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부서 일식 화림촌 11---녹전면 신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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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3-12-29 17:30 조회2,072회 댓글0건본문
녹전면 소재지로 현재 녹전면사무소, 녹전우체국, 녹전농협, 녹전초등학교 등 각 기관이 들어서 있는 신평리 기록을 찾아보았습니다.
■ 경북마을지 하권
p.406
녹전면 1. 新坪里
녹전면의 중심부에서 북동쪽에 위치하는 동리이다. 동리의 가운데에 ▲요성산(490미터)이 솟아 그 줄기의 산간에 흐르는 ▲驛溪川 가의 좁은 들에 산재한 촌락과 과수원과 경지로 이루어진 동리이다.
북은 葛峴里이고, 동은 도산면의 雲谷里와 宜一里이며, 서는 沙川里와 竹松里이고, 남은 九松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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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리에서 가장 큰 마을은 새터마을이다. 본래는 벌판이었는데 1914년 서면과 북면을 합하여 녹전면이 되고 면사무소, 경찰관 주재소를 짓게 되니 새로 큰 마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새터=新基로 불리게 되고, 국민학교가 서게 되고, 5일장이 서게 되니 녹전장이고, 공민학교, 중학교, 우체국, 농협 등 행정상 교육상의 기관이 들어서서 면민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새터마을의 동쪽에 범바우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앞에 범 모양의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범바우에서 도산면 의일리 제비실로 넘어가는 고개는 배고개이고, 그 고개 밑에 있는 마을도 배고개=梨峴이라 부른다.
새터에서 도산면 온혜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孝岑재=잣고개=栢峴이라 부른다. 효잠재=잣고개=백현의 서쪽 밑 마을도 효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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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잠재 서쪽 밑에 있는 마을은 효잠마을=효잠리이다. 효잠 북쪽에 있는 마을은 둔벌,듬벌,遁村里라 부른다.
고려말 충렬왕때에 金椿이란 분은 벼슬이 추밀원부사이었다. 30년간의 몽고에의 항쟁도 無爲하여 임금은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원나라의 심한 간섭을 탐탁치 않게 여긴 김춘은 이 둔촌마을에 숨어 살게 되었다. 그 자손이 학문하고 벼슬을 하게 되니 이 어른이 숨어 살던 마을이라고 둔촌=둠벌=듬벌로 알려졌다.
둠벌 안쪽의 마을을 三臺=三垈=안듬벌=內遁이라 부른다. 이 마을에 세거하는 ★의성김씨의 일문은 30대에 걸쳐 높은 벼슬이나 큰 부자는 나지 않았으나 학문이나 孫勢나 재산에서 군색이 없이 지냈다 해서, 三垈에는 명당터가 있다고 했다. 다르게는 마을이 세 層臺로 되었다 하여 三垈라는 말도 있다. 또 다르게는 어진 분이 많이 나왔다고 仁坪이란 이름도 있다.
삼대에서 북동쪽에 있는 마을은 두룻골=周谷이다. 삼대에서 새터장=녹전장으로 넘어가는 장고개라 한다.
듬벌 바깥쪽에 있는 마을은 外遁, 또는 文坪이라 부르는데 文筆한 분이 많이 나왔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문평 북쪽에 아늑한 골짜기가 아늣골=安興里이다.
새터 북쪽에 있는 마을은 聖泉이란 이름이다. ★聖泉寺가 있었다. 그 자리를 성천사터라 부른다. 샘물이 물맛이 좋고 불공을 드릴 때 이 물로 신령에게 드리는 노구솥에 지은 젯밥인 노구매를 올리면 영험이 있다고 이 샘을 성천이라 부른다. 성천에서 아늑골로 넘어가는 큰 재를 덧재라 한다.
★퇴계는 신평리와 사천리의 경계에 있는 요성산(490미터) 밑의 聖泉寺에서 학문을 살필 때 요순같은 성인이 되기를 힘썼다. 그래서 이 산이 요성산이고, 그 절은 성천사이며 퇴계가 마시던 샘물이라 하여 성천이란 이름이 주어졌다는 설도 있다. 요성산에서는 지금도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낸다.
새터 서북쪽에 있는 고개에는 커다란 방구방위가 있다고 방우재=方下峴이라 부르며, 이 고개 밑에 있는 마을도 방우재=方新洞=方下里라 부른다.
방우재 남쪽에 있는 골짜기는 각골이 있고, 그 뒷산은 각골산이다. 방우재 남쪽에 있는 또 하나의 골짜기는 각골이 있고, 그 뒷산은 각골산이다. 방우재 남쪽에 있는 또 하나의 골짜기는 소릿골이다. 소릿골 뒤에 있는 소릿골재라 한다.
녹전면의 행정상 생활상의 중심되는 동리이며, 유서깊은 골짜기가 많은 동리이다.
총 가구수 238가구-----안동김씨 18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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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잠 북쪽에 있는 마을은 둔벌,듬벌,遁村里라 부르는데
고려말 충렬왕때에 金椿이란 분은 벼슬이 추밀원부사이었고, 1269년 개경환도후, 김춘은 이 둔촌마을에 숨어 살게 되었다도 합니다.
충렬공께서는 1268년 (원종9, 57세) ★전분의 무고로 남경(한양)으로 좌천되었다가 3일만에 다시 서북면병마사가 되었고, 그후 중앙 정부에 들어와서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로 되었습니다.
따라서 김춘이라는 분은 충렬공과 동향으로서 비슷한 시기에 추밀원부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솔내영환 -
▣ 김항용 -
▣ 김태서 -
▣ 김태영 - 녹전면에 유서깊은 골짜기 안동김의 후예가 18가구라.. 연구의 대상이 되는 마을 아닌지요?
▣ 김윤만 - 잘 읽어 보고 있습니다.
▣ 김윤식 - 그렇네요. 녹전면에 살고 계신 일가분들이 언제부터 세거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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