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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김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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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3-12-29 08:39 조회1,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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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金瓚) (디지털 한국학 자료)
1543(중종 38)∼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아버지는 형조참의 언침(彦沈)이다.
1567년(명종 22)에 진사가 되고, 156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이 되고, 이후 대교·봉교·전적·형조정랑·검상·사인·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집의·정언·헌납·사간·수찬·교리·응교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73년 평안 삼도사로 나가 군적(軍籍)을 정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평안도 순무어사로 활약하였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직제학·승지·좌참찬·동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대사성·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임금 일행이 개경에 이르자 동인(東人) 이산해(李山海)의 실책을 탄핵하여 영의정에서 파직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김공량(金公諒)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뒤에 정철(鄭澈)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또, 일본과 강화회담을 벌일 때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예조판서·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를 연이어 지냈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참찬까지 승진하였다. 대사헌 때 가족을 멀리 피난시켰다고 탄핵을 받고 체직되는 등 소소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지만,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이 능숙한 명신이었다.
임진왜란 뒤 전쟁의 수습과정에서 죽자, 선조는 조회를 정지하여 추모의 뜻을 표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 김태서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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