寓庵集(우암집) 국역화 24--- 화산군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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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10 18:57 조회1,555회 댓글0건본문
현재 경기 여주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 화산군 묘하에 있는 화산군 신도비는 화산군(1512-1563) 몰후 2백여년이 지나서 李敦宇(1801-1884)가 찬하였는데, 1920년 공 몰후 357년 庚申 7월 일에 정3품 통정대부 행 장성군수 12대손 演夏 書, 13세손 珏卿 追記로 세운 것 같습니다.
이돈우는 화산군 후손 사선의 외손자로 예조·병조 등의 판서를 거쳐 1862년(철종 13)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바 있습니다.
●이돈우 - 김주 신도비 찬, 김사선의 외손자
■ 디지털한국학
★이돈우(李敦宇)
1801(순조 1)∼1884(고종 21).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돈영(敦榮). 자는 범약(凡若) 또는 윤공(允恭), 호는 신게(莘憩). 득일(得一)의 손자로, 첨지중추부사 상두(相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사선(金思善)의 딸이다. 상형(相衡)에게 입양되었다.
1827년(순조 27)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홍문록에 올랐으며, 곧 홍문관제학이 되었다.
1831년 도청(都廳)을 역임한 뒤, 1836년 이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집의가 되었다.
그뒤 1840년(헌종 6)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1843년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참판에 다시 등용되고 1845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형조판서·대사헌·한성부판윤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1849년(철종 즉위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853년 공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1855년 예조판서·병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1857년 다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858년 이조판서가 되고, 1860년 형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한 뒤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61년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가 각지에서 발생하는 민란수습에 전력하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이듬해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63년(고종 즉위년)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제조로 국장도감의 애책문제술관(哀冊文製述官)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1864년 좌참찬·판의금부사·호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실록찬수당상으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호조판서·부묘도감제조를 거쳐 1866년 다시 제조·호조판서를 지냈다.
그뒤 1874년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으로 세자를 보필하였고, 이듬해 좌찬성으로 전문서사관(篆文書寫官)의 임무를 수행한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어 1882년 대제학이 되어 회권(會圈)에 참여하였다. 비록 일생을 관직에서 보냈지만, 항상 청백한 것을 좋아하여 연꽃을 사랑한다는 〈연설보 蓮說補〉를 지어 자신의 뜻을 펼쳤다.
저서로는 《갑고 甲藁》 6권이 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淸選考, 陶谷集, 經山集, 甲藁. 〈李源鈞〉
■ 1928년 해동청금록
권7 전라남도
장성군
♠김연하(金演夏) 벽농(碧農) 안동인(安東人) 화산군 주 후(辨誣功臣 花山君 澍 后) 군수(郡守) 문학덕행 당세아유(文學德行 當世雅儒)
권1 경기도
이천군 원(元) 음죽(陰竹:경기도 이천 일부와 충북 음성군에 걸쳐 있던 지명)
♠김각경(金珏卿) 우일(佑一) 송석(松石) 안동인(安東人) 변무공신 화산군 주 후(辨誣功臣 花山君 澍 后) 의관(議官)
▣ 솔내 - 신도비문을 언젠가는 읽어볼 날이 있겠지요? 빨리 보았으면 합니다.
▣ 김윤만 - 음죽현은 장호원, 율면(이상 경기도), 감곡, 생극, 무극(이상 충북) 일원으로 현청은 선비에 있었습니다.
▣ 김항용 -
▣ 김용주 - 이돈우.선생님의 약력 대단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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