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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주변인물(90)충렬왕-11- 고려 관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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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01-29 21:47 조회1,6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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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 고려관제의 격하 title_back3.gif title_logo.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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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ow3.gif 충렬왕의 친원정책으로 고려의 관제가 격하되었다는데...?
고려의 3성6부를 기본으로 한 정치제도는 무인정권기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무인정권은 비록 중방이나 교정도감 등 스스로의 집권기구를 통해 무인정치를 실시하였으나, 법제적인 3성6부 및 여러 관서는 변함없이 존속시켰다. 그러나 몽고에 굴복한 후에는 그들의 강요에 따라 관제를 격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은 충렬왕대의 개정으로 나타났다.

충렬왕 원년(1275) 원에서는 고려의 관제가 참월하다 하여 사신을 보내 성(省)ㆍ원(院)ㆍ대(臺)ㆍ부(部)의 관명과 작호(爵號)기 그들의 것과 비슷한 것은 개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고려는 관제를 개정해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하여 첨의부라 하고 문하시중을 첨의중찬으로 고쳤으며, 상서 6부는 이부ㆍ예부를 합해 전리사(典理司)로 하고 병부를 군부사(君簿司), 호부를 판도사(版圖司), 형부를 전법사(典法司)로 하며 공부는 폐지하여 4사로 축소시켰는데 이때 4사의 장관도 상서에서 판서로 격하해 불려졌다.
동시에 추밀원(중추원)은 밀직사로 개정되고, 어사대는 감찰사, 한림원은 문한서, 보문각은 보문서, 국자감은 국학, 합문은 통례문, 사천감은 관후서로 격하 개칭되었다. 또한 충렬왕2년(1276)에는 몽고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의 힐난에 따라 왕의 선지를 왕지, 짐(朕)을 고(孤), 사(赦)를 유(宥), 주(奏)를 정(呈)으로 개칭하였다. 미밖에도 폐하를 전하, 태자를 세자라 부르고 왕의 묘호도 조(祖)ㆍ종(宗) 대신에 왕을 칭하였는데 앞머리에 ‘충’(忠) 또는 ‘공’(恭)을 붙이게 하였다.

충렬왕 원년의 관제개정은 원의 압력에 의해 할 수 없이 단행된 것이었다. 황제의 상국에 복속된 왕후국(王侯國)으로 참월하다는 이유로 격하시킨 개정이었던 것이다. 충렬왕대 원은 전방사령부로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였는데 일본정벌을 단념한 후에도 그대로 존속시켜 고려 내정에 관여하였다. 정동행성의 정식명칭은 정동행중서성이었는데 ‘정동’이란 일본정벌을 뜻하는 것이고 ‘행중서성’은 지방 파견관을 뜻하였는데 정동행성으로 약칭되었다.
정동행성은 제2차정벌의 준비를 위해 충렬왕6년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일본정벌이 실패하자 곧 폐지되었다가 충렬왕9년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곧 폐지되고 세 번째로 충렬왕11년에 설치된 후 고려말까지 존속되었다. 정동행성의 하부기구인 이문소(異問所)가 사법기관으로 반원세력을 억압하고 부원세력의 부패를 방조하는 전횡을 저질러 고려인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충렬왕대에는 원의 간섭으로 관제가 격하되었으나 그것은 상부관서에 한하였고, 고려 정치체제나 구 권력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원의 관부라 할 수 있는 정동행성이 고려에 설치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형식적 의례적 기구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충렬왕대에는 그 전부터 도당으로 불렸던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편됨에 따라 그 정치적 지위가 보다 확대ㆍ강화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정치체제상의 변화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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