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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지사족과 지역사회(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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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4-01-14 21:39 조회1,4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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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지사족과 지역사회
재지사족(在地士族)이라 하면 지방에 정착하고 있는 사대부 족속을 지칭하는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각 지방에는 유학적 소양을 지닌 독서층이 고려후기 이래 존재하고 있었으며 특히 영남지역 그 가운데서도 안동을 비롯한 지역에 많았다. 영남지방은 역사적으로 신라와 가야문화의 발원지인 동시에 유교문화와 사림파의 정신적 고향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고려 전기이래 경주 최씨(慶州崔氏)와 경주 김씨(慶州金氏)의 문신들이 중앙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무신(武臣)집권 이후 중앙에서 낙향하는 문신들이 이 곳에 많았다. 따라서 영남지방은 일찍부터 문풍이 진작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고 있었으며 고려 중기에 김부식 가문을 중심으로 안동 지방에서는 박적(朴適)과 장수(張脩)그리고 용궁지방의 김존중(金存中) 등 영남 북부지역 출신 문사들이 중앙에서 크게 활약하였는데 이들 가운데는 재경관인(在京官人)과는 달리 정치적 변동기에 낙향하여 재지사족으로서의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위에서도 엿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재지사족의 성향은 지방에서 유학공부를 한 후 과거에 급제하는 등의 방법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벼슬살이를 하다가 정치적 혼란기를 당하여 정계에 환멸을 느끼거나 기타의 이유로 자기 출신 지방으로 낙향하는 부류도 있고, 또 하나는 유학 공부를 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그대로 자기 고장에 안착하고 있는 처사형 인사도 많았다. 여하튼 이들 재지사족들은 해당지방의 영향력 있는 유력자들로서 경제·문화·행정 등 전반에 걸쳐 상당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특히 이들 사족들이 지역사회의 교육과 풍속, 교화 등 문화활동에 보다 관심을 보임으로써 그 지방의 문풍(文風)은 크게 진작될 수 있었으니, {동문선}에 등재되어 있는 시문 가운데 성리학이 전래하기 이전의 것을 가려 그 작자를 출신지역별로 분류하여 보면 영남지역 출신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마도 이들 재지사족들이 영남지방에 많았고 그들이 향촌에서 활발하게 문풍을 일으킨 결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나아가 당시 안동부의 관할 아래에 있는 순흥출신의 안향(安珦)이 성리학 도입에 앞장설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리학이 전래한 이후에도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 북부지역에서는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기반이 성숙되어 있었기에 다른 지방보다 더욱 성리학이 발전해 나갔으며 그 터전에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같은 큰 성리학자가 배출되어 영남 사림파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1) 재지사족과 안동지역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안동지역에는 유학이 일찍부터 자리잡을 수 있는 터전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선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사회·경제 등 제반 분위기가 안정되어야 하는데 안동지방 일대는 지형적 조건부터 안정되고 있었다.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전통사회에 있어서 전란의 피해가 적은 지방은 주민들이 일단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데, 고려시대의 안동편에서 이미 고찰한 것처럼 안동지방의 지형 조건은 안정에 매우 유리하여 흔히 천년병화불입지지(千年兵禍不入之地)로 불리우고 있다. 즉 서북쪽에는 죽령과 조령 등의 험준한 소백산맥이 가리어 있고, 동쪽에는 태백산맥이 달리고 있으며, 남으로는 낙동강이 가로질러 천혜의 요새지를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이 일대의 지방은 정치·사회적으로 비교적 안정되어 있으므로 독서와 학문연구에 유리한 자연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셈이다. 즉 외적 침입의 우려가 적기 때문에 그 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우선 정서적으로 편안한 상태에서 공부할 수 있으므로 학습효과가 증대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안동지역이 그런대로 경제적 측면에서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는 고장이다. 우리들이 흔히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경제 상태가 너무 궁핍하면 이것도 학문하는데 지장을 초래한다. 그러나 안동일대의 지방에는 낙동강의 본류와 지류가 여러 곳에 흐르고 있어서 그렇게 넓은 평야는 없지만 각 골짜기마다 계곡평야가 전개되어 있고 수리(水利)에도 뛰어나 가난은 면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안동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앞부분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 풍속이 전국에서도 이름난 근검절약 정신을 가진데다가 농업상 물을 끌어 쓸 수 있는 조건이 유리하여 경제적으로 중소지주층에 비교적 무난히 진입할 수 있기 때문에 여유를 갖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조건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안동지방은 일찍부터 유학(儒學)에 대한 관심이 높아 골짜기에 산재하고 있는 마을마다 글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 결과 독서하는 자들을 우대하는 기풍이 생겨났으며, 이들 독서를 주도하는 사대부들은 자기 생활 근거지에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으므로 토착성(土着性)이 다른 지방보다 더 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후기부터 이 고장 출신의 한림학사 효인(孝印)의 아들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이 진출한 이래 권부(權溥, 1262∼1346) 등이 연달아 중앙으로 나아가 크게 활약하였으나 그들은 자기 고향과의 관계는 단절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지속하고 있었다.
특히 김방경은 벼슬이 수상(首相)에 해당되는 첨의부(僉議府)의 중찬(中贊)에 이르렀으나 고향 안동을 잊지 않고 계속 왕래하였음을 다음 자료에서 엿볼 수 있겠다.

그가 고향에 이르러 친구들과 며칠간 머물러 있었으나, 가을 농사일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때이므로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하여 드디어 돌아오고 말았다.

는 것으로서 자기 고향과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음을 밝혀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이 일대의 사족들은 고려후기 이래로 비록 고향을 떠나 중앙으로 벼슬을 하면서도 자기출신 지역과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정치적 변동이 잦은 조선시대에 이르면 더욱 심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즉 명분(名分)과 의리(義理)를 중요시하는 성리학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널리 보급되면서 이 지역의 재지사족 가운데는 그러한 명분에 합당하다면 나아가 벼슬하다가도 상황이 바뀌면 미련없이 귀향(歸鄕)하는 자들이 많았으므로 다른 지역보다 토착성이 강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분이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끌어간 퇴계 이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이 지방에서는 초야에 묻혀 벼슬하지 않고 독서와 학문을 하는 재지 유생들이 비굴해질 필요도 없으며 때로는 오히려 더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조선전기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재지사족들은 소학(小學)과 주자가례(家子家禮)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중시하여 이를 몸소 실천할 뿐 아니라 지역사회에 이것을 보급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터전 위에서 16세기에 이르러 이기(理氣)철학 가운데 주리론(主理論)을 강조하는 영남학파가 성립되었는데 이 학파의 중심인물은 물론 안동출신의 이황이었다. 그는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교육활동을 전개한 결과 그 문하에는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 같은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안동을 흔히 동방의 추로지향으로 부르고 있었다.
안동지방의 재지사족들이 대체로 벼슬보다는 향촌사회에 안주하면서 교화와 명분을 중시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16세기 이후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의 영향이 컸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즉 이황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위기(爲己)의 학문은 우리들이 마땅히 알 바를 도리로 삼고, 우리들이 마땅히 행할 바를 덕행으로 삼아서 먼 곳보다 가까운 곳을, 겉보다 속 공부로 시작하여 마음속으로 얻어 몸소 행하고자 하는 공부이고, 남을 위한다는 위인(爲人)의 학문은 마음속으로 얻어서 몸소 행하는 데 힘쓰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꾸미고 외면치례만 쫓으니 이름을 얻고 칭찬을 취하는 공부라고 비하하면서 위기지학이 군자의 학문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황 자신은 현실 정치무대에 나아가 벼슬살이하는데 필요한 위인지학은 거짓을 꾸미고 실속이 없으며 이름이나 얻고 칭찬만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사람들이 마땅히 알고 행하여야 할 도리를 연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숭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자연히 그를 벼슬길에 오래 머물게 할 수가 없었으므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기회만 닿으면 곧잘 사표를 던지고 안동 고향으로 내려왔던 것이며, 이런 그의 행동과 생각은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 이후의 안동지방 재지사족들은 이황의 이러한 사상과 행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향촌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에서 당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흔히 양반이라고 지칭하였다. 양반이란 말은 사대부(士大夫)란 말과도 통용되었고, 또 사족(士族)이라고도 했으니 사대부란 독서하는 선비와 전현직 관료를 일컫는다. 전현직 관료라 하더라도 선비에서 출발하였고 또 신분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문을 단위로 결정되는 까닭에 이들을 사족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지방에 정착해 있는 재지사족들은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향촌사회를 이끌어 가고자 했으므로 그들 사이의 유대관계는 필연적으로 요구되어 이를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했으니 향안(鄕案)의 작성도 그 중의 하나이다. 향안이란 명문사족들의 명부로 안동에서는 이것을 16세기부터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초반 안동의 향안에는 사족으로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인물, 즉 향리·서얼가문 그리고 군사·백성가와 결혼한 양반가문 등이 입록되기도 하였지만, 이후 몇 번에 걸친 심사과정을 통해 이들을 축출하고, 그 후손들의 참여를 엄격히 제한하여, 말하자면 청문사족만을 대상으로 한 향안을 작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당시에는 재지사족 집단이 상당히 배타성을 지녀 그들 계층의 이익유지와 확대에 관심을 가졌으나 점차 뒤로 오면서 신분제도 자체가 동요되면서 이같은 폐쇄적이고 경색된 분위기는 점차 변질되어 나갔으니 이것은 시대의 변화가 반영되어진 셈이다. 여하튼 안동지방은 다른 고장에 비하여 조선시대에 재지사족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도 이미 잠시 언급한 바 있듯이 지형조건이 내륙 분지라 외적의 침입이 적어 안정되어 있고, 낙동강 본류와 지류가 주변에 흘러 농업에 물을 이용하기 쉬워 경제적 안정도 이룩할 수 있는 까닭으로 인하여 학문이 발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자연히 과거 급제자가 많아 관료로 진출하는 사람도 증가하면서 이들이 중앙무대를 누비는 동안 그들과 결혼하는 다른 지방 관료층도 불어나게 되었다. 여기에 당시 재산상속제도로 외지사족과 그 후손들이 처향 혹은 외향의 인연으로 안동에 이주하는 자가 많아 이곳에 사족수는 늘어갔던 것이다.
지금부터 이들 안동의 재지사족들이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실록에 나타나고 있는 것 가운데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가려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이들은 성리학의 이념에 어긋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는 다른 지방의 재지사족과 더불어 공동으로 활동하여 시정하고자 했는데 아래의 사례를 보기로 하자.

경상도 안동(安東)에 사는 생원(生員) 권심행 등 2백여 명과 전라도 남원(南原)에 사는 생원 오몽량 등 2백명이 상소를 올려 보우를 죽이기를 청하였다.

는 것으로 당시 문정왕후의 보호를 받아 승과를 부활하는 등 불교 중흥에 노력하던 중 보우는 유학의 이념에 기본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유학으로 무장된 재지사족이 많은 안동지방의 유생 2백여명이 전라도 남원지방 유생들과 함께 왕인 명종에게 보우의 처형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왕은 보우가 이미 멀리 유배되었으므로 다시는 활동하지 않을 것이니 양도 감사에게 글을 내려 유생들을 효유하라고 전교를 내렸다.
다음에는 이 고장 재지사족들은 같은 지방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관변측(官邊側)의 대표격인 수령과 향리들로부터 여러가지로 침탈당하자 같은 지방에 살고 있다는 동류의식이 작용했는지, 이러한 침탈을 시정하기 위하여 왕에게 상소하고 있음을 다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경상도 안동(安東)에 사는 생원 이포(李苞)가 상소하면서 백성들의 고생하는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그 상소에 "신은 초야의 외로운 한 사람이나 시사(時事)에 개탄하여…오늘날 백성을 해치는 폐를 진술하니 전하께서는 헤아려 주소서. 민생의 초췌와 호구의 감소, 군졸의 유망, 전야(田野)의 황폐가 지금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이 몇 해 동안 흉년이 잇달아 백성들이 초목의 껍질로 연명하고 있으므로 전하께서는 백성들의 고초를 가엾게 여기시어 모든 공물(貢物)의 양을 일체 감하라고 하셨는데도 수령(守令)들은 그 명을 받들지 않고 낱낱이 다 거두어 들이며 독촉이 여전합니다. 그리고 아전(향리)들 중에서 가장 혹독한 자를 뽑아 그를 맹차(猛差)라 부르며 민간에 풀어놓으므로 개나 닭까지도 편안치 못합니다.…"

라고 왕에게 상소했는데, 안동지방에 거주하던 재지사족인 이포가 자신과 같은 고장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당해 지방 수령과 향리들로부터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가혹하게 공물을 침탈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글과 그림으로 호소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재지사족들이 그 고장 백성편에 서서 활동함으로서 향촌사회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치를 보다 확고히 굳힐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안동사족의 자치활동
신흥사대부를 중심으로 건국된 조선왕조는 자연히 사대부들의 권익신장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집권층은 이를 위하여 중앙과 지방별로 여러가지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앙에서는 의정부 서사제를 비롯하여 재경 현직 사대부 관료들의 권한확대에 필요한 제도를 마련하기에 노력하는 한편 지방에서는 그때까지 향리들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던 군현 지배권을 재지사족들이 잡도록 힘을 기울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이 지방의 유향소(留鄕所)인데 이에 관한 다음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방의 주·부·군·현에는 각각 토성(土姓)이 있습니다.…지방에 거주하는 토성 가운데 강직하고 공명한 품관(品官)을 가려 유향소로 삼아 유사(有司)들이 간교한 향리들이 침범하는 것을 서로 규제하여 살피는 동시에 그 고장 풍속을 유지해 갑니다…".

이것은 세조때 지방 반란의 중심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유향소가 폐지된 이래 다시 향촌 사회에 문제가 발생하자 조정 신하들 중 일부는 유향소 부활을 반대했으나, 좌의정 윤필상(尹弼商, 1427∼1504) 등은 그 부활을 주장하여 성종도 거기에 동조함으로써 다시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나말여초이래 각 고을에는 그 고을을 이끌어가는 유력한 성씨 집단이 몇 개씩 생겨났으니 이것이 소위 토성들이다. 그 뒤 이들 토성집단은 같은 성씨 중에도 상경하여 벼슬하는 사족집단과 군현에 그대로 남아 향직을 세습하는 이족집단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치적 혼란이나 기타 이유로 지방에 거주하는 유향품관도 늘어남에 따라 이들의 향촌사회에서의 역할과 권익확대 요구도 증대되어 이와같은 현상이 생겨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하튼 유향소는 각 군현 재지품관을 중심으로 하는 사족(士族)들로 구성되어 자료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간사하고 교활한 향리들을 규찰하고 그 고을의 좋은 풍속은 이를 지켜가고 나쁜 습속은 시정하면서 그들 재지 사족들의 단합과 권익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지방 자치기구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안동지방의 재지사족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어떻게 활동했는지 그 대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앞의 주168)의 생략된 부분에 의하면 유향소는 그 지방 출신의 재경관인(在京官人)들로 구성되는 경재소(京在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지방에서 사족들의 권익 증대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향소의 임원인 좌수와 별감 등은 경재소의 후원 아래 지역사회의 교화(敎化)와 향리들의 부정을 규찰하는 등 지역사회의 자치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권위를 높여 나갔다.
재지사족들은 향리들과 스스로를 구분하면서 그들 중심의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고자 향안(鄕案)을 작성하였는데 어떻게 보면 향안은 그 지역 명문사족들의 명부로서 안동지방에서는 그것이 16세기초부터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지사족의 형성이 빨랐던 안동은 향안이 작성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활동이 활발하여 15세기 중반에는 향사당(鄕射堂)을 세워 유향소를 구성하고 향사·향음례(鄕飮禮)·사창(社倉)·향약(鄕約) 등을 차례로 실시하여 나갔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성리학이 전래된 이래 각 지방에서 새로이 대두되는 신흥사족들이 주자학적 실천 윤리를 지역사회에 보급하여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면서 지역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보이는데 안동지방의 사례를 실제로 보고자 한다. 먼저 향사당(鄕射堂)을 보면 이것은 안동부의 성곽 서쪽 2리쯤 떨어진 법상사 옛터에 있었는데 마루가 다섯 칸이고 그 동쪽에 단을 쌓아 마루와 같은 높이에서 춘·추로 강신(講信)겸 향사음주례(鄕射飮酒禮)를 행하였다. 정통 임술년(正統壬戌年:1442) 즉 조선 세종 24년 유학 교수 권시(權 )의 기(記)에 의하면 "우리 안동은 근면 검소하고 본분에 힘쓰며 아껴쓰는 것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으나 기쁘거나 슬플 때 모일만한 시설이 없어서 덥거나 추울 경우 고통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 고을의 노인인 권치(權輜)와 남부량(南富良) 등이 서로 모의하여 법상사 뒤편 언덕에 자리를 잡고 김상(金賞) 등이 그 일을 감독하여 앞뒤로 퇴 4칸의 집을 지어 향사당이라 칭하고 여러 가지 그릇과 자리 그리고 베로 만든 과녁 등을 준비하였다."
이곳 향사당에서 기쁘고 슬픈 일을 서로 나누고 가는 이를 보내고 오는 이를 맞이할 때 마시고 활쏘기로 강신의 풍속을 이룬다.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나 좋은 날 풍년이 들어 즐거운 해는 활쏘고 술마셔서 관덕의 일을 다하며 나이 많은 분을 존경하고 장유(長幼)의 순서를 밝히면 이것이 비록 한 고을의 숭상함이지만 세도(世道)를 바르게 하는데 실로 관계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안동지방에는 15세기 중엽에 이 고장 유력자들 중심으로 향사당을 만들어 그들 사족간에 친목을 도모하고 이 지방의 풍속을 교화시키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향사당을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유향소가 지방에 따라서는 일반 백성들과 관리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어 말썽이 되었음을 다음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고을마다 유향소와 경재소를 설치한 것은 한 고을의 풍속을 규정(糾正)하기 위한 것인데 지금은 풍속을 바르게 하지도 못하고 백성과 하급 관리들을 침해하여 유망(流亡)하게 하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우선 회복될 때까지 이를 없애 주십시오."

이것은 중종 12년(1517)의 사실로서 이때에 와서는 일부 고을의 재지사족은 그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하여 힘없는 사람들에게 수탈하는 폐습이 생겼음을 밝혀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안동지방은 앞의 주 171) 뒷부분에 의하면 향사당을 운영하기 위하여 이미 1446년에 영중(營中)의 면포 12단(端)으로 보(寶)를 설치하여 그 이식으로 유향소를 이끌어 갔으므로 그러한 폐습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향소를 설치 운영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는 향안(鄕案)이다. 아무리 그 지방의 사족(士族)이라 하더라도 여기에 자기 이름이 올려 있지 않으면 유향소에 출입하면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향소는 향안에 등재된 사람 가운데 덕망이 있는 자를 골라 향임에 선발하여 일정기간 그것을 관리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중요한 안건을 심의 처리하고자 한다면 향안에 등재된 인사들에게 통지하여 모이게 한 뒤 여기에서 의결하게 하는데 이것을 보통 향회(鄕會)라고 한다. 그리고 이 향회는 의결사항 이외에 향사나 향음주례 기타 친목활동을 할 때도 향회에서 주관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재지사족이 자기 고을에서 제 구실을 하자면 향안에 자신의 명단이 등재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데,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신중을 기하면서 올려주고 있음을 다음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향안이란 세족(世族)을 구별하고 한 고을의 기강을 바로 잡아 백성들의 풍속을 교정하는데 목적이 있다.…… 영남의 60여 개 고을에 향안이 대개 있지만 유독 안동과 상주가 가장 성하며 또한 향안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그 이유는 향안에 등록한 사람이 많고 또 등록하기가 어려운 것은 세족이 많기 때문이다."

즉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위에서 지적하듯이 경상도 중에서도 특히 안동과 상주 지방은 유학이 성한 곳으로 명문 세족이 많기 때문에 향안에 등재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을에서 사족으로 활동하자면 우선은 무엇보다 신분 사정에 통과하여 향안에 자기 성명이 올라야만 가능하였다.
조선전기까지만 하여도 각 지방행정에서 유향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으나 그것은 재지사족 가운데 품관(品官)이 매우 많아 그들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들 품관들은 대체로 고려말 군공(軍功)을 세웠거나 기타 다른 이유로 첨설직(添設職)을 많이 받아 명예직이긴 하지만 관품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부류는 고려말 벼슬을 하다가 왕조가 바뀌면서 그만두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과 조선왕조의 벼슬길에 있다가 정변으로 물러나 낙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들 재지사족 중에서 처음부터 고향에 있으면서 유학공부에만 치중하는 처사(處士)를 제외한 부류들은 내심으로 상당한 권위와 자부심을 갖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더욱이 그들 전직 관원 가운데는 관품이 현재 자기 고을 수령보다 높은 경우도 많았다. 이럴 때 재지사족과 수령이 갈등과 대립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므로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정부의 생각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왕조는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하여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아래의 자료에서 그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각 고을 경재소(京在所)마다 좌수(座首) 1명, 참상별감(參上別監) 2명, 참외별감(參外別監) 2명씩 정하여 고을 안의 공무를 관장하되 자기 고을 수령의 행정에는 간섭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여기에 위반하는 경재소는 사헌부의 규찰을 받아야만 한다.

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경재소에 관한 규정이지만 앞서 이미 지적한 바와같이 경재소와 유향소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즉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각 고을 토착 사대부 가운데 서울에 올라가 벼슬하는 사람들이 자기 출신 고을에 관계되는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가 바로 경재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당 고을 경재소에서 자기 출신 고을 재지사족 가운데 강직하고 공명한 품관을 선발하여 유향소 임원으로 삼기 때문에 위의 기록과 같이 경재소를 규제하면 자연히 유향소도 규제되어 재지사족들은 자기 고을 수령의 행정수행에 간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유향소의 좌수와 같은 임원이 수령보다 관품이 높을 경우 비록 전직 관료이긴 하지만 그러한 현상은 가능한데 앞서 선조때 문신으로 활약한 바 있는 정경세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안동 지방은 전통적으로 유학이 성하여 명문 세족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주 134)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안동 고을 수령 선정에는 중앙에서도 상당히 신경쓰고 있는 점에서도 그러하다고 본다.
따라서 안동 고을의 행정 추진은 수령과 향리를 축으로 하는 관치(官治)행정이 자의로 독주했다기 보다는 다른 고을에 비하여 대체로 재지사족들의 보이지 않는 규제를 받으면서 추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토착 사족들은 유향소를 근거로 관치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나 그것을 협조하는 범위 안에서 고을 단위의 자치활동을 했을 뿐만아니라 그 하부 행정구조에서도 그런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향촌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들 재지사족들의 구성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니, 그것은 먼저 전직 관원를 지냈거나, 명예직으로 관품을 받았거나 간에 관품을 지닌 품관 계층과 다음에는 사족의 후예로서 관품은 없되 유학을 익힌 처사계층이다. 후자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하면 향교에 재학하고 있거나 생원, 진사 자격을 얻은 사람이 대부분이며, 때로는 생원, 진사가 아니더라도 후손들은 유학(幼學)이란 명칭만으로도 재지사족의 대열에 끼이는 일도 많았다.
이들 토착사족들은 그들의 신분을 유지하고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시 대부분 직접 생산활동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유학의 경전이나 역사책들을 읽고 연구해야만 하였으며 혼인도 그들 가문끼리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향을 조선시대 사족들은 대부분 지니고 있었으므로 당시 안동 지방의 재지사족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안동의 재지사족들이 고장의 풍속을 교화하고 지방자치를 원만히 추진하기 위하여 유향소와 향촌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앞서 보았듯이 안동에서는 재지사족들의 명부인 향안이 16세기 무렵부터 작성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향소의 활동이 상당히 일찍부터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영가지}에 실려있는 향규(鄕規)를 분석하여 안동지방 토착 사족들의 활동내용과 그 목적 등을 밝혀 보고자 하는데 먼저 향규 구조(舊條)를 분석하여 보기로 하자.
 (1) 부모에 불순한 사람, 조부모와 백숙부모에도 같음
 (2) 형제가 서로 싸우는 사람 중 형은 바르고 아우가 그르면 다만 아우만 다스리고, 형이 그르고 아우가 바르면 같이 처벌한다
 (3)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풍속과 교화를 상하게 하는 사람. 이상은 영구히 이행시키되 고치지 못하는 사람은 관청에 보고하여 죄를 다스리게 한다.
 (4) 본처를 소박하는 사람은 처에게 잘못이 있으면 그 죄를 감한다
 (5) 친척간에 화목하지 못한 사람
 (6) 고장의 어른들을 능욕하는 사람
 (7) 지주(地主)를 헐뜯거나 중앙과 지방에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
 (8) 같은 나이끼리 서로 싸우고 욕하며 구타하는 사람
 (9) 강한 것을 믿고 약한 사람을 능멸하여 침탈하거나 송사를 일으키고 사채(私債)를 빙자하여 타인의 재산을 빼앗는 자도 같음 
(10) 집강(執綱)이 사사로움을 쫓아 향안(鄕案)에 함부로 기록하는 자, 말을 지어내어 무고함으로써 사람을 죄악에 빠뜨리는 자
(11) 이웃 사이에 화목하지 못한 자
(12) 임무를 맡아 삼가지 않고 고을의 풍속을 더럽히는 자. 이상은 고장에서 쫓아내고 고치지 못하는 것은 영구히 이행케 한다.
(13) 고을 수령을 맞이하거나 보낼 때 무단히 참석하지 않는 자는 관청에 맡겨 차례로 차정한다 
(14) 혼인이나 상장(喪葬)을 이유없이 때를 넘기는 자는 상벌(賞罰)한다
(15) 봄과 가을의 강신(講信) 및 모든 공적인 모임에 까닭 없이 불참하는 자는 징벌한다
(16) 유향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경중(輕重)을 구분하여 벌을 정한다
(17) 보(寶)의 원금과 이자를 축낸 자는 징계하여 원금과 이자를 납부케 한 뒤에  영구히 고을을 떠나게 하고 정한 벌을 이행치 않는 자는 차츰 벌을 더한다
(18) 품관들이 집강을 능욕할 경우 같은 품이면 영구히 쫓아내고 향회에 불참하면 매년 위관(委官)에 정하고 참가할 만한 자는 종신토록 제록(除錄)한다
(19) 집강이 향리들에게 청탁하여 사사로운 것을 행하여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발견 즉시로 쫓아낸다
(20) 품관들이 까닭없이 관청에 출입하여 사리를 꾀하고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발견 즉시로 쫓아낸다
(21) 길흉경조사는 각각 그 이웃마을이나 친척은 향약(鄕約)에 의하여 거행하되 어기는 자는 들리는 바에 따라 벌을 정한다
(22) 봄·가을 강신(講信) 때는 관청에 알린 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여 어른과 젊은이의 도리를 밝힌다

위의 내용을 보면 재지사족들이 안동 고을에서 그들의 권위를 유지하면서 자치적으로 한 고을을 다스리고 지배하고자 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교의 실천윤리를 확대보급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 내용을 몇 가지로 나누어 분석해 보기로 하자.
먼저 유교적 가정 윤리를 확립하여 가정의 질서와 친척간의 화목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으로는 (1), (2), (4), (5), (14) 등을 거론할 수 있으며, 사회 윤리를 확립하여 지역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해 보고자 한 것으로는 (3), (6), (8), (9), (11), (21) 등이 있다. 재지사족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했던 것으로는 (7), (15), (16), (17), (18), (20)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다음에는 지방 수령을 위시한 관청 소속 관원들의 권위를 지켜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는 (13), (22) 등 이다.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그 앞의 고려시대에 비하여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기는 했지만 지방 구석구석을 제대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재지 토착 사족들의 협조가 불가결한 것이었다. 더욱이 숭유정책을 국시(國是)의 하나로 삼고 그것으로 사회와 백성을 교화하는데 힘을 기울인 정부로서는 그 필요성이 보다 증대되고 있었는데 다음 기록에서 그것을 추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외방(外方) 고을의 호적(戶籍)이 법과 같지 않아 산만하고 어지러워서 계통이 없는 탓으로 풍속(風俗)과 관계되는 일을 검거할 경로가 없으므로, 이로 인하여 불효(不孝)하거나 불목(不睦)하는 자가 많이 있으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청하건대 {대전(大典)}에 의하여 통주(統主)·이정(里正)·권농관(勸農官)의 법을 밝히어 통 안에 만약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통주는 이정에게 신고하고, 이정은 권농관에게 신고하고, 다시 옮겨 수령(守令)에게 고하여 그 죄를 다스리게 하면 풍속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이것은 특진관(特進官) 윤효손(尹孝孫, 1431∼1503)이 경연(經筵)에서 왕인 성종께 아뢴 내용이다. 즉 그가 유학이 성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觀察使)로 그 이전에 근무할 때 시행했던 좋은 경험을 되살려, 이것을 전국에 시행하여 보고자 왕에게 건의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척간에 화목하게 하는 것과 같은 성리학의 실천윤리를 향촌(鄕村) 구석까지 침투시키기 위하여 이를 어기는 자를 색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대략 다섯 집을 단위로하여 통주가 책임지고 유교적 윤리를 시행하게 하는 한편 이것을 어기는 자는 스물 다섯 집의 책임자인 이정에게 신고하도록 하였다. 이정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시행하되 위반자가 생기면 소속하고 있는 면(面)의 책임자인 권농(勸農)에게 보고하고, 권농도 그와같이 하되 위반자는 고을 책임자인 수령에게 신고하여 그 죄를 다스리게 함으로써 향촌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잡고자 했던 것이다.
윤효손은 이 날 경연에서 계속하여 아래와 같이 성종에게 아뢰었다.

"나라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는데…향음주례는 나이가 많고 덕행이 있는 사람이라야 하며 향사례는 효제충신(孝悌忠信)하며, 예(禮)를 좋아하고 난잡하지 아니한 자라야 비로소 이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참여하지 못한 자는 모두 힘써 행하려고 하니, 진실로 이는 유향소(留鄕所)로 하여금 비위(非違)를 규찰하고 검거하게 한다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이와같은 윤효손의 주장에 대하여 성종은 모두 옳다고 하면서 지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동지방은 전통적으로 유학이 성하여 사대부 계층이 두터운 데다가 중앙 정부의 이러한 조치로 다른 지방에 앞서서 유향소의 활동이 활발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재지 사족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유향소는 그 뒤 조선 중기에 이르면 향촌사회에 있어서 그들의 지위를 보다 강화하고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향규 등에 그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례를 안동 고을의 읍지인 {영가지}에 등재된 향규 신정 10조(新定十條)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향임(鄕任)을 중시한다.
      향중에서 나이와 덕망있는 1인을 추대하여 좌수(座首)로 삼고 조행있는 3인을 별감(別監)으로 하되 향안(鄕案)에 등재되지 않은 자는 선출하지 않는다.
      향임을 뽑을 때는 공론(公論)에 따라야만 하며 사사로이 서로 후원하여 자격이 없는 자를 뽑아 고을 풍속을 훼손해서는 안된다.
(2) 모임과 의식을 엄하게 하여야 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강신례를 행할 때 좌수, 별감이 주석을 맡고 품관(品官)들은 나이대로 자리를 잡는데…
      별감은 우렁찬 목소리로 법규를 읽는다.
      향중에 무릇 큰 일이 있으면, 부로(父老)들을 청함에 공론대로 해야지 집강 마음대로 못한다.
      이유없이 불참하는 자와 자리를 문란시켜 실의하는 자. 좌중에서 시끄럽게 싸우는 자. 자리를 비우고 물러간 자. 이상은 하벌(下罰)
(3) 윤리와 규범을 두텁게 한다.
      부모와 조부모에 불순한 자.
      형제간에 서로 싸우는 자.
      가정의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자. 이상은 상손(上損)
      친척간에 화목하지 못한 자
      정처를 소박하는 자 이상은 중손(中損)
(4) 향안(鄕案)을 바르게 한다.
      내외사족(內外士族)으로 허물이 없는 자를 향안에 올리는데... 향중의 여론이  모두 좋다고 하여야 정식으로 등재한다.
(5) 예속(禮俗)을 밝게 한다.
      자신보다 20살이상 나이많은 어른은 아버지뻘로서 문안하고 길에서 만나면  하마(下馬)한다.
      길흉사에 이웃과 친척들은 향약(鄕約)에 따라 행하되 어기는 자는 벌을 준다.
      일이 관청에 연결되고 향풍에 관련이 있는 자와 향장(鄕長)을 능욕한자.
       이상 상손
      이웃끼리 화목하지 못한 자와 친구끼리 싸우는 자.
      염치없이 사대부의 기풍을 더럽히고 훼손하는 자.
      무뢰배와 당을 지어 행패를 많이 부리는 자.
      환란을 당하여 힘이 있어도 앉아서 구하지 않는 자.
      혼인과 장례를 이유없이 때를 넘기는 자.
      유향소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
      향론(鄕論)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원한을 품은 자. 이상 중벌(中罰)
      자기 힘을 믿고 사람의 예절을 무시하면서 거만한 자.
      구관(舊官)을 보낼 때 이유없이 불참하는 자. 이상 중벌
(6) 연세가 높은 분을 존경한다.
      나이 60이 된 자는 잡된 일에 차출하지 않는다.
      70이 된 자는 향중에서 별도로 우대하여 보호해야 하는데 업신여기면 그 죄로 한 등급 더한다.
      80이 된 자는 여러 아들 중 한 사람은 소임을 맡기지 않는다.
      90이 된 자는 여러 아들을 모두 차출하지 않고 설에는 집강이 주과로 위문하고 죽으면 치전한다.
      강회(講會)때 75세 이상으로 참석할 수 없다면 술과 반찬을 집에 보내드린다.
(7) 잘못된 짓을 금한다.
      모든 재지품관이 이유없이 관청에 출입하며 사리를 도모하여 폐단을 짓는 자.
      행실이 부정하여 풍속과 교화를 해치는 자
      지주(地主)를 비방하여 경외(京外)에 터무니없는 말을 유포하는 자.
       이상은 상손(上損). 고치지 못하는 자를 추방함.
      망녕되게 위세를 지어 관청을 뒤흔들거나 사사로움을 행하는 자.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여 빼앗거나 다투는 자.
      공사 모임에서 관아의 행정을 시비하는 자와 말을 만들어 남을 죄에 빠지게하는 자 및 관청의 일을 맡아 공을 빙자하여 사리를 꾀하는 자
      일을 맡아 삼가하지 않고 고을의 풍속을 더럽히는 자.
       이상은 중손(中損). 고치지 못한 자는 상손
(8) 향리(鄕吏) 등을 다스린다.
      민간에 출입하여 함부로 토색하거나 거두어 들이는 자와 각 관청 소임을 이유로 폐단을 짓는 자.
      관청을 속이고 정령(政令)을 어긋나게 손상시키는 자와 공물을 징수하면서 부정을 하는 자.
      무례하게 고을의 풍속을 해치는 자와 양민을 모점하여 몰래 일을 시키는 자.
      세력을 좇아 향리의 직역을 피하는 자와 양가의 딸과 관비를 첩으로 하는 자 및 서원(書員)으로 일을 하면서 폐단 짓는 자 등으로 심한 자는 관청에 알려 처벌토록 함.
(9) 요역( 役)을 고르게 한다.
      고을의 호구와 토지면적을 별도로 문서를 만들어 부역을 정할 때 유향소는  그 다소와 허실을 살펴 거짓이 있는 자는 죄를 다스린다.
      잡역(雜役)등에 관한 일은 8결법에 따라 경중을 헤아려 각 면(面)에 돌리는데 만약 그 힘을 믿고 토지를 함부로 갖거나 세금에 성실치 못한 자와 토지를 숨겨 부역을 안한 자는 관청에 알려 치죄한다.
(10) 아이들을 가르친다.
      각 면(面)에서는 학행이 있어서 스승이 될 수 있는 1인을 고을에 알려 훈장에 임명토록하여 면내의 아이들을 모아 소학(小學)의 도리를 가르치게 한다.
      나이 20세에 이르러 학생이 쓸만하다고 보이면 훈장은 이름을 적어 고을의 향교에 보낸다.
      훈장이 가르침에 효과를 거둔 자는 법에 따라 고을에 추천하고 엄하게 가르치지 못하여 학도들이 태만해서 성과가 없으면 향벌(鄕罰)로 논한다.

위의 신정 10조는 안동이 낳은 이름난 재상이었던 류성룡(1542∼1607)이 손질하여 만든 것으로 {영가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이전의 향규와 비교하여 보면 기본적인 정신은 큰 차이가 없으나 재지사족들의 향촌 사회에 있어서 지위와 역할이 보다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앙 정계에 있을 때도 일을 처리하면서 공론(公論)을 매우 중시했는데 여기서도 좌수, 별감 등과 같은 향임을 선출하거나 향안에 대상자를 등재할 때 고을의 공론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사대부 계층이 고을 전체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그들의 위신과 체면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한편 향리(鄕吏)들에 대한 규제와 간섭을 보다 구체화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유학의 실천윤리를 안동지방에 확대 보급하기 위하여 상당히 노력하고 있는 점이다.
이를테면 (3), (5), (6) 등이 그것인데, 이것을 바탕으로 안동의 사족(士族)들 스스로가 이 고장에 유풍(儒風)을 진작시켜 주민들을 교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안동 고을에 유학교육을 강화하여 성리학 기풍을 떨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학생들 교육에 상당히 배려하고 있었다. 즉 고을 안에 있는 각 면(面) 단위로 유능한 교육자를 뽑아 학생들에게 유학의 실천 윤리에 필수적인 소학 교육을 시킨 뒤 장래성이 있는 학생은 다시 고을의 향교로 보내 더욱 성취하게 하였다.
안동 지방 사족들의 향촌 자치활동의 중심은 아무래도 그들이 주축되어 조직한 유향소이였다. 그것을 설치한 주요한 이유는 각 고을 사대부들로 하여금 그 곳의 풍속을 바로 잡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사족들이 유향소에서 풍속을 바로 잡으려 하다가 향리들과 대립과 갈등을 빚는 경우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고을은 당시 전국에서 유학이 먼저 정착되어 문풍이 성한 곳이었으므로 다른 지방보다 사대부의 위치와 역할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향리층을 누르고 향촌 사회를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대립은 거의 없고 향리들을 지배하고 이끌어 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재지 사대부가 주장하는 유향소의 임무는 향촌사회안의 불효(不孝)·불목(不睦) 등을 자행하여 향촌(鄕村)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 모두를 통제하려는 것으로 이는 유향소가 향촌 자치(自治)의 중심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 김항용 -
▣ 김윤만 - 잘 보았습니다.
▣ 김주회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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