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전서공파 소개자료 01 ---전서공(成牧), 학당(休)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02-09 04:24 조회1,372회 댓글0건본문
■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3/06/13 17:38 (from:211.57.153.114) 조회 : 40
여말선초의 갈림길에서 우리 선조님들은...
▣ 여말충의열전 (1996, 고려숭의회)
靖節編 典書 ●金成牧(?-?)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공은 안동인으로 구(王+久)의 아들이요, 밀직사사 承用의 손자요, 평장사 方慶의 후손이다.
여말이 벼슬이 공조전서에 이르렀다.
때에 고려를 반역하여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이 조정에 창궐하여 고려의 운이 기울어지자 선생은 문하평리 변빈, 판서 성만용, 박사 ★정몽주, 제학 홍재, 대사성 이색, 전서 조열, 전사 이오, 단구재 김후 등과 공당에서 기약없이 모여 술을 기울이며 정란을 상심 개탄하다가 합잠시를 지어 읊고 눈물을 흘리며 이색이 말하기를
"옛날 은나라에 3仁이 있어 나라가 망하자 비간은 죽고, 미자는 가고, 기자는 종이 되었다고 하니 우리도 각자의 의사에 따라 행동합시다" 하고 마침내 고려가 망함에 모두 망복지신의 절의를 지켜 은거하였다.
義節編 學堂 ●金休 (?-?)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휴
자는 연부요 호는 학당이고 成牧의 자로 안동인이다.
공은 고려말에 사간을 역임하고 <金承露 實錄>
고려가 망함에 향리에 퇴둔하여 조선조에서 여러차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을 교육하면서 그 貞節을 지켰다. <대동운부군옥>
유고(遺稿)가 있다.
■ 작성자 :김태영 작성일 : 2003/10/26 14:23 (from:211.239.250.199) 조회 : 48
呈從叔척若齋島配時韻 / 종숙척약재 유배때 보낸시< 학당(學堂) 休(휴)>
大理島中叔是非 / 대리도에 계신 숙주(叔主)의 시비(是非) 때문에
浮雲山下姪冠衣 / 부운산 밑에있는 종질(從姪)은 의관(衣冠)이 잦습니다.
島山千里相思夜 / 도산천리(島山千里) 떨어져서 서로 사모(思慕)하는 밤에
自獨無言不掩扉 / 스스로 홀로 말없이 사립문을 못닫나이다.
학당(學堂) 김휴(金休) 고려충정왕2년 (1350) - ?
안동인, 자는 鍊父(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
父는 전서공 김성목이며 아들이 김익정이다.
■ 연기군지, 1988
▣ 金休 고려충정왕2년 (1350) - ?
안동인, 자는 鍊父(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이며 고려 공민왕때 檢校近侍(검교근시)라는 벼슬자리에 올랐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 때 護軍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 (고려 공조판서를 지낸 바 있는 金成牧)를 모시기 위하여 직을 사양하고 송도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운주산 아래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
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이라는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아 그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 명인들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연기군 전의면 미곡리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가 은거하고 있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를 따라 학당리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림 : 김휴 유허비
<구연기군지, 고장의 빛나는 얼과 전통(연기군), 해동인물지>
▣ 金休 유허비
소재지 : 전동면 미곡리 학당부락
이 유허비는 어느 연대에 건립하였는지 미상이나 다만 ★李采(이채) 찬, 金★鑛(김광) 서로 되어 있고, 현재 그 지점은 밭으로 되어 있다.
비의 내용은 김휴가 정몽주가 순절하자 세상을 한탄하고 벼슬길에서 떠나 향리로 내려와서 강학으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검교김공 유허비
<비후면> 書고려검교학당김공狀錄後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삼주 이채 찬
통정대부 행형조참의 연안 김광 서
■ 연기군청 홈페이지
학당(學堂)골 김휴(金休)
본(本)이 안동(安東)으로 서기 1350년(고려충정2)고향에서 출생했다.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문하생(門下生)으로 고려 공민왕땐 검교근시(檢校近侍)라는 벼슬에 있었고 고려가 실가되자 이태조 등국시 호군(護軍)에 명을 받았으나 연로하신 아버지(고려공조전서 성목:成牧)을 모 시고자 송도(松都)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오늘의 전의(全義)운주산 아래 병 거지(屛居地)를 정하여 은거하자 태조가 하선검교 한성좌운(漢城左尹)이라는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초야(草野)에 묻혀 있으면서 학문을 더욱 빛나게 닦아 그의 문하생으로 충효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儒林名人)들이 유허비를 세웠고 운주산 아래서 살았으니 지금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號)를 따라 학당리(學堂里)라 일 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참고문헌 : 碑文, 族譜
김 휴 유허비
[소 재 지]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시 대] 고려시대
안동인으로 자는 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이며 고려 공민왕때 검역 근시라는 벼슬 자리에 올랐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때 호군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 (고려 공조판서를 지낸바 있는 감성목)을 모시기 위하여 직을 사양하고 송도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운주산 아래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
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 이라는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이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더욱 닦아 후세 양성에 전력 하였으며 그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들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가 은거하고 있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를 따라 학당리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안생 유허비
[소 재 지] 연기군 전동면 송곡리
[크 기] 비신 - 62 x 29 x 153cm (고)
비좌 - 95 x 72 x 36cm (고)
옥개 - 105 x 75 x 40cm (고)
조선국의령고사 중 이조판서 순천박공안생지묘 증 정부인 안동김씨부후라고 묘비에 쓰여 있으나 건비연대는 불확실하다.
박안생은 박팽년의 조부이며 묘제는 고려시대의 모형을 닮은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 연기 미곡리 김휴 유허비
【관리번호】 339-840-231-151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 기타비(유허비)
【유적위치】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유적 분포지도 참조
【소 재 지】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리 마을
【시 대】 조선시대
【관 리 자】
【유적내용】
전의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2㎞ 정도 떨어진 곳에 미곡리 학당이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수구동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비석은 이 고개의 상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주변은 논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다.
이 유허비의 둘레는 최근 화강암 석재로 단장해 놓았다. 유허비는 대좌와 비신과 이수 등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화강석재를 가공하여 제작하였다. 대좌는 방형의 화강석재로 규모는 너비 120㎝, 두께 70㎝, 높이 40㎝이다. 비신 역시 화강석재를 사용했으며 규모는 너비 80㎝, 두께 25㎝, 높이 180㎝이며, 이수는 너비 90㎝, 두께 30㎝, 높이 60㎝이다. 이수는 방형으로 여의주를 입에괼 용이 두마리 엉켜있는 조각이 되어있다.
이 유허비는 영조 35년(1759)에 세워진 비로 가선대부대사헌 ★송치규가 찬했다. 후면에는 김공행장이 적혀있는데 ★이채가 찬하고 통정대부 형조참의 ★김광이 서했다.
【참고문헌】
【비 고】
▣ 김윤만 -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 솔내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