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직계조 기록(구로구청 홈페이지)

페이지 정보

김태서 작성일04-01-07 07:35 조회1,733회 댓글0건

본문

김방경 [ 金方慶 , 1212~1300 ]

고려시대의 명장.
본관 : 안동
별칭 : 자 본연, 시호 충렬

본관 안동(安東). 자 본연(本然). 시호 충렬(忠烈).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며, 음보(蔭補)로 16세에 산원(散員)이 되어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1248년(고종 35)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골의 침입으로 주민들과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농토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다. 1263년(원종 4) 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에 승진되고 후에 상장군(上將軍)으로 있다가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었으나 곧 서북면병마사가 되었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1269년(원종 10)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元宗)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우자 원나라 세조(世祖)가 보낸 맹격도(孟格圖)의 2,000명의 군사와 협력하여 임연을 치려고 동경(東京)에 이르렀으나 왕이 복위된 것을 알고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갔다. 1270년(원종 11) 장군 배중손(裵仲孫) 등이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일으켜 진도(珍島)로 들어가 연안을 침범하자, 이듬해 몽골의 장군 흔도(都) ·홍다구(洪茶丘) 등과 함께 진도를 함락시키고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耽羅)에 들어가서 항전하자 1273년(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흔도 ·홍다구와 함께 또다시 삼별초를 쳐서 완전히 평정하였다. 1274년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합포(合浦:馬山)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두고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정하여 2만 5000여 명의 여 ·원연합군(麗元聯合軍)과 함께 쓰시마섬[對馬島]을 공략하고 일본 본토로 향하던 도중 규슈[九州]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1281년(충렬왕 7) 원나라가 다시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 도원수로서 종군하여 이키섬[壹岐島]을 공략하고 하카타[博多]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번에도 태풍과 전염병으로 실패하고 돌아와 벼슬을 사양하고,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에 삼중대광 ·첨의중찬 ·전리사판사 ·세자사로서 물러나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다. 충직하고 근검하였으나 부하 장병들의 민폐를 막지 못하고 일본 정벌 후의 불공평한 논공행상 등으로 상하 민심을 잃어, 89세로 병사하였을 때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고 고향 안동(安東)에서 장례를 지냈다. 충선왕(忠宣王) 때 다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추증되었다.

김순 [ 金恂 , 1258~1321 ]

고려 시대의 문신.
본관 : 안동
별칭 : 자 귀후(歸厚)시호 문영(文英) 중대광상락군(重大匡上洛君)

본관 안동. 자 귀후(歸厚). 시호 문영(文英). 방경(方慶)의 넷째아들. 1279년(충렬왕 5) 문과에 급제하여 낭장(郞將) ·학사(學士) ·직강(直講)에 이르렀다. 원나라의 일본 정벌 때 종군하고 돌아와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 1297년 좌부승지(左副承旨), 이듬해 좌승지에 올랐다.
충선왕 때 광정부사 ·승지 ·성균좨주(光政副使承旨成均祭酒), 우승지 ·성균좨주 ·보문각학사 ·지민조사(右承旨成均祭酒寶文閣學士知民曹事)가 되었다. 이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사퇴하였다. 1312년(충선왕 4) 중대광상락군(重大匡上洛君)에 봉해지고, 1316년(충숙왕 3) 삼사판사가 되었다. 성격이 관후하고 예서를 잘 썼으며, 거문고 ·퉁소를 즐겼다.

김영후 [ 金永煦 , 1292~1361 ]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 : 안동(安東)
호 : 균헌(筠軒)
별칭 : 시호 정간(貞簡)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상락후(上洛侯)
주요수상 :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城保節同德翊贊功臣)
 
본관 안동(安東). 호 균헌(筠軒). 시호 정간(貞簡). 내외직을 역임하고 충숙왕(忠肅王) 때 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었으며, 1341년 사신으로 원나라를 다녀왔다. 앞서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모반에 따르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1342년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城保節同德翊贊功臣)으로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충혜왕이 원나라로 잡혀갈 때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단독으로 목숨을 걸고 왕을 호위하였고, 이듬해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이어 제조정방(提調政房) ·좌정승(左政丞) ·우정승을 역임하고, 1352년(공민왕 1)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변정도감(辨整都監)의 폐지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356년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 순제(順帝)를 만나고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김사형 [ 金士衡 , 1333~1407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 안동
호 : 낙포
별칭 : 자 평보,시호 익원 ·상락백
 
본관 안동. 자 평보(平甫). 호 낙포(洛圃). 시호 익원(翼元). 음보(蔭補)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7년(우왕 3) 집의(執義) ·개성부윤이 되었으며,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 1390년(공양왕 2) 밀직지사(密直知使)로 대사헌을 겸하다가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로 특진하였고, 뒤에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92년 여러 장상(將相)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였다.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으며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이어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상락백(上洛伯)으로 봉해졌다. 1399년(정종 1) 등극사(登極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하부판사(門下府判事)가 되고, 1401년(태종 1) 좌정승(左政丞), 이듬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공직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하면서 한 번도 탄핵받은 일이 없다.


김질 [ 1422~1478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 안동
호 : 쌍곡
별칭 : 자 가안,시호 문정 ·상락군
 
본관 안동. 자 가안(可安). 호 쌍곡(雙谷). 시호 문정(文靖). 개국공신 사형(士衡)의 증손자. 음보로 충의위(忠義衛)에 속하여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원, 허락받았다. 성균관에서 참상관의 수학제도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 추장문과에 정과로 급제, 주부에 제수된 뒤 사간원우정 ·병조좌랑을 지냈다. 그 무렵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문종의 사랑을 받았다.
1455년(세조 1) 성균관사예(司藝)가 되고, 다음해 성삼문 등과 단종복위의 거사를 꾀하였다. 여러 번 기회를 놓치고 위험을 느끼게 되자, 동지들을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변하여, 이른바 사육신사건을 일으켰다. 그 공로로 군기감판사(軍器監判事)가 되고, 이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 상락군(上洛君)으로 봉하여졌다. 평안도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右參贊) ·경상도관찰사 등을 거쳐, 1468년 우의정, 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그때 영의정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 원상세력과 함께 나이 어린 예종과 성종 초기에 국정서무를 주관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큰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제거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74년 우의정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세조의 공신으로 특히 세조의 병제개편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김성동 [ 金誠童 , 1452~1495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 안동
별칭 : 자 명보
 
본관 안동. 자 명보(明甫).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적성현령(赤城縣令)으로 있던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부평부사(富平府使)로 나가, 2년이 못 되어 선정과 치적이 조정에 알려져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5년도 채 못 되는 관직생활에도 공무에 대한 성실성과 뛰어난 인품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재상감이라는 기대를 모았으나 일찍 죽었다. 박처륜(朴處綸)과 함께 성종대의 가장 유능하고 성실한 관리로 꼽혔다.
 

 




▣ 김윤식 - 구로구청 홈페이지에 실렸다니 연유가 궁금합니다. 태서 아저씨 잘 보았습니다.
▣ 김계응 -
▣ 김항용 -
▣ 김윤만 - <구로구지>에도 없는 내용입니다.
▣ 김태영 -
▣ 솔내영환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