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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김순)께서 소장하신 산수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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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3-12-27 02:02 조회1,7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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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金恂)께서 갖고 계신 산수도에 쓰여 있는 달전사의 운을 차운하여 홍애(홍간)선생께서 지으신 시가 있어 소개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珣으로 되어 있으나 고려시대 인물의 한자는 변이 틀린 경우가 허다하고 홍애선생과 문영공과는 동시대 인물이므로 여기에 김순은 문영공선조이심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동문선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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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o01.gif 칠언고시(七言古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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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on09.gif 상서 김순이 가진 산수도에 쓴 달전사의 운에 차운하여[金尙書珣所畜山水圖達全師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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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간(洪侃)

일천 봉우리는 푸른 하늘 위에 반쯤 들어갔는데 / 千峯半入靑天上
그 밑에 긴 강이 있어 강물이 맑다 / 下有長江江水淸
차가운 푸른 빛이 몇 천 거듭인가 / 空翠生寒幾千里
골짝마다 우렁찬 솔바람 소리일네라 / 颼飀萬壑松風聲
보일락말락하는 그윽한 사람은 어디로 향해 가는가 / 幽人隱見向何處
짐 실은 저는 나귀 가는 강 길이 밝다 / 䭾着蹇驢江路明
벼랑이 무너지고 시냇길 끊겨 끝없이 바라보노니 / 崖崩澗絶望不極
한 쪽 성긴 비에 돌아가는 구름이 검다 / 一邊疏雨歸雲黑
돌아가는 구름 끊어진 곳에 누대 있는데 / 歸雲斷處有樓臺
붉은 해 곁에서 부는 옥퉁소 그 소리가 사무치네 / 吹徹玉簫紅日側
그대는 청련거사 적선옹주D-001을 보지 못하였는가 / 君不見靑蓮居士謫仙翁
한 마리 학이 어찌 여러 닭들과 어울리랴 / 一鶴肯與群鷄同
여러 방백들이 초청해도 머리도 끄덕이지 않았고 / 列岳結軌不點頭
세상 밖에서 홀로 동계공주D-002을 짝하였네 / 物外獨伴東溪公
   


[주 D-001] 청련거사 적선옹 : 이백(李白)은 촉(蜀)나라의 청련산(靑蓮山) 아래 살았으며, 장안(長安)에 왔을 때 하지장(賀知章)이 그를 만나, “자네는 천상(天上)에서 잠깐 인간(人間)에 귀양살이로 온 신선이다.” 하였다.
[주 D-002] 동계공 : 이백의, “동계공(東谿公)의 유거(幽居)에 제(題) 한다.”는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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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간(洪侃)
?∼1304(충렬왕 30).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자운(子雲) 또는 운부(雲夫), 호는 홍애(洪崖). 본관은 풍산(豊山). 지경(之慶)의 아들이다.
1266년(원종 7)에 민지(閔漬)가 장원하였던 과방(科榜)에 함께 등제하였다. 벼슬이 비서윤(#비58書尹)을 거쳐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지제고(知製誥)에 이르렀다. 뒤에 원주의 주관(州官)으로 나갔다가, 언사(言事) 때문에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시문에 능하였고, 시체가 청려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제현(李齊賢)은 《역옹패설 #역10翁稗說》에서 “그가 시 한 편을 지어 낼 때마다 어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그 시를 좋아하여 서로 전해가며 외웠다.”고 하였다. 그의 시가 뛰어나서 당시에 널리 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허균(許筠)도 《성수시화 惺#수04詩話》에서 그의 시가 “아름다우면서도 맑고 곱다.”고 평하였고, 홍만종(洪萬宗)도 《소화시평 小華詩評》에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허균이 뽑아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집을 밤새워 읽고 “이인로(李仁老)와 홍간의 시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특히, 당시에는 모두 송나라 시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시를 배운 것이 높이 평가되는데, 허균은 “〈나부인 懶婦引〉·〈고안행 孤雁行〉 등의 작품이 매우 뛰어난데, 성당의 작품과 같다.”고 하였으며, 홍만종은 “당조(唐調)를 깊이 얻어 송나라 사람의 기습(氣習)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저서에 12대손 홍방(洪滂)이 여러 시선집에 전하는 것을 모아 편찬한 《홍애집》이 있다.
 
김순(金恂){5}
1258(고종 45)∼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歸厚). 방경(方慶)의 넷째아들이다.
1279년(충렬왕 5)에 과거에 급제하여 낭장(郎將)으로 학사(學士)·직강(直講)이 되었다. 아버지 방경이 일본을 정벌할 때 종군하고자 했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배에 올라 종군하고 돌아와서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
1297년 좌부승지, 이듬해 좌승지에 오르고 광정부사(光政副使)·승지(承旨)·성균좨주(成均祭酒)·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지민조사(知民曹事)를 역임했으며, 다시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사직했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등용되어 1312년(충선왕 4)에 중대광(重大匡)·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1316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성격이 관후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으며, 거문고와 퉁소를 즐겼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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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영 - 문영공께서 소장하셨던 산수도 그림 연상하면서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시와 글 속에서 나마 선조님과 그림을 상상해 보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 . . .
▣ 김항용 - 이런 귀한 자료를.. 그림을 상상해 봅니다.
▣ 김윤식 -
▣ 김주회 -
▣ 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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