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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민사평. 김륜, 민적, 김흔에 대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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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1-11-22 18:36 조회2,3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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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wrote:

그많은 자료 감사합니다.



약간의 오류가 있어 정정했으면 합니다.



원문





: 262 김륜처 최씨 묘지명 531

: 263 김륜 묘지명 533 ★민사평의 외조부



수정



262 김륜처 최씨 묘지명 531=민사평(김구용의 외조부)의 장모(처모)

263 김륜 묘지명 533 =민사평의 장인(처부)



*민사평의 외조부는 충렬공의 공작을 습봉하신 흔(흔)할아버님이십니다.

흔 선조께서는 1남2녀를 두시었으나 아들은 딸만두어 무후했고.큰 딸은 여흥민씨 민적에게, 작은

딸은 평양조씨 조련에게 출가하였습니다. 계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흔-子판관공 승고-子는 무후.

- -- 女(영가군부인)+민적=민사평+언양김씨(김륜의 따님)=무남독녀(여흥군부인)+김묘=김구용.김구덕..

---女;조련(평양인)





문온공파에서는 외조이신 급암 민사평공의 세향을 문온공 세향때 같이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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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평(閔思平)

1295(충렬왕 21)∼1359(공민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庵). 찬성사 적(#적42)의 아들이며, 정승 김륜(金倫)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능과 도량이 있었다.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산원·별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예문춘추관수찬(藝文春秋館修撰)을 거쳐 예문응교(藝文應敎)·성균대사성이 되고, 1344년(충혜왕 5)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한 뒤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던 공으로 충정왕이 즉위한 1348년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가 되었으며, 그뒤 수성병의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의 호가 주어졌고, 찬성사상의회의도감사(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아하며 친인(親姻)과 화목하고 교유를 잘 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도 일을 처리하는 데 모나지 않았다.

시서를 즐기고 학문에 열중하여 당시 이제현(李齊賢)·정자후(鄭子厚) 등과 함께 문명(文名)이 높았다. 《동문선 東文選》에 그의 시 9수가 전한다.

저서로는 외손인 김구용이 편찬한《급암집》이 있는데 초간본은 보물 70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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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적(閔#적42)



민적(閔#적42)

1269(원종 10)∼1335(충숙왕 복위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낙전(樂全).

찬성사 종유(宗儒)의 아들이며, 이모부인 재상 김군(金#군15)의 집에 양육되었다.

풍채가 수려하였으며, 10세에 절에 나아가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글을 배우면 곧 그 뜻을 통하였다고 한다. 충렬왕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서 국선(國仙)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동궁(東宮)의 요속(僚屬)이 되고, 첨의주서(僉議注書), 비서랑(#비58書郎)을 거쳐 군부정랑(軍簿正郎)에 이르렀고, 판도정랑(版圖正郎)에 이르러 세자궁문랑(世子宮門郎)을 겸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비서소윤(#비58書小尹)이 되었으나, 이후 충렬왕이 복위하자 면직되어 충선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4년간 머물렀다가 돌아와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1308년 다시 충선왕이 복위하자 전의부령(典儀副令)이 되고, 이어 선부의랑지제교(選部議郎知製敎)가 되었다가 밀직승지 겸 사헌집의로 승진하였다. 이어 평양윤(平壤尹)이 되었으나 얼마 뒤 파직되고, 4년간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나 녹봉은 전과 같이 받았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선부전서 보문각제학(選部典書寶文閣提學)을 제수받았고, 다음해 밀직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대사헌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온 뒤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충혜왕 때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密直司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를 제수받았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김륜(金倫)



김륜(金倫)

1277(충렬왕 3)∼1348(충목왕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무기(無己), 호는 죽헌(竹軒). 아버지는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 변(#변17)이다.

1290년(충렬왕 16)에 원나라의 반적(叛賊) 합단(哈丹)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자 가족이 강화로 피난하였는데, 14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휘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음보(蔭補)로 노부판관(鹵簿判官)이 되었다가 신호위장군(神虎衛將軍)이 되었으며, 홍자번(洪子潘)의 천거로 변정도감부사(辨正都監副使)를 거쳐서, 감찰시승(監察侍丞)이 되어 소송사건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내신(內臣)을 강력하게 탄핵하다가 주관(州官)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때 궁실과 불사를 수리함에 있어서 사자(使者)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징발하였으나, 그가 다스리는 주(州)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여 주민(州民)들이 편안히 지내게 되었다. 일찍이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시종했고, 심왕 고(瀋王暠)를 고려왕으로 세우려는 무리들의 연판장에 서명을 거절하기도 하였다. 경상·전라도도순문사(慶尙全羅道都巡問使)가 되어 합포(合浦:馬山)에 진수하자 호령이 엄명하고 이민(吏民)을 편안하게 했으며, 뒤에 첨의평리(僉議評理)·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曺#적42)의 난에 연루된 죄인을 다스림에 있어서 “그들은 조적에게 속았을 따름이니, 어찌 족히 책하리오.”라 하고 고문을 하지 않고 관용으로 다스려 죄인들이 감복하여 죄상을 숨김없이 자백하게 하였다.

한편, 원나라의 승상 빠이옌(伯顔)이 반역자인 조적을 두둔하여 충혜왕을 소환하자, 왕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간명하게 사리를 밝혀 왕에 대한 의혹을 풀게 하였으며, 그때 나이 육십을 지났으므로 원나라의 관리들로부터 백수재상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에 추성찬리공신 언양군(推誠贊理功臣彦陽君)에 봉해졌으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도 관작과 토지·노비가 하사되었다.

1343년에 충혜왕이 정동성(征東省)에서 원나라의 사신 고용보(高龍普)·타치(朶赤) 등에게 변을 당하고 다시 원에 잡혀가자 왕을 구출하려고 이제현(李齊賢)으로 하여금 원나라에 보내는 상소장을 쓰게 하였으나, 대신들이 원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여 서명을 하지 않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사실을 분하게 여겼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찬성사로 승진되고 뒤에 좌정승에 올랐다.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부원군에 봉해지고 공신의 호에 보리(補理)가 더 가해졌다.

1348년에 강윤충(康允忠)의 죄상을 들어 탄핵하였으며, 그해 충혜왕의 시호를 청하러 원나라에 가려고 하다가 풍질을 얻어 죽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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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학용어-15 墓誌銘(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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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요즈음 탁본과 금석문을 연구하다 보니까 墓誌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墓誌는 상례를 치르면서 바로 만들어 묘에 묻게 됨에 따라 역사서 보다도 더 정확하고 사실적인 기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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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례로 고려사의 경우 918년부터 1392년까지의 史料를 수백년이 지나서 1400년대 조선조 세조때 정인지 등이 정리하게 되고 또한 편찬 당시의 정권에 유리하게 정리하게 됨에 따라 왜곡될 수 있으나, 묘지명의 경우 그때 그때 만들게 됨으로 정확하고 사실적인 기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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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자료총서 10

: 고려묘지명집성

: 김용선 편저

: 1993

: 한림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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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를 찾아 보니 우리 가문 선조의 묘지명이 상당수 있어 소개합니다. 앞으로 번역해서 책자화하면 많은 참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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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책자의 전거 자료로는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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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금석서 낭선군 이오 편 1667, 한국금석문전서 아세아문화사 서울 1976 영인본

: ★해동금석원 2책 유희해 유승간 편 1922, 한국금석문전서

: ★조선금석총람 2책 조선총독부 편 1922, 한국금석문전서

: ★한국금석문추보 이난영 편 1963, 한국금석문전서

: ★한국금석유문 황수영 편 일지사 서울 1976

: ★한국금석전문 3책 허흥식 편 아세아문화사 서울 1984

: ★고려명현집 5책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 서울 1980 복간본

: ★동문선 4책 학동총서4,5 학습원 동양문화연구소 일본동경 1970

: ★잡동산이 한국학고사논총소 아세아문화사 서울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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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가문 선조관련 묘지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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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은열 묘지명 13

: ○전거 경주김씨족보(경기 고양 1985)

: ○연대 광종19년(무진 968추정)

: ○참고

: -경주김씨세적보 (함흥경주김씨파보소 1925

: -김연옥 고려시대 경주김씨의 가계 (숙대사론 11,12합 1982)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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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 ★김방경 묘지명 406

: ○전거 안동김씨대동보(서울 1979)

: ○연대 충렬왕26년(원 대덕4년 1300)

: 고려국상락공지묘지(제액)

: 대덕4년경자9월 일

: 이진(익재 이제현의 부친) 찬

: ○참고 고려사 104 김방경전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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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7 ★김순 묘지명 439

: ○전거 안동김씨대동보 (서울 1979)

: 중대광판삼사사보문각대제학상호군 김순 묘지명 병서

: 대원지치원년신유10월14일

: 민지 찬

: ○참고

: -고려사 104 김방경전 부김순전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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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8 ★김승용 묘지명 464

: ○ 소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No. 본 7886)

: ○ 연대 충숙왕16년 (원 천력2년 1329)

: 천력2년을사세삼월감술 선수선무장군관고려군만호광정대부밀직사보문각대제학상호군 김공봉표조원하

: 李 叔琪 술

: ○게재

: -한국금석문추보 222-223

: -한국금석전문 중세하 236-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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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4 ★김순처 허씨 묘지명 480

: ○전거 익재난고7

: ○연대 충숙왕복위년 (원 지순3년 1332)

: 김문영공부인허씨묘지명 병서

: ○게재

: -동문선124 김문영공부인허씨묘지명병서

: -조선금석총람 상 부록 608-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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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5 ★김영돈 묘지명 538

: ○전거 안동김씨대동보(서울, 1980)

: ○연대 충목왕4년 (원 지정8년 1348)

: 유고려국추충병의익찬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상락부원군김공묘지명 병서

: 지정8년 8월 일

: 안진(충렬공 김방경 행장 찬) 찬

: ○참고

: -고려사 104 김방경전 부 김영旽전

: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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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7 ★김묘처 민씨 묘지명 598

: ○전거 목은문집 19

: ○연대 우왕5년(1379)

: 여흥군부인민씨묘지명

: ○게재

: -동문선128 여흥군부인민씨묘지명

: -조선금석총람 상 부록 706-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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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 금의 묘지명 359 ★김효인의 스승

: 188 이규보 묘지명 373 ★김창과 교유

: 190 ?설신 묘지명 381

: 198 원부 묘지명 398 ★김승용의 장인

: 200 허공 묘지명 403 ★김순의 장인

: 207 김훤 묘지명 417 ★동화사 홍진국사비 찬

: 220 민종유 묘지명 447 ★민사평의 조부

: 225 민지 묘지명 458 ★김순 묘지명 찬

: 229 안우기 묘지명 466 ★김사렴의 장인 안원숭의 조부

: 232 김태현 묘지명 472 ★김사렴의 장인 안원숭의 외조부

: 233 이제현처 권씨 묘지명 479

: 241 민적 묘지명 491 ★민사평의 부

: 244 민지처 신씨 묘지명 497

: 249 채홍철 묘지명 507 ★김방경의 사위

: 262 김륜처 최씨 묘지명 531

: 263 김륜 묘지명 533 ★민사평의 외조부

: 273 김태현처 왕씨 묘지명 558

: 274 민사평 묘지명 560 ★김구용의 외조부

: 277 한공의 묘지명 568 ★김사겸의 장인

: 282 민사평처 김씨 묘지명 581

: 284 이제현 묘지명 587 (김방경 묘지명 찬한 이진의 자) ★김순처 허씨 묘지명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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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지 墓誌

: 죽은 사람의 성명 ·관계(官階) ·경력 ·사적 ·생몰연월일, 자손의 성명, 묘지의 주소 등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도판(陶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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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지 墓誌

: 죽은 사람의 성명 ·관계(官階) ·경력 ·사적 ·생몰연월일, 자손의 성명, 묘지의 주소 등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도판(陶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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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지(壙誌)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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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묻는 이유는 오랜 풍우나 인위에 의한 변화를 막고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이며, 무덤 앞에 세워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 것은 묘비 ·묘표(墓表) ·신도비(神道碑)라고 한다. 묘지의 재료는 금속판 ·돌 ·벽돌 ·도판 등을 사용하는데, 널이나 유골함에 직접 새긴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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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으로 묘지의 역사는 매우 길어 죽음의 신(神) 오시리스에게 사자(死者)의 석방을 기원하는 주문에 사자의 성명 ·혈통 ·관직을 적은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書)》가 있으며, 고대 로마 ·그리스의 묘지는 묘비 형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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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는 후한(後漢) 시대부터 시작되어 육조(六朝) ·수(隋) ·당(唐)시대에 가장 성행하였고, 그 풍습은 요(遼) ·송(宋) ·원(元)나라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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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는 묘지의 풍습이 언제쯤 도입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성행하여 벼슬아치나 선비의 죽음에는 거의 묘지를 만들었다. 묘지 끝에는 묘지명(墓誌銘)이란 명문(銘文)을 써 넣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로, 흔히 산문체로 되어 있다. 묘지의 풍습은 일제가 강점하면서부터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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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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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석 誌石

: 죽은 사람의 이름·생일·죽은날 세덕(世德)·사적(事蹟)·자손 등을 각자(刻字)해서 무덤 앞에 묻는 판석(板石:陶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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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날 봉분(封墳)이 무너져서 분묘를 잃을까 염려해서 준비하여 두는 것으로, 연석(硯石)에 글을 새기거나 사기(沙器)로 굽는 번자(燔瓷), 석회를 반죽하여 네모지게 해서 각자하는 편회(片灰), 또는 사발에 먹으로 써서 석함(石函)·사기·목궤(木櫃) 등에 넣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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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되어 국보 제163호로 지정된 무령왕의 지석을 예로 들면 35.5cm×41.3cm×4cm 크기의 섬록암에 세로로 6행의 명문(銘文)을 음각(陰刻)하였다. 또한 그 뒷면에는 2.5cm의 간격을 두고 네모나게 구획선을 돌리고 그 선에 따라 간지(干支)와 8괘(卦)를 배합한 방위표(方位表)를 음각하였는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광릉에서 지석이 나온 것은 이것이 처음의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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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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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문온공파) 김명리 묘지호는 영환종친께서 본 홈페이지에 자세히 소개하여 주셨습니다. 일별하시길 권합니다. (문온공파) 김확 묘지명 12장은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에서 [멀티미디어 자료실]에서 검색어 "김확"으로 확인하실 수 있는데, 이는 영환 종친께서 최근에 게재하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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