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로 돌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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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04 02:27 조회1,730회 댓글0건본문
학창시절 기분을 느껴보기 위하여
충렬공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객관식 시험문제 20문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스스로 채점하여 보시기를.....
정답을 찾아 가면서
다시한번 충렬공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틀린 부분이 있거나 문제가 잘못된 경우가 있으면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정하겠습니다.
객관식 시험문제
문제1.
鼻祖(비조)란 시조 이전의 先系祖上중 가장 높은 사람을, 始祖(시조)란 제일 처음의 先祖로서 첫 번째 조상을, 中始祖(중시조)란 시조 이하에 쇠퇴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조상을 모든 宗中의 公論에 따라 정하여 追尊한 사람을 말합니다.
다음중 우리 가문의 中始祖(중시조) 할아버지는 어느 분일까요?
①김알지 ②경순왕 ③김숙승 ④김방경
문제2.
충렬공께서 태어나서 안동에 있는 조부의 집에서 자랐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 드러누워서 울었으나 오가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다음에 나열한 충렬공 先系중 괄호안에 들어갈 충렬공의 조부 휘자는?
김숙승--김일긍--김이청--김의화--( )--김효인--김방경
문제3.
충렬공께서는 16세때인 1227년 5대조부 일긍(日兢)의 음보로 양온사 동정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후, 젊은 시절에는 주로 무반직을 역임하셨습니다.
이때에 문하시중 ( )이 공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모든 일을 예로써 대우하고 중대한 일이 있으면 모두 公에게 맡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충렬공 초반 관직생활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최종준 ②이장용 ③최이(최우) ④유천우
문제 4.
충렬공께서는 몽고의 침입시에는 지방관으로서 백성의 식량 조달을 위하여, 일본정벌시에는 군대 지휘관으로서 군량 확보를 위하여 방파제를 쌓고 저수지를 만드는 등 수리관개사업의 대가로 활동하셨습니다.
다음중 충렬공께서 하신 사업이 아닌 것은?
①평안도 정주 위도 간척 ②제천 의림지 개축 ③밀양 수산제 개축 ④김제 벽골제 조성
문제 5.
충렬공의 아버지이신 상서공(김효인)께서는 예서와 행서등 글씨를 잘 써서 임금의 명으로 비문을 많이 쓰셨다고 합니다.
다음중 상서공의 필적이 아닌 것은
①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 ②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前面 ③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後面 ④영암 도갑사 필적
문제 6.
1258년(고종45) 김준 등에 의해 최의가 제거됨으로써 최씨 무신정권은 붕괴되었습니다. 최씨정권이 무너진 뒤인 1260년(고종) 충렬공은 49세의 나이로 개경 환도를 위해 太孫에 의해 출배별감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충렬공은 김준의 무인세력에 맞서서 왕실의 편에 서서 몽고와의 화평책을 쓰게 됩니다.
이때의 태손은 훗날의 어느 왕일까요?
①고종 ②원종 ③충렬왕 ④충선왕
문제7.
1269년 9월에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우인 안경공 창을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최탄과 한신의 무리가 북계(현재의 평안도지방) 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북계지방을 원나라에 바치려 할때, 충렬공께서는 몽고 군대가 서경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노력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결국 원나라의 직할영토로 편입되었다가 1290년경 회복하게 됩니다.
이곳은 당시 무엇이라고 불리었을까요?
①동녕부 ②쌍성총관부 ③탐라총관부 ④철령위
문제8.
충렬공께서는 초반에는 주로 무관직을 지내시고, 중후반에는 出將入相으로 무반과 문반을 넘나들면서 관직생활을 하셨습니다. 특히 몽고의 침략과 몽고의 지배 하에서 사직을 보전하고 국가의 평안을 위하여 국가 운영의 중심역할을 하셨습니다.
다음중 충렬공께서 지휘하신 전쟁이 아닌 것은?
①삼별초의 난 진압(1270-1273) ②제1차 일본정절(1274) ③제2차 일본정벌(1281) ④합단적의 침입 격퇴(1290)
문제9.
충렬공께서는 기록상 4번의 무고 또는 참소사건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권력다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1268년(원종9, 57세)에는 ★전분의 무고로 남경(한양)으로 좌천되었다가 3일만에 복직되었습니다. 둘째는 삼별초의 난 진압중 1270년 (원종11, 59세) ★홍찬, ★홍기의 무고로 삭탈관작되었다가 다시 上將軍이 되기도 합니다. 셋째는 1278년 (충렬왕5, 67세)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 등에 의한 무고사건으로 홍다구에 의한 심한 고문을 당하고 섬에 유배되었다가 원나라에 들어가서 해명하고 돌아오셨습니다. 넷째는 1282년 왕이 행차할 때 김방경이 술에 취하여 예를 취하지 않고 지나간 것을 들어 조인규의 참소를 받아 순마소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습니다.
충렬공 67세 1278년에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 등에 의한 무고사건시 충렬공께서 유배된 섬은 다음중 어디일까요?
①진도 ②제주도 ③대마도 ④대청도
문제10.
1270년 고려 조정이 몽고와의 강화를 맺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무반들이 난을 일으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1273년 진압될 때까지 서남해안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때 충렬공께서 고려군 총사령관으로서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시게 됩니다.
다음중 충렬공께서 지휘한 전투가 아닌 것은?
①전주·나주성 탈환 ②진도의 삼별초 진압 ③제주도의 삼별초 진압 ④탐라총관부 탈환
문제11.
1273년 삼별초의 난이 완전 진압되자, 원 세조는 전부터 꿈꾸어 오던 일본정벌의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사용한 전함은 충렬공께서 총감독하여 전북 변산, 전남 장흥 천관산에서 만들어 조달하게 됩니다. 1274년 제1차 일본정벌, 1281년 제2차 일본정벌시 충렬공께서 고려군 총사령관으로서 남해안의 이곳을 출발하여 대마도---일기도---일본 규슈 하카타만 일대를 정벌하고 돌아오셨습니다.
이때의 출발지는 남해안 어디일까요?
①합포(마산) ②동래(부산) ③부산포(부산) ④탐라(제주도)
문제12.
충렬공께서는 기록상 8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 오셨습니다. 5차로 중찬으로서 65세때인 1276년 7월부터 10월까지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성절사로서 원나라에 들어가셔서 원 세조로부터 ( )를 받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고 돌아 오시었습니다. 이는 고려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받은 것이라 합니다.
충렬공께서 고려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원 세조에게서 받은 것은 무엇일까요?
①호두금패 ②관대 ③장검 ④관복
문제13.
몽고의 수도는 화림(카라코룸, 현재의 몽고)이었는데, 원 세조가 원 제국을 건설하면서 대도(연경, 현재의 북경)와 상도(개평부, 현재의 중국 내몽고자치구)를 수도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압록강 건너 북경 가는 길에 동경(현재의 요동)이 있습니다.
다음중 충렬공께서 8차례 원나라에 다녀 오시면서 들리신 곳이 아닌 곳은?
①화림(카라코룸) ②대도(북경) ③상도(개평부) ④동경(요동)
문제14.
충렬공께서 8차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 오셨고, 4년에 걸친 진도와 제주도에서의 삼별초 토벌, 2차에 걸친 일본정벌과 관련하여 직간접으로 접촉하였던 원 세조 (1215-1294)는 충렬공(1212-1300) 보다 세 살 아래 이지만 활동시기는 거의 같습니다. 또한 충렬공께서 권력투쟁시 무고를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할때 후원해준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원 세조는 다음중 누구일까요?
①칭기즈칸 ②흔도 ③쿠빌라이 ④홍다구
문제15.
충렬공께서 89세에 병환(病患)으로 본댁(本宅)에서 임종(臨終)시까지 아품이 없이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시니 유언(遺言)에 따라 안동(安東) 조부(祖父)산소(山所) 근처에 장사(葬事)하게 되었습니다. 충렬공께서 돌아가시자 1300년 ( )이 충렬공 묘지명을 찬하였고, 1307년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웠으며, 1350년에는 손자 김영후의 집에 보관되어 오던 충렬공 행장을 다시 만들었다고 합니다.
1300년 충렬공 묘지명을 찬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이진 ②이제현 ③일연 ④이승휴
문제16.
충렬공께서는 혁혁한 공훈을 많이 세우셨으므로 여러번 훈작되셨습니다.
다음중 충렬공께서 받은 훈작이 아닌 것은?
①上洛公 ②上洛伯 ③上洛郡開國公 ④上洛君開國公
문제17.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충렬공께서는 전취 죽주박씨와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시고, 재취 손씨와의 사이에 1녀 (또는 용강 관비와의 사이에 1녀)를 두시고, 또다른 1녀가 있고, 경주가씨와의 사이에 2남을 養育하였습니다.
다음중 충렬공의 아들이 아닌 사람은?
①김선 ②김흔 ③김순 ④조변
문제18.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충렬공 묘소의 바로 위에는 ( )김씨 안동 입향조 김효로(金孝盧, 1455-1534)의 묘소가 있는데 이 묘소에 제를 올릴 때는 반드시 먼저 상락군 묘소에 제사로 고한다고 합니다.
이 행사는 광산김씨가 이곳에 묘를 처음 쓰니 회오리 바람이 불고 까막까치가 제물을 먹어 버려 제사를 지낼 수 없어, 그 아래의 이름없는 봉분이 있어 먼저 이 무덤에 제를 올리니 이 변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현재 재직사에서도 충렬공과 김효로 공의 묘소와 재실을 함께 관리하고 있고, 위토도 함께 경작하고 있습니다.
다음중 충렬공 묘소의 바로 위에 묘가 있는 김효로의 본관성씨는 무엇일까요?
①광산김씨 ②경주김씨 ③의성김씨 ④강릉김씨
문제19.
충렬공 묘소는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유적·유물이 아닌 것은?
①충렬공 묘비 ②재실 음수재 ③충렬공 영정 ④충렬공 신도비
문제20.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는 충렬공의 胎址(태지)라고 전해오고 있는 마을이고, 충렬공의 집터라고 전해오는 마을 어귀의 밭이 있는 곳이며, 충렬공께서 정자를 세웠다는 곳과 마을 앞 낙동강 건너 절벽에는 충렬공께서 유상하시던 상락대가 있는 곳입니다.
또한 이 마을은 충렬공의 셋째아들 문영공(김순)의 맏사위인 정책의 두 아들 정오와 정보가 외가의 인연으로 이 마을에 입향하여 세거하여 왔다고 합니다.
현재 이 마을에 있는 유적·유물이 아닌 것은?
①충렬공 배위 죽주박씨 설단 ②재실 상락재 ③충렬공 유허비 ④물계서원
▣ 김발용 - 좋은 공부입니다.
▣ 김항용 - 어쩌면 이렇게 깊고 세밀한 내용을 시험 자료로 만드셨습니까. 기왕 준비하신 것, 계속하여 문제 은행식으로 문제집을 제작해 두시면 어떨지요. 대종회보에 퀴즈문제로 발표한다면 전 종인에게 아주 좋은 공부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 김윤만 -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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