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군제(軍制)가 많이 변했다는데.... ▶ 13세기 후반 이미 고려가 2군6위는 중앙상비군으로서의 면모를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 이는 농장이 발달하고 있는 과정에서 군인전이 주요 점탈 대상이 되어 전문적 군인을 배출하는 군호의 경제적 기반이 없어진 데다가 무인집권기를 거치면서 도방 등 집권자의 사병조직이 발달하여 무예가 뛰어난 군사는 대부분 이에 소속된 때문이었다.
▶ 충렬왕 즉위년(1274) 1차 일본원정 때에는 고려의 전투부대 8,000명과 수군 등 6,700명이, 7년 뒤의 2차 일본정벌 때에는 각각 10,000명과 15,000명이 동원되었는데, 수군 들은 물론 전투부대도 대부분 각 도의 일반민에서 새로 증발하여야 했다. 13세기 말엽에는 이같은 전투경험을 쌓은 군사가 늘어남으로써 2군6위의 전투력도 강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홀적(忽赤)을 비롯하여 성중애마(城中愛馬)가 조직 정비되어 중앙군의 새 구성원이 된 것도 조금이나마 부족한 군사력에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제반 사정 때문에 2군6위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원으로부터 정치적 통제도 그 하나로, 항복한 삼별초를 중앙군에 흡수하려는 시도는 원의 강력한 제재를 받았다. 그 결과 충렬왕 16년(1290) 여름 동계에 침입한 원의 반란군 잔당인 합단(哈丹)의 무리가 이듬해 여름에는 중부지역에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중앙군은 제대로 전투 한번 못하는 실정이었다.
▶ 한편 2군6위의 상장군 이하 장수와 교위ㆍ대정(隊正) 등 장교들로 구성되는 조직체계는 무반의 관직체계로서 구실하였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이로써 유사시에 대비한 전투조직인 종래의 5군도 기능을 잃지 않아서 각지에서 갑자기 군인을 뽑아 출정군을 편성하여도 곧 지휘부를 꾸릴 수 없었다. 그런데 2차 일본정벌 때 원의 군제에서 영향을 받아 지휘체계가 짜여진 뒤로 점차 고려의 중앙군은 도원수와 삼군만호(三軍萬戶)가 통할하고 그 휘하에 군사행정을 맡는 수령관과 군령을 맡는 진무소가 두어지는 체제로 변모해갔다. 이로써 고려의 중앙군제는 본래의 중앙군인 2군6위가 상존하는 가운데 그 위에 도원수와 3군 만호를 정점으로 하는 지휘체계가 두어져 고려 본래의 것과 원의 군제로부터 영향받은 것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채 혼재되어 자리잡게 되었다.
▶ 고려 본래의 지방군인 주진군은 12세기 이래로 대규모 인구 유리와 치열한 농민항쟁을 거치면서 조직 자체가 무너져 대몽항쟁에서는 새로 조직된 별초(別抄)가 주로 활약하였다. 대몽항쟁이 끝난 뒤로는 왜구에 대비해 주로 남방의 국방이 강화되었으며, 해안지역에 설치된 방호소의 방호별감ㆍ방호사와 수군을 지휘하는 수로방호사 등이 국방을 맡게 되었다. 이러서 두차례에 걸친 일본정벌이 끝난 뒤 해안지역에 새로이 국방 거점으로 만호부(萬戶府)가 설치됨으로써 지방의 군제도 원의 군제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변모해 갔다. 대몽항쟁때 도를 단위로 하는 지방군제 운용이 나타난 데 이어 13세기 말엽에는 원이 일본정벌과 관련하여 고려에 요구한 병력과 군량, 전함의 조달을 위해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빈번히 파견되어 도 단위로 군사업무를 맡는 관직으로 정착해 가고 있었다. 나아가서 충렬왕27년(1301) 무렵 도지휘사를 원의 경우처럼 지방 군사기구인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나 결국 원의 제지를 받음으로써 좌절되었다. 도지휘사사 설치 기도가 좌절된 뒤로 고려의 지방 군사력은 남해지역의 중요한 방어 거점 세곳에 두어진 만호부의 만호가 장악하였다. 읻들 만호부는 일본정벌이 실패한 뒤 일본의 공격을 염려하여 설치된 것들이다. 뒤에 합포만호부로 이름이 바뀌는 금주등처진변만호부(金州等處鎭邊萬戶府)가 먼저 충렬왕7년(1281)에 설치된 데 이어서 충렬왕16년에 전라만호부, 그 이듬해에는 탐라만호부가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합포ㆍ전라 두 만호부는 정식 명칭이 ‘변진만호부’로서 남부 해안지대를 지킨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