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끈질긴 일본원정, 그 시작과 끝 ▶ 원종대 이미 군량확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고려에 둔전을 설치하고 이에 대한 경영을 위해 막대한 양의 농우ㆍ농기구ㆍ종자ㆍ군량 그리고 우마의 사료 등을 요구하여 고려의 경제적 기반을 크게 손상시켰다. 원종대 설치한 둔전경략사를 통한 군량확보, 고려정부의 군량보조 및 전함건조, 이를 독려ㆍ감독하기 위한 원 사신의 파견 등에 소요되는 경비의 대부분을 고려측이 부담하였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충렬왕 즉위년(1274) 동정도원수부(東征都元帥府)의 몽고군 25,000명을 중심으로 하여 제1차 일본원정이 단행되었다. 동정도원수부는 고려에 주둔해 있었던 몽고군과 요동 및 한반도 북부출신으로 원에 귀부한 고려인 출신 군인을 주축으로 하고 있어 이들의 뒷바라지는 고려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고려도 군사 8,000명, 사공 6,700명, 전함 900척을 준비하여 이에 참전하게 되어 인적ㆍ물적으로 크게 수탈당하였다. 고려군은 김방경 등이 통솔하였는데, 연합군은 합포군을 떠나 대마도를 장악하고 다시 일기도(一岐島)로 진격하니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천여명의 희생자를 내며 패하였지만 다시 대대적인 반격을 하여 연합군 측 피해가 속출하자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후퇴하는 날 밤 폭풍이 몰아쳐 전함이 파손되어 많은 희생자를 내자, 1차 일본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 충렬왕5년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여 어느정도 여력을 갖추게 되자 일본원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때 고려는 남쪽 연변을 침략하기 시작한 왜구의 퇴치 및 원제국 내에서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로인해 충렬왕은 일본원정의 추진기관인 정동행중서성의 승상에 임명되어, 고려에 주둔한 원나라 장수들의 횡포를 어느정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군사 10,000명, 사공 15,000명, 전함 900척, 군량11만석과 많은 무기를 준비해야만 했는데, 이는 국가의 모든 생산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는 규모였다. 제2차일본원정은 고려에 위치한 정동행성 휘하의 고려군ㆍ원군 및 중국 강남지방 정일본행성(征日本行省) 휘하의 강남군까지 합세하여 일본을 침략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태풍을 만나 10여만명의 인명손실을 낸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두 차례의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원세조의 집념은 여전하여 이후 여러번 원정계획과 준비가 반복되어 제2차ㆍ3차 정동행성이 중국 강남에 설치되기도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고려는 계속해서 시련과 희생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1차원정때 동원된 고려의 막대한 군사력에 비해 고려 장수들은 원 장군직조차 제수받지 못하고 정동도원수부의 지휘하에 전쟁에 임했다. 제2차원정을 위해 설치된 정동행성의 구성에서도 왕이 승상직에 임명되었을뿐 이고 고려 장수중 일부만이 관직을 유지하면서 원의 대고려견제책에 이용되어 그 자손들에게 관직을 세습시키면서 친원적 성향을 물러주었을 뿐이다. 한편, 일본은 여원연합군의 침략을 막아준 태풍을 ‘가미가제’(神風)이라 불렀으며, 이는 태평양전쟁때 자살특공대의 이름으로 부활한다.
▣ 김주회 - 그 태풍이 ‘가미가제’(神風)였군요.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 김윤만 - ▣ 김윤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