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寓庵集(우암집) 국역화 03---우암유집 序文, 문단공 諡狀을 지은 이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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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1-18 02:02 조회1,8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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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계(雙溪) ★이복원(李福源)은

1719(숙종 45)∼1792(정조 16)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이정구(廷龜)의 6대손이며, 판서 ★이철보(喆輔)의 아들이다.

이복원은 1789년 김래와 김득현이 우암집 초간본 7권 1책 <우암유집>을 간행할 때 序文을 짓고, 문단공(김주) 諡狀을 찬하였다.

★김익(金#익04)과 동시에 재상에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소박한 선비차림이었고 행실이 독실하였으므로, 당시에 유상(儒相)이라고 불렸다.





○ 도정공(김공석)의 후손 기헌(寄軒) ★김기(金琦)는

1722∼1794년으로, 경기 여주 백양리 사제에서 안동김씨 ★사경(嗣慶)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문집으로 <기헌유고>가 전하고 있고, 기헌유고에 <황생전>이라는 소설이 실려 있으며, 문집에는 없지만 <정생전>이라는 소설을 지었다.

충청도 옥천으로 이거하여 당시의 名儒 耕窩(경와) ★李命源에게 후대를 받아 교유하면서 經傳子史를 위시한 제가 잡서를 통람하였고,

그뒤 상경하여 뒤에 相國이 된 竹下 ★金불화변翌(김익), 당시 관직에 있던 ★李鼎輔, ★李益輔, ★李?源 등과 친교를 맺었다.



○김래, 김득현과 이철보의 아들 이복원(1719-1792)의 교유,

김기(1722-1794)와 이정보(1693∼1766), 이익보(1708∼1767), 李?源, 이명원의 교유를 볼 때

여주와 옥천, 서울에서의 안동김씨와 연안이씨의 인연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혈연적 인연도 있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확인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 찾아 보겠습니다.







⊙ 이복원(李福源)

1719(숙종 45)∼1792(정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수지(綏之),

호는 쌍계(雙溪). ★정구(廷龜)의 6대손이며, 판서 ★철보(喆輔)의 아들이다.

1738년(영조 14)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음(門蔭)으로 양구현감을 지내던 중에 175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지평에 임명되어 무학(懋學)·근정(勤政)·신질(愼疾)·납언(納言) 등에 힘쓸 것을 상소하였다.

이어 헌납·교리·승지·대사간·이조참의, 예조·병조·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1772년 당시 대제학으로 현종의 상호(上號)를 지어 바치고 영조에게서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1773년 한때 사직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이조참판으로 증광시 시관(試官)에 임명되고,

1775년에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행장·시장(諡狀)을 찬술하기 위한 찬집청(撰集廳)의 당상에 임명되었고 영조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어 바쳤다. 우참찬·병조판서·명의록찬집당상(明義錄纂輯堂上)·형조판서·규장각제학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으나 관아를 비웠다 하여 강화유수로 좌천되고 이어 사형수의 자살사건으로 파직되었다.

다시 1780년(정조 4)이조판서에 제수되고 형조판서·우의정·좌의정·판중추부사·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세자부(世子傅)·영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 동안 1783년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 1790년 동지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1783년 종부시에서 간행한 《선원계보기략팔고조도 璿源系譜紀略八高祖圖》의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이치를 주로 하였고, 특히 사명(詞命)에 뛰어나 정조가 신설한 규장각에서 활약하였다.

★김익(金#익04)과 동시에 재상에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소박한 선비차림이었고 행실이

독실하였으므로, 당시에 유상(儒相)이라고 불렸다.

저서로 《천령향함이지락 千齡享含飴之樂》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연세어문학 제5집 (1974,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p15

失意의 美學 -미발표 한문소설 丁生傳 考- (송준호)



二. 작자 김기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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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공의 병환이 쾌차하자 故庄(고장)에 돌아가지 않고 충청도 옥천으로 이거하였으며, 거기서 당시의 名儒 耕窩(경와) ★李命源에게 후대를 받아 교유하면서 經傳子史를 위시한 제가 잡서를 통람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이런 공부들이 모두 성인의 도를 배우는 길이 못된다고 깨닫고 당시 畿湖(기호)에서 학행의 重望을 지고 있던 雲坪 ★宋能相, 木+樂泉 ★宋明欽 두 학자의 문에 차례로 출입하며 聖學에 전념하였다.

그뒤 상경하여 뒤에 相國이 된 竹下 ★金불화변翌(김익), 당시 관직에 있던 ★李鼎輔, ★李益輔, ★李?源 등과 친교를 맺아 그들로부터 한결같이 出仕의 권고를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도를 실천하기 위한 것인데 그 도를 실천할 수 없는 바에야 구차하게 벼슬자리만 지키고 앉았으면 그것은 祿과 헛된 명예만 탐내는 일이 아니겠으냐고 반문하고 사뭇 거절하였다.





⊙ 김익(金#익04){3}

1723(경종 3)∼1790(정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광중(光仲), 호는 죽하(竹下)·약현(藥峴). 제남(悌男)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상석(相奭)이다.

1763년(영조 39)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이듬해 왕이 인원왕후(仁元王后:肅宗繼妃)의 제삿날을 맞아 매일같이 불공을 드리는 것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석방되어 응교에 제수된 뒤 1769년에 세자시강원 겸 필선에 임명되었고, 1778년(정조 2)에 대사헌이 되었다.

1782년 강화유수를 거쳐 이듬해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임명되었다.

1784년 우의정으로 진주 겸 주청사의 정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786년에 또다시 동지사은사(冬至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9년 우의정에서 물러났으나 바로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續朝野輯要. 〈元裕漢〉





⊙ 이정보(李鼎輔)

1693(숙종 19)∼1766(영조 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 또는 보객정(報客亭). 아버지는 호조참판 우신(雨臣)이며, 어머니는 승지 윤빈(尹彬)의 딸이다.

1721년(경종 1)진사시에 합격하고 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32년(영조 8)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대교를 거쳐 1734년 봉교가 되었다.

1736년 병조좌랑·정언·경기도사를 거쳐 지평이 되었는데,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時務十一條)를 상소하였다가 면책을 받고 사직하였다.

1737년 부수찬·교리가 되고 이조좌랑·교서관교리에 전임되었으며, 1738년 이조정랑·응교·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를 거쳐 1740년 수원부사가 되어 부성(府城)을 쌓고 목장을 설치하여 전마를 기르고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

1742년 승지·부제학·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48년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상벌을 공평히 하고 비용을 절감하여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한성좌윤·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비변사제조에 선임되었으며, 1750년 도승지로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1752년 동지경연사·성천부사를 거쳐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고, 1754년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관·형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 우참찬·예조판서·판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 등의 중직을 역임하고, 1756년 공조판서로 홍문관·예문관의 제학과 지경연사·좌빈객을 겸하였다.

1758년 이조판서로 지춘추관사·판돈녕부사를 겸하고 이어 좌참찬·세손의 사부가 되었으며 1761년 이조판서로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1762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63년 예조판서·대제학·지성균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진되었다. 성품이 엄정하고 강직하여 바른 말을 잘 하여 여러 번 파직되었다.

글은 주의(奏議)에 능하였으며 생각하는 일은 반복하여 상소하고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나 시조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江漢集. 〈金龍國〉





⊙ 이익보(李益輔)

1708(숙종 34)∼1767(영조 4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겸(士謙). 참판 우신(雨臣)의 아들이다.

1739년(영조 15)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741년에 검열·예문관봉교로 재직중 김상복(金相福)·황경원(黃景源) 등과 함께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그뒤 정언·교리·응교·사인·필선·문학 등을 거쳐 대사간에 특진되고, 1749년에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남겼다.

1752년에 좌승지에 임명되고, 그뒤 고성군수·예조참의·공조참판·도승지·예조참판·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56년에 대사헌이 되고 이어 병조판서·수어사·이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이 되었다.

이에 앞서 민정중(閔鼎重)이 안도(按道)할 때에 함경도 백성들의 편익을 위하여 제정하였던 상정제(詳定制)는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폐단이 생기게 되자 왕명을 받들어 ★홍계희(洪啓禧)와 함께 이를 개정하였다.

그뒤 판의금부사·우참찬·회양부사·병조판서·이조판서·판돈녕부사·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續朝野輯要, 國朝榜目. 〈劉元東〉















▣ 김용주 - 이복원.선생님의 자세한 설명 고맙읍니다.

▣ 김항용 - 대구행 편안하셨습니가, 이복원 잘 알았습니다.

▣ 김윤만 - 그러게요. 어떻게 대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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