寓庵集(우암집) 국역화 25--- 화산군 後孫 관련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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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10 18:59 조회1,842회 댓글0건본문
<화산군 後孫 관련인물>
김안국 - 김주의 스승---김공언과 교유, 김지 묘갈 찬
★조현명 - 장인 김성유 행장 찬, 김희 묘갈 찬
★조명구 - 김희 묘갈 서
★조종저 - 장인 김태기 묘표 찬
★조상우 - 김태기 묘표 서
송시열 - 김성렴의 스승, 김석의 스승, 일실사효 현판 기
이복원 - 김주諡狀 찬, 우암집序
이돈우 - 김주 신도비 찬, 김사선의 외손자
★오희상 - 김현대 스승
★이경보 - 김현대 誌 찬
★이항로 - 김호문 스승
★신기선 - 김호문 묘갈 찬
●조현명 - 장인 김성유 행장 찬, 김희 묘갈 찬
★조현명(趙顯命)
1690(숙종 16)∼1752(영조 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 도사(都事) 인수(仁壽)의 아들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가 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721년(경종 1) 연잉군(延#잉03君: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하여 있던 왕세제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 지평·교리를 역임하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으며, 이후 대사헌·도승지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영남의 남인을 무마하고 기민(饑民)의 구제에 진력하였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뒤 1734년 공조참판이 되면서부터 어영대장·부제학, 이조·병조·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740년 경신처분 직후 왕의 특별배려로 우의정에 발탁되고 뒤이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이때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군액(軍額) 및 군역부담자 실제수의 파악에 착수, 이를 1748년 《양역실총 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제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조문명·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영조조 전반기의 완론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소탕평을 주도하였던 정치가이면서, 한편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환수, 결포제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진신(縉紳) 사이에 교유가 넓었는데 김재로(金在魯)·송인영·박문수(朴文秀) 등과 특히 친밀하였다.
저서로는 《귀록집》이 있고, 《해동가요》에 시조 1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黨議通略, 韓國黨爭史(成樂熏, 韓國文化史大系 Ⅱ,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75)
歸鹿趙顯命硏究(鄭萬祚, 韓國學論叢 8, 國民大學校, 1985). 〈鄭萬祚〉
●조명구 - 김희 묘갈 서
●조종저 - 장인 김태기 묘표 찬
★조종저(趙宗著)
1631(인조 9)∼1690(숙종 1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취숙(聚叔), 호는 간재(艮齋)·남악(南岳).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중려(重呂)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신경진(申景珍)의 딸이다.
1660년(현종 1)성균관에 입학, 문명을 날렸으며, 그곳 유생들을 대표하여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등의 상소문을 찬(撰)하였다.
1667년에는 제주도에 표착한 중국인 95명을 청나라에 압송하는 문제로 조정에서 논의가 일자 압송을 반대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1669년 동몽교관이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귀향, 1672년 다시 복직하였다가 그해 겨울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갔다.
그뒤 성균관전적에 승진하고, 이어 병조좌랑·시강원사서 등을 거쳐 문학 겸 지제교에 승진하였으며,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을 지낸 뒤, 1675년(숙종 1)병조정랑이 되었다가 그해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 서인이 실각하자 면직되었다.
1677년 성균관사예에 임명되고, 이어 헌납이 되었으나 벼슬을 사직, 1680년 종부시정에 임명되었으며, 성균관사성 등을 거쳐 1686년 회양부사가 되어 때마침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의 구휼(救恤)에 힘쓰는 등 치적을 쌓았다.
1689년 통정대부에 승자(陞資)되는 등 조정에서 포상이 내려졌으나, 이이·성혼이 문묘에서 출향(黜享)되자 병을 핑계로 등청하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나 장유(張維)·이식(李植)에 비유되었다.
또한, 역사에 밝았고, 천문·역수·의약에도 통달하였다.
저서로 《남악집 南岳集》·《간재신사 艮齋新과》 등이 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李民植〉
●조상우 - 김태기 묘표 서
★조상우(趙相愚)
1640(인조 18)∼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자직(子直), 호는 동강(東岡). 예조판서 형(珩)의 아들이다.
★이경석(李景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57년(효종 8)사마시에 합격한 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 되었다.
1672년(현종 13)익위사세마에 임명되었으며, 숙종이 즉위한 뒤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가 되었다가 연천현감으로 나갔으나, 1675년(숙종 1)송준길이 추삭될 때 동문 홍득우(洪得禹) 등과 반대하는 소를 올려 남평(南平)에 유배당한 뒤 이듬해 풀려났다. 호조좌랑을 거쳐 태인현감으로 나갔다.
168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684년 지평이 되었으나, 집의 이굉(李宏)을 논죄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체직되었다.
그뒤 훈국도감종사관·서학교수·병조정랑이 되고, 호남에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어서는 궁방에 대한 절수(折受)를 취소하고 호서의 첩가미(帖價米)를 탕감할 것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의정부사인을 거쳐 부응교가 되어서는 외척을 견제하다 처벌받은 홍치중(洪致中)을 두호하고 경연을 자주 열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평안감사 윤계(尹#계04)와 황해감사 임규(任奎)의 잘못을 공격하였으나, 태인현감 때의 잘못을 지적당하여 양주 쌍수역(雙樹驛)에 유배되었다가 대신들의 두둔으로 풀려났다.
1689년 이후 사도시정·홍주목사·사성·종부시정·좌통례·서산군수 등을 역임하고, 1694년 강계부사가 되었으며, 그해의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남구만(南九萬)의 천거를 받아 특명으로 내직에 들어와 예조참의·대사간·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당시 유배자들을 석방하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옥사의 심리를 빨리하고 군포로 인한 침학행위를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대사성·부제학 겸 비변사부제조를 거쳐 개성유수에 발탁되었으나 가마에 대한 금령을 어겨 추삭되었다가, 대사간이 되어 양전을 바로 하고 군역을 균등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도승지·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부제학이 되어서는 궁궐생활의 절검을 강조하고 의관을 보내 민간의 환자를 치료할 것 등을 건의하였으며, 단종의 부묘에 왕이 친림하는 것에 반대하다가 파직당하였으나 홍문관의 건의로 용서받았다.
경기감사에 임명되어 민폐와 변통책을 올렸으며, 1700년 이조참판이 되어서는 서북지방의 인재등용책을 건의하였다. 형조와 예조의 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후궁 장씨(張氏)를 사사할 때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우참찬·대사헌·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이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가던 중 예조판서·좌부빈객이 되었고, 좌참찬으로 옮겼다. 한때 오도일(吳道一)을 두둔한다는 이유로 영의정 신완(申琓)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우빈객·한성부판윤·비변사당상을 거쳐 1706년 판의금부사·병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1708년까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70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듬해 내의원제조를 맡고 있을 때 최석정(崔錫鼎)·서종태(徐宗泰)의 분란에 휩쓸려 파직당하였다. 이어 유득일(兪得一)·정호(鄭澔)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직당하였다가 풀려나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1711년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어 호포법이 논의될 때 명분을 유지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뜻에서 사대부에 대한 군포징수를 반대하였다.
정승으로 있을 때 당론의 폐단을 없애려고 노력하였으며, 1717년 세자 대리청정의 명령이 내렸을 때에는 판중추부사로 있으면서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등 남구만·최석정 등과 함께 온건한 소론으로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또한, 오랜 기간 관직에 있으면서 부세제도·형사제도·예론을 비롯한 국정 전반에 대한 건의를 많이 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옥책문을 쓰는 데 선발되었고, 충현서원(忠賢書院)의 사적비 등을 남겼다. 남평의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吳洙彰〉
●오희상 - 김현대 스승
★오희상(吳熙常)
1763(영조 39)∼1833(순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 대제학 재순(載純)의 아들이다. 예조판서 재소(載紹)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형 윤상(允常)에게 수학, 학문의 방법은 자수자득(自修自得)을 주로 하여 성리학의 오의(奧義)에 정통하였다.
1800년(정조 24)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장릉참봉(長陵參奉)·돈녕부참봉·한성부주부·황해도도사·사어(司禦) 등을 지낸 뒤, 1818년(순조 18) 경연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광주(廣州)의 징악산(徵嶽山)에 은거하였다.
이 동안 지평·장령·집의·승지 및 이조·형조·공조의 참의, 1829년 세손부(世孫傅), 1832년 찬선(贊善)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양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주리(主理)·주기(主氣)의 양설에 대해서는 주리설을 옹호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독서수기 讀書隨記》·《노주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梅山集,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鄭德基〉
●이경보 - 김현대 誌 찬
●이항로 - 김호문 스승
★이항로(李恒老)
1792(정조 16)∼1868(고종 5).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벽진(碧珍). 초명은 광로(光老)였으나 철종 사친(私親)의 이름을 피하여 개명하였다.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경기도 포천출신.
회장(晦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의집(義集)의 딸이다.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 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 天皇地皇辨〉을 지었다.
12세 때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 書傳》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반시(泮試: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 뒤 당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울의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 등을 찾아가 학우의 관계를 맺고, 25∼26세 때 어버이와 사별한 뒤 학문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세속을 피하여 쌍계사·고달사 등의 사찰을 옮겨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 朱子大全》 등 성리학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뒤 그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져 1840년(헌종 6) 휘경원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그뒤에도 지방수령 등에 제수되었지만 고사하고 향리에서 강학을 위하여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수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에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64년(고종 1) 당시의 권력자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전라도사·지평·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거절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그뒤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비정(秕政)을 비판한 병인상소를 올리고 만동묘(萬東廟)의 재건을 상소한 바도 있는데, 이 상소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당한 뒤 낙향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리철학(主理哲學)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을 재건한 조선조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주리철학은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을 주장한 중국의 나흠순(羅欽順)일파의 우주론을 반대하고 이(理)와 기(氣)를 엄격히 구별하는 동시에 그것을 차등적으로 인식하였다.
즉,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져 천하가 편안할 것이나, 만일 반대로 기가 주가 되고 이가 버금이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져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라 하고 이·기를 차등적으로 보았다.
또, 주리론에 기초를 둔 심전설(心專說), 즉 심즉리(心卽理) 심즉기(心卽氣)설을 반대하고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존기비(理尊氣卑)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중교가 비판하였듯이 이리단심(以理斷心)의 이론이라 할 수 있으니 그의 심설은 심전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심전주리론에 그 기초가 깔려 있다. 따라서, 그의 심전주리론은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윤리와 아울러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처럼 한다는 애국사상과 자주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조 말기의 민족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고, 나아가서 민족운동의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승화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화동역사합편강목 華東歷史合編綱目》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 朱子大全箚疑輯補》, 《벽계아언 檗溪雅言》 12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華西集, 朝鮮儒敎淵源(張志淵, 海東書館, 1922)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韓國哲學史(劉明鍾, 韓明文化社, 1963)
韓末의 民族思想(洪淳昶, 探求堂, 1975)
李恒老(申奭鎬, 朝鮮의 儒學者 8人, 新丘文化社, 1974)
李恒老의 衛正斥邪思想(洪淳昶, 讀書新聞 270, 1976). 〈洪淳昶〉
●신기선 - 김호문 묘갈 찬
★신기선(申箕善)
1851(철종 2)∼1909.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언여(言汝), 호는 양원(陽園)·노봉(蘆峰). 희조(羲朝)의 아들이다.
1877년(고종 14) 대과별시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1878년 사간원정언, 1879년 홍문관부교리, 1881년 시강원문학 등을 지냈다.
1882년 통리기무아문주사를 거쳐, 다시 시강원문학이 되어 기무처(機務處)에 나가 수시로 영의정과 국정을 의논하였고, 관제개혁 때 통리내무아문참의가 되었다.
개화당 인물들과 밀접한 교류관계를 가지고 있어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당내각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1886년 전라도 여도(呂島)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94년 갑오경장으로 풀려나 호조참판을 거쳐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의 공무대신이 되었다.
1895년 군부대신에 임명되면서 육군부장(陸軍副將)이 되었고, 중추원부의장을 거쳤다.
1896년 항일의병항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지방에 내려가 선유활동을 하였고, 학부대신이 된 뒤에 단발, 양복착용, 국문과 태양력 사용, 청나라에 대한 조공폐지 등을 반대하다 독립협회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얼마 뒤 사직하였다.
1897년 다시 중추원부의장을 거쳤으며, 1898년 법부대신이 되었는데 나륙법(拏戮法)과 대역참형(大逆斬刑)을 복구하려다 다시 독립협회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고발, 탄핵되어 면직되었으나, 이듬해 1899년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뒤 의정부참정, 1900년에 궁내부특진관·중추원의장, 1901년에 비서원경(#비58書院卿)·법부대신·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1902년에 군부대신 등을 거친 뒤 1903년에 철도원총재가 되었으며, 1904년 보안회 회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의정부참정을 거쳐 1905년 함경도관찰사, 1906년 홍문관학사, 1907년 장례원경(掌禮院卿)·수학원장(修學院長) 등을 지냈고, 같은해에 민병석(閔丙奭)·이용직(李容稙) 등과 함께 유도(儒道)로써 체(體)를 삼고 신학문으로 용(用)을 삼아 신구사상(新舊思想)의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학회를 창립, 회장이 되었다.
저서로는 《유학경위 儒學經緯》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大韓帝國官員履歷書, 大韓季年史, 韓國圖書解題(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71)
申箕善의 東道西器論硏究(權五榮, 淸溪史學 1, 1984). 〈趙恒來〉
▣ 솔내 - 이항노선생은 경기도 양근(현 양평 서종면 노문리)에 생가가 있습니다. 복원되어 있지요.
▣ 김항용 -
▣ 김용주 - 감사합니다.
▣ 김은회 -
▣ 김태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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