었으며, 성전에서 북쪽으로 ▲누릿재(黃峙)를 넘어 영양읍에 가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월남사의 지리적 위치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정치 사회 동향의 변화에 따라 많은 변천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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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월남사는 친후백제적인 성향을 보였으므로 고려시기에 국가로부터 우대를 받는 사찰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국가의 경제적 지원, 고승의 파견을 통한 사찰 위치의 고양 등은 기대하기 곤란하였을 것이다.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교통상의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을 가지면서 유지되어 갔다고 보인다. 이러한 사정하에 있는 월남사의 위치가 상승되는 것은 수선사의 제2세 사주 혜심과 연결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수선사의 제2세 사주인 ★혜심은 수선사를 확고한 위치에 올려 놓는데 크게 기여한 승려였다. 혜심은 1178년 향공진사인 ★崔琬을 아버지로 하고 裵씨를 어머니로 하여 나주 화순현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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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6

그리하여 ▲조계산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는 대총림을 이루었다. 문하시중 ★최우는 혜심의 풍운을 익히 듣고 여러 차례 개경에 나오기를 간청하였지만 혜심은 그때마다 적당한 구실을 붙여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우는 슬하의 두 아들 ★萬宗과 ★萬全(뒤에 최우를 이어 집정이 된 崔沆)을 보내어 혜심의 제자가 되게 하고 常住資具를 모자람이 없이 마련해 주도록 하였으며 수시로 茶香---法服에 이르기까지 일용물품 등을 개경에서 직접 내려보내어 需用에 모자람이 없게 하였다.



혜심에 대해서 ★최우 정권은 이처럼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나아가 혜심에게 선사 대선사의 僧階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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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3년 그가 수선사에 머물면서 병이 나자 ★최우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고종에게 알려 어의를 보내도록 하는 등 극진한 예우를 하였다. 다음해인 1234년(고종21_에는 ▲月燈寺(순천시 월등면에 있던 사찰로 추정)로 옮겼다가, 6월 임종이 임박하자 문인에게 일을 부탁하고 곧 시적하였다.

바로 월등사 북쪽의 봉우리에서 화장하고 1235년 5월 ▲廣原寺(현재 송광사에 딸린 廣原庵이 분명)의 북쪽에 장사를 지내고 부도를 세우니 고종은 圓照之塔(원조지탑)이라고 사액하였다. 이에 앞서 그의 歸寂이 알려지자 진각국사란 시호가 내려졌었다. 이때 국사의 향년은 57세이고 僧臘은 32년이었다.



혜심이 죽은 후에 제자 ★夢如는 ★鄭奮을 통해 비를 세우려고 ★최우에게 요청하였다. 최우는 "和尙은 在世時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했으니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고 하면서 ★고종에게 알리자, 고종은 ★이규보에게 명해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이 비문이 撰述된 것은 진각국사가 입적한 지 4년이 지난 1238년에서 1241년 사이였으며, 그후 10여년이 지난 1250년에 陰記와 함께 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혜심대에는 최우정권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다수 수선사의 입사자가 되었다. 혜심비의 음기를 보면, 수선사의 입사자는 최씨 무인정권의 주인공인 최씨가문의 사람들이 많았고, 최씨 정권의 핵심적 인물들이 많이 들어 있었으며, 중요한 무인들 예컨대 金仲龜 金元義 盧仁綏 같은 정권의 핵심에 있는 전형적인 무인도 있었다. 그밖에 혜심은 다수의 승려, 관리 거사와 교류하였다.



그리고 혜심은 최우에게 보낸 書狀 중에서 꿈을 가탁하여 최충헌을 上根人이라는 불교적 용어를 써 가면서 비상한 인물로 추앙하고 그의 施政을 적극 칭송하였다. ----- 또한 최우를 위해 祝壽道場(축수도량)까지 베풀기도 하였다. 혜심을 거치면서 수선사는 전 불교교단을 포괄하는 위치로까지 발전하였다. 그 결과 수선사는 談禪法會의 중심 산문으로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혜심은 이처럼 최씨 무인정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수선사의 위치를 크게 상승시킨 인물이었다. 수선사는 건물 규모도 크게 커졌고, 많은 승려들이 머무르며, 공경귀족이 내왕하는 사찰로 자리잡았다. 나아가 혜심은 수선사의 경제기반을 확보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최씨정권의 핵심적인 인사인 최우 노인수 김중구 서돈경 등으로부터 241결에 달하는 토지를 시납받았으며, 또 1만석을 상회하는 息利穀(식리곡)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식리곡의 운영을 위해서는 11개의 말사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위치에 있던 승려인 혜심의 비가 월남사에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혜심과 월남사의 관련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혜심의 비가 세워지기 전부터 혜심이 입적하기 전까지 혜심과 월남사는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눌대에는 관계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눌 이후 수선사의 사세가 확장되면서 많은 사찰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월남사도 그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지눌은 吉祥寺를 중창하고서 修禪寺로 사명을 바꾸었으며, 종파도 화엄종에서 선종으로 변경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億彿山(광양 소재)의 白雲精舍와 積翠庵. 瑞石山(광주 무등산)의 珪峯蘭若(규봉난약)와 祖月庵 등 4개 사찰을 세웠다.

지눌이 세웠으므로 지눌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찰이었고, 뒤에는 수선사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찰이었다. 그것은 이들 사찰에 지눌 이후 수선사의 주법들이 자주 머무는 사실에서 뒷받침된다.



혜심 본인도 수선사의 말사를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혜심이 최우에게 요청하여 고종의 허락을 받아 여러 사찰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안찰사는 殘廢(잔폐)한 사찰을 수선사에 소속하게 하였다. 이에 7개의 말사가 수선사 소속으로 바뀌었다. ----- 혜심은 최우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안찰사의 지원에 힘입어 잔폐한 이들 사찰을 차지하고서 부근의 民人들을 사역하여 보수하였다. 만약 7개 사찰이 소속 종파가 있었다면 수선사에서 차지할 때 커다란 분규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미 4개 사찰은 이보다 앞서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를 더하면 말사는 11개가 된다.



혜심이후 혼원과 天英대에는 중수를 통해 말사로 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혼원은 下山所인 臥龍寺의 殿宇가 빈폐한 것을 모두 重新하였으며, 천영은 佛臺寺와 大原寺를 중창하였다. 이후 이 사찰들은 수선사 계통이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혼원과 천영이 사찰을 중창한 것은, 이들 승려의 개인 재산이 여유가 있어서 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수선사의 재력이 뒷받침되어서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의 재력이 뒷받침된다면 잔폐한 사찰을 중수 내지 중창할 수 있는 것이고, 중수 내지 중창을 하면 그 사찰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월남사도 수선사의 사세가 확장되면서 수선사의 관할하에 들어온 사찰의 하나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혜심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것은 아마 사실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고, 퇴락한 월남사를 크게 중창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혜심대에 월남사는 크게 퇴락하였다고 생각되며, 이를 혜심이 중창하였고, 그 뒤로는 수선사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찰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혹 사찰명의 변경이나 소속 종파의 변화도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2) 혜심비의 건립과 내용



혜심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1234년 월등사에서 입적하였으며 거기서 다비가 행해졌다. 영골은 곧 본산으로 옮겨져 광원사의 북방에서 장사지냈으며, 부도가 세워지니 사액하여 원조지탑이라 하였다. 그런데 혜심의 부도는 이처럼 광원사에 있으나 비는 월남사에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진각국사비가 처음부터 월남사에 세워질 예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비의 음기 중에, 월남사에 立碑키로 되어 왕께 알리고 비문을 加撰하라는 명령을 받아 음기가 씌어졌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당초 단속사에 세우려다가 어떤 사정 때문에 진각국사와 인연이 깊은 또다른 절인 월남사에 세워졌던 것이다. 이 비의 비문이 이규보에 의해 撰述되는 것은 진각국사가 입적한지 4년이 지난 1238년(고종25)부터 1241년 사이의 일이지만, 그후 약 10년이 지난 1250년에 陰記와 함께 새겨서 마침내 비가 건립되었던 것이다.



이 비의 전면에는 이규보가 찬한 혜심의 비명이 있으며, 후면에는 최자가 찬한 음기가 있는데, 특히 후면의 음기는 혜심의 후원세력과 수선사의 입사자 등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현재는 비의 전면은 떼어져나가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으나, 후면의 내용은 상당한 부분이 남아 있어 많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비의 전면은 그 碑片이 송광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로서는 파악이 불가능한 상태다. 그 비문은 이규보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어, 혜심의 생애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규보의 <초고본>과 비문의 내용에는 꽤 차이가 있다.

<비문>의 내용은 탁본한 것이(1815∼1915년 사이에 탁본한 것) 발견되어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는데, <문집본>에서는 비석이 좁아서 비문의 내용을 줄였다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비문을 새기려 하였으나 공간이 좁아서 줄이라는 요청이 있었고 이를 따랐으므로 두가지 기록(문집본과 비석본)은 같지 않다.



그러나 서두와 결부를 제외하고도 축소한 부분보다 글자와 내용이 오히려 증가하였다. 수정하여 표현을 바꾼 글자수를 제외하고 증가된 글자수가 128자이고, 감소한 수자는 43자로서 결국 85자가 증가하였다. 그라나 중요한 내용이 추가된 것은 아니다.





후면에는 자경 2.5cm의 해서체 銘文이 있는데 전면의 비문과는 별도인 음기로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撰刻된 것이다. 이 음기는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로 1∼2행은 撰書者를 나타내고 있다. 찬자는 당대의 문사였던 한림학사 최자(1188∼1260)이며, 서자는 수선사에 있으면서 필법가로 이름있던 탁연으로 왕명에 의해 撰述書記되었다.



둘째는 3∼7행까지로 본문에 해당하는데 비와 음기에 대한 자세한 경위를 알 수 있다. 이 내용에 따르면 당시의 세력가 최우,최항의 각별한 관심과 주선으로 월남사에 세워지게 되었고, 진각국사의 葬事시에 많은 異蹟이 나타났던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는 8∼30행까지로 진각국사가 이끌었던 수선사의 입사자 가운데 교종을 포함한 승려 다수와 최이,최항을 비롯한 최씨정권의 핵심인물 남녀 총 118명의 중요한 인물이 제자로 열기되었으며 음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넷째로 이 비의 건립관계자와 건립년월을 말해준다. 이 비는 (지)영암군부사의 총책임 아래 영암군의 일반 백성이 노역군으로 동원되었으며, 문인 수명이 幹事立石을 하여 1250년 4월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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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수선사 入社자는 크게 세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1)최씨무신정권의 주인공인 최씨가문의 사람들, 2)최씨정권의 핵심적 인물들, 3)중요한 무인들의 존재가 그것이다. 이 음기의 내용은 진각국사가 이끈 수선사를 매개로 하여 최씨 무인정권과 선종이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무신란 당시 고려 불교계에서는 교종이 문신귀족이나 왕실과 결탁하여 우세한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무신란을 계기로 문시귀족과 함께 몰락할 처지에 놓이게 된 교종세력은 무인정권과 무력항쟁을 거듭하게 되며, 결국 이 항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교종세력의 공격을 받자 무인정권은 선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중부, 최충헌 모두 그러하였다. 그러나 선종이라도 정권에 비판적인 경우에는 가차없이 배척하였다.

특히 최씨무인정권은 신앙결사운동으로서의 수선사를 적극 지원하였는데,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이유도 없지 않았겠지만, 수선사의 사주들이 대부분 지방의 향리지식층으로서 이전의 문인귀족과는 구별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무인정권과 수선사는 밀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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