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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학용어-16 (비석,묘비,묘갈,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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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1-11-22 18:05 조회2,0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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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학용어-16 (비석,묘비,묘갈,묘표)





⊙ 비석 碑石

고인(故人)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



⊙ 묘비 墓碑

무덤의 상석(床石) 우측에 세우는 비.



⊙ 묘갈 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



⊙ 묘표 墓表

죽은 사람의 벼슬명 ·이름 ·생몰연월일 ·행적 ·묘주(墓主) 등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거나 평편히 놓는 푯돌.



⊙ 묘지 墓誌

죽은 사람의 성명 ·관계(官階) ·경력 ·사적 ·생몰연월일, 자손의 성명, 묘지의 주소 등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도판(陶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



⊙ 신도비 神道碑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









▣ 비석 碑石

고인(故人)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



비(碑)·빗돌·석비(石碑) 등 여러 말이 있으며, 거기에 새겨 넣은 글은 금석문(金石文)이라 하여 귀중한 사료(史料)가 된다.



비석의 시초는 옛날 중국에서 묘문(廟門) 안에 세워 제례(祭禮) 때 희생으로 바칠 동물을 매어 두던 돌말뚝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또 장례식 때 귀인(貴人)의 관을 매달아 광내(壙內)에 공손히 내려 놓기 위하여 묘광(墓壙) 사방에 세우던 돌을 말하기도 한다.



그 돌을 다듬고 비면(碑面)에 공덕을 기입하여 묘소에 세우게 된 것은 훨씬 후세의 일이며, 당시는 비석이라 하지 않고 각석(刻石)이라 하다가 이것을 비석으로 부르게 된 것은 전한(前漢) 말기나 후한 초의 일이다.



진대(秦代) 이전의 각석으로는 우(禹)나라가 치수공사(治水工事) 때 세웠다고 하는 구루비(뻗쬐碑:河南省 衡山),주(周)나라 목왕(穆王)이 "길일계사(吉日癸巳)"의 4자를 새긴 단산각석(壇山刻石) 등이 있으나 진위(眞僞)는 확실치 않다.



진나라 때는 시황(始皇)이 세운 추역산(鄒忌山)·태산(泰山)의 각석 등이있고, 한(漢)나라 이후에는 유서(儒書)나 불경(佛經)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도 유행하였다.



한국은 비석이 언제부터 세워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고구려 때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창녕(昌寧)의 척경비(拓境碑), 백두산 정계비(定界碑) 등은 역사상 자랑할 만한 비석이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는 많은 비석이 세워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비석이 성행하여 그 유품의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비석의 종류로는 묘비(墓碑)를 비롯하여 능비(陵碑)·신도비(神道碑)·기적비(紀蹟碑)·기념비·순수비·정려비(旌閭碑)·송덕비(頌德碑)·애민비(愛民碑)·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유허(遺墟)·성곽(城廓)·대단(臺壇)·서원(書院)·묘정(廟庭)·빙고(氷庫)·교량·제지(堤池) 등에 세우는 기적비가 있다.



비석은 대개 비신(碑身)과 이수(촬首)·귀부(龜趺)로 되어 있으나 요즈음 서민층의 묘소에는 이수와 귀부 없이 비신만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또 자연석의 일면을 갈아서 글을 새기고 위를 둥글게 한 것을 갈(碣)이라고 한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묘비 墓碑

무덤의 상석(床石) 우측에 세우는 비.



아래에 농대(籠臺) 또는 반석(盤石), 그 위에 비신(碑身), 맨 위에 가첨석(加墅石)을 얹고, 특별한 경우에는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 얹고 이수(촬首)를 얹는다.



비신에는 사자(死者)의 관직 ·본관 ·성명 ·행적 ·자손, 생몰연월일, 장지 등을 기록한다. 요즈음은 가첨석이 없고 본관 ·성명, 생몰연월일, 자손의 이름만 기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묘갈 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



묘갈은 죽은 사람의 성명 ·세계(世系) ·행적, 출생 ·사망 ·장례의 연월일, 자손의 개황 등을 돌에 새겨서 무덤의 표지로 삼고, 죽은 사람의 사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세운다.



《문체명변(文體明辯)》의 묘갈문에 보면, “반니(潘尼)가 반황문(潘黃門)의 묘갈문을 지었으니, 묘갈문을 만드는 것은 진(晉)나라에서 비롯되었다.



당(唐)나라의 묘갈 제도는 받침돌은 모나고, 머리 부분은 둥글며, 5품(品) 이하의 벼슬아치에만 세웠다. 옛날에는 갈(碣)과 비(碑)가 통용되었고, 후세에 벼슬 등급으로써 명칭이 구별되었으나 실지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한국에도 묘갈 ·묘비 등의 명칭이 있는데, 문체는 비슷하여 명확한 구별이 없다. 다만 형태에서 묘비는 직사각형이고 묘갈에 비해서 규모가 크다. 특히 신도비(神道碑)는 거북받침 위에 직사각형의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비갓을 올려 놓았으며, 종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만 세울 수 있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묘표 墓表

죽은 사람의 벼슬명 ·이름 ·생몰연월일 ·행적 ·묘주(墓主) 등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거나 평편히 놓는 푯돌.



표석(表石)이라고도 한다. 돌비석을 세우면 묘비(墓碑) ·묘석(墓石)이라고 한다.



자연석 또는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는데, 그리스의 묘표는 대리석에 죽은 사람의 모습을 양각했다. 중국에서 묘 옆에 고인의 사적을 적은 비를 세운 것은 한대(漢代)에 시작된 일이며 묘탑을 사용한 것은 당(唐)나라 이후의 일이다.



한국도 중국의 묘제(墓祭)에 연유하여 예로부터 묘표를 세우는 풍습이 보편화되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우리 가문 선조의 묘비, 묘갈, 묘표, 묘지, 신도비 등에 관해서는 다음에 정리해서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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