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서공파 소개자료 01 ---전서공(成牧), 학당(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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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09 04:04 조회1,874회 댓글0건본문
현재까지 우리 사랑방에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던 전서공파 관련자료를 모두 모아 연재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전서공파>
成牧---休---①益精, ②益廉(⇒ 아산, 천안, 목천), 女+朴安生(순천박씨, 朴彭年의 조부)
益精---①潚(숙)---壽寧(태종의 손녀사위) ⇒경상도 창령
-------②泂(형)---○○---○○---①사수, ②사준, ③사철, ④사민
①사수---金+吳(오) ⇒신방리(방이골)
②사준 ⇒양지촌
③사철---○○---濟鼎---基 ⇒달전리
④사민 ⇒경기 화성, 강화
전서공파의 파조가 되시는 成牧(성목)은 감찰사 장령을 역임했던 玖(구)의 2자중 장남으로 태어나 공조전서를 역임하였다. 그의 묘는 전동면 미곡리 학당에 있으며, 이곳에는 묘소를 실전한 부친 장령공 玖의 단비도 건립되어 있다.
연기대첩에 공을 세운 金 (김흔)의 연기와의 인연을 제한다면, 성목의 장자인 休(휴)는 전서공파 전의 입향조이자 연기지역에 연고를 가진 최초의 안동김씨 인물이 된다.
그러면 왜 전서공과 그의 아들 휴가 전의 지역에 터를 잡고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을까? 현재로서 우리는 그 진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전서공의 백증조가 되는 金 (김흔) 장군이 연기대첩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던 인연도 결코 배제하여서는 곤란할 듯하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고려말의 안동김씨들은 충렬공 金方慶 부자의 행적이 보여주는 것처럼 국권의 중심부에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세력에 의한 조선건국에 동조할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休는 호를 學堂(학당)이라 하였고 고려 공민왕 때에 검교로 있으면서 왕을 시종하였다. 어려서 포은 정몽주에게 수학하였고, 조선 개국 후에는 전의 운주산 밑 학당(현 전동면 미곡리 학당)에 은거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남면 양화리에 터전을 잡은 부안임씨 입향시조 임란수 장군도 같은 시기에 연기에 인연을 맺고 있어 두 인물간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전의에 은거한 休에게 태조는 護軍에 임명하지만 그는 노친을 봉양한다는 구실로 사퇴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다시 가선대부 한성부 판윤에 임명하는데 이때도 그는 끝내 새로운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성리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忠,孝,烈의 三綱의 도리를 실천하여 주위의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81세로 일기를 마쳤으며 부인은 선산김씨이고, 슬하에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益精(익정)은 효자로 정려를 표창받았으며, 차남은 益廉(익렴)이다. 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막내 사위가 바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朴彭年(박팽년)의 조부인 ★朴安生(박안생, 순천박씨)이었다. 연기지역에 순천박씨들의 터전을 마련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같은 안동김씨의 사위로 입향함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의 외손으로는 이외에도 타우 ★李翔(이상), 도암 ★李縡(이재) 등이 유명하다.
학당리에는 전서공파의 파조가 되는 成牧과 아들 休의 묘소와 재실이 있는데, 金成牧의 묘비는 구비는 戊午년에 건립된 것이고, 1992년에 새로 수립되었고, 休의 유허비는 원래 1819년 戊午년에 세워졌었는데, 1992년에 새로 세웠고 주변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 學堂公(休) 遺墟碑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 마을 입구에 세워진 이 유허비는 1819년(순조19) 후손 ★光淳(광순) 등이 건립한 것으로 전의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2km정도 떨어진 미곡리 학당 마을에서 수구동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주변은 논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다.
이 유허비의 둘레는 최근 화강암 석재로 단장해 놓았으며, 유허비는 대좌(비석받침)와 이수(비석의 머리장식)를 갖추고 있는데 대좌는 4각의 화강석재로 크기는 너비 120cm 두께 70cm 높이 40cm이다. 비의 몸체 역시 화강석재를 사용했으며 크기는 너비 80cm 두께 25cm 높이 180cm이며, 빗머리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이 두 마리 엉켜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너비 90cm 두께 30cm 높이 60cm이다.
이 유허비문은 ★宋穉圭(송치규)가 찬했으며, 후면에는 외후손인 ★李采(이채)가 찬한 후록이 있다. 글씨는 ★金鑛(김광)이 서했으며 이 유허비의 건립에는 후손으로 전의현감으로 부임했던 ★金奎漢의 주선이 컷었다고 한다. 건립후 丙申년 2월에 개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義鉉, ★國鉉 등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1896년(고종33)이 아닌가 추측된다.
▣ 김윤만 - 전서공파의 귀한 자료 소개. 기대가 큽니다.
▣ 김윤만 - 전서공파의 귀한 자료 소개. 기대가 큽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전서공파가 정리되면 본 홈 <전서공파>란에 넣겠습니다.
▣ 솔내 -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전서공파>
成牧---休---①益精, ②益廉(⇒ 아산, 천안, 목천), 女+朴安生(순천박씨, 朴彭年의 조부)
益精---①潚(숙)---壽寧(태종의 손녀사위) ⇒경상도 창령
-------②泂(형)---○○---○○---①사수, ②사준, ③사철, ④사민
①사수---金+吳(오) ⇒신방리(방이골)
②사준 ⇒양지촌
③사철---○○---濟鼎---基 ⇒달전리
④사민 ⇒경기 화성, 강화
전서공파의 파조가 되시는 成牧(성목)은 감찰사 장령을 역임했던 玖(구)의 2자중 장남으로 태어나 공조전서를 역임하였다. 그의 묘는 전동면 미곡리 학당에 있으며, 이곳에는 묘소를 실전한 부친 장령공 玖의 단비도 건립되어 있다.
연기대첩에 공을 세운 金 (김흔)의 연기와의 인연을 제한다면, 성목의 장자인 休(휴)는 전서공파 전의 입향조이자 연기지역에 연고를 가진 최초의 안동김씨 인물이 된다.
그러면 왜 전서공과 그의 아들 휴가 전의 지역에 터를 잡고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을까? 현재로서 우리는 그 진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전서공의 백증조가 되는 金 (김흔) 장군이 연기대첩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던 인연도 결코 배제하여서는 곤란할 듯하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고려말의 안동김씨들은 충렬공 金方慶 부자의 행적이 보여주는 것처럼 국권의 중심부에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세력에 의한 조선건국에 동조할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休는 호를 學堂(학당)이라 하였고 고려 공민왕 때에 검교로 있으면서 왕을 시종하였다. 어려서 포은 정몽주에게 수학하였고, 조선 개국 후에는 전의 운주산 밑 학당(현 전동면 미곡리 학당)에 은거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남면 양화리에 터전을 잡은 부안임씨 입향시조 임란수 장군도 같은 시기에 연기에 인연을 맺고 있어 두 인물간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전의에 은거한 休에게 태조는 護軍에 임명하지만 그는 노친을 봉양한다는 구실로 사퇴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다시 가선대부 한성부 판윤에 임명하는데 이때도 그는 끝내 새로운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성리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忠,孝,烈의 三綱의 도리를 실천하여 주위의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81세로 일기를 마쳤으며 부인은 선산김씨이고, 슬하에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益精(익정)은 효자로 정려를 표창받았으며, 차남은 益廉(익렴)이다. 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막내 사위가 바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朴彭年(박팽년)의 조부인 ★朴安生(박안생, 순천박씨)이었다. 연기지역에 순천박씨들의 터전을 마련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같은 안동김씨의 사위로 입향함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의 외손으로는 이외에도 타우 ★李翔(이상), 도암 ★李縡(이재) 등이 유명하다.
학당리에는 전서공파의 파조가 되는 成牧과 아들 休의 묘소와 재실이 있는데, 金成牧의 묘비는 구비는 戊午년에 건립된 것이고, 1992년에 새로 수립되었고, 休의 유허비는 원래 1819년 戊午년에 세워졌었는데, 1992년에 새로 세웠고 주변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 學堂公(休) 遺墟碑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 마을 입구에 세워진 이 유허비는 1819년(순조19) 후손 ★光淳(광순) 등이 건립한 것으로 전의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2km정도 떨어진 미곡리 학당 마을에서 수구동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주변은 논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다.
이 유허비의 둘레는 최근 화강암 석재로 단장해 놓았으며, 유허비는 대좌(비석받침)와 이수(비석의 머리장식)를 갖추고 있는데 대좌는 4각의 화강석재로 크기는 너비 120cm 두께 70cm 높이 40cm이다. 비의 몸체 역시 화강석재를 사용했으며 크기는 너비 80cm 두께 25cm 높이 180cm이며, 빗머리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이 두 마리 엉켜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너비 90cm 두께 30cm 높이 60cm이다.
이 유허비문은 ★宋穉圭(송치규)가 찬했으며, 후면에는 외후손인 ★李采(이채)가 찬한 후록이 있다. 글씨는 ★金鑛(김광)이 서했으며 이 유허비의 건립에는 후손으로 전의현감으로 부임했던 ★金奎漢의 주선이 컷었다고 한다. 건립후 丙申년 2월에 개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義鉉, ★國鉉 등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1896년(고종33)이 아닌가 추측된다.
▣ 김윤만 - 전서공파의 귀한 자료 소개. 기대가 큽니다.
▣ 김윤만 - 전서공파의 귀한 자료 소개. 기대가 큽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전서공파가 정리되면 본 홈 <전서공파>란에 넣겠습니다.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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