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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전서공파 소개자료 03 ---益精 손자 壽寧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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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12 17:23 조회1,6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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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한국학

★김수령(金壽寧)

1436(세종 18)∼1473(성종 4).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이수(#이96#수04), 호는 소양당(素養堂).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던 ★숙(潚)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안숭선(安崇善)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집현전수찬에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헌납·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인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1463년 집의에 오르고 그뒤 동부승지, 1465년에는 좌승지를 거쳤다.

1468년 호조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 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즉위년) 공조참의가 되고 이어 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47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직시에는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명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사재(史才)가 있어서 1458년에는 《국조보감 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大東野乘,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李根洙〉







■ 조선 문과방목



★김수녕(金壽寧)

단종(端宗)1년(1453년), 식년시(式年試) 을과1(乙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36년, 병진

자(字)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문도,좌리공신/복창군(文悼,佐理功臣/福昌君)

>>> 가족사항

부(父) ★김숙(金潚)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익정(金益精)

증조부(曾祖父) ★김휴(金休)

외조부(外祖父) ★안숭선(安崇善)

처부(妻父) ★혜령군 이지(惠寧君 李祉)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가정대부(嘉靖大夫)

관직(官職) 호당&(湖堂&), 호조/참판&(戶曹/參判&)







■ 작성자 :김태영 작성일 : 2003/12/24 09:06 (from:61.40.37.110) 조회 : 49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제8권 (8)



[寧] 편안하다. 차리리.

[김수녕(金壽寧)]: 자는 이수, 본관은 안동, 참판(參判) 김익정(金益精)의 손자이다. 계유년(癸酉年1453)에 18세의 나이로 장원급제 하였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 하였다. 벼슬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문장이 빼어나고 노건(老健)했는데 상소문(上疏文)을 더욱 잘 지었다. 어느날 저녁 술을 많이 마시고 죽었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 작성자 :이왕섭 작성일 : 2003/03/29 12:19 (from:218.237.120.71) 조회 : 100

김수녕(金壽寧)과 이수남(李壽男)의 졸기



1473년(성종 04) 07월 03일(임진) 김수녕(金壽寧)의 졸기(卒記)

복창군(福昌君) 김수녕(金壽寧)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수녕은 자(字)가 이수(이臾)이고, 호(號)가 양소당(養素堂)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절충 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의 아들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왔으며, 7세(歲)에 속문(屬文)에 능하니 당시에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외조부(外祖父)인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다른 날 마땅히 세상에 크게 날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년)인 나이 18세가 되던 해 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가을에 문과(文科)에 제1인으로 뽑혀서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을 제수(除授)받았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역임하였다. 당시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가 함길도(咸吉道)·평안도(平安道)·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충청도(忠淸道) 5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어서,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천순(天順) 신사년(1461년)에 한명회가 그를 보내어 변방(邊方)의 일을 아뢰었는데, 임금을 면대하여 말하는 것이 심히 자세하므로, 세조(世祖)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비록 천리(千里)를 격(隔)하였지만 한명회와 더불어 면대해 말하는 것과 같도다.”

하고, 특별히 1자급(資級)을 더하였다. 임오년(1462년)에 세조(世祖)가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서 예문관(藝文館)의 여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옛날의 제왕(帝王)의 득실(得失)을 논란하게 하였는데, 김수녕이 경사(經史)를 증거하면서 시비(是非)를 변석(辨析)하니 문득 말할 때마다 임금이 감동하여 들었고, 또 명하여 자급을 더하게 하였으며,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으나 일 때문에 파면당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년)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 병술년(1466년)에 다시 좌승지(左承旨)로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임명되어서 형조 참의·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무자년(1468년)에 관계(官階)가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경인년(1470년)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다. 세조(世祖)와 예종(睿宗)의 두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참찬(參撰)하였는데, 당시 좋은 사재(史才)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신묘년(1471년)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복창군(福昌君)에 봉(封)해져서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다가 이 해에 다시 복창군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38세였다. 문도(文悼)라고 시호(諡號)하니 두루 묻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중년(中年)에 일찍이 죽은 것을 도(悼)라고 한다. 김수녕은 천자(天資)가 명민(明敏)하고 학문이 해박(該博)하며, 문장(文章)을 짓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고 간고(簡古)하며, 필(筆)을 잡으면 바로 성취하여 전인(前人)의 말을 답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글로 써 둔 것이 없어서, 이 때문에 시문(詩文)으로서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적다. 바깥으로는 온화(溫和)하고 안으로는 강직(剛直)하여서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달관(達官)이나 귀요(貴要)라 하더라도 종일토록 마주 대(對)하여 일찍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할 수가 없었으나, 만약 그 적당한 사람일 때에는 비록 위포(韋布)의 선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신발을 끌고 나아가 맞아들였다.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항상 녹(祿)만을 받아서 먹었는데, 남의 집을 빌어 살면서도 종신토록 처세함이 둥글고 넓었으며, 작은 연고를 가슴에 끼어두지 아니하였다. 다만 익살이 많아 큰 소리를 치니 군자(君子)의 근묵(謹默)하는 위용(偉容)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그의 단점으로 여기었다.







■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07/10 22:23 (from:218.147.71.140) 조회 : 72

김수녕선조님의시



●中國使臣和談 (중국사신화담) / 중국사신과 화담

海天飛馹獨登樓 (해천비일독등루) / 바닷가 높은 루(樓)에 홀로 오르니

豪氣元龍洗不牧 (호기원용세부목) / 장한기운 널리널리 펼쳐있구나

漠漠長空迷去鳥 (막막장공미거조) / 나는새 하늘가로 사라져 가고

深深芽草沒行牛 (심심아초몰행우) / 가는소 풀사이로 자취 감추네

分溪白石難聲急 (분계백석난성급) / 바위는 물을 갈라 여울이 울고

夾路靑山樹影稠 (협로청산수영조) / 비탈길 산을 끼고 숲속으로 드네

好雨己隨車馬至 (호우기수차마지) / 비 산뜻 개이면서 찾는이 있어

陂塘五月欲先秋 (피당오월욕선추) / 못가에 낚대드니 시원하구나



역대명시집







■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07/26 10:46 (from:218.147.71.140) 조회 : 57

김수녕 선조님의 시



아득한 마운령(磨雲嶺)의 가장 꼭대기를

비틀 거리며 가는 늙은말 안장조차 못이기네,

새 만이 통행하는 길이 삼천리나 된다고 전날 들었더니

이제 양의 창자같은 백여덟 굽이를 오르네.

자는 안개 가벼운 산아지랑이에 옷은 반이나 젖었고

매달린 언덕위 절벽길은 두눈이 차가웁네.

그대에게 말하노니 동쪽으로 가는일을 이야기 하지말라

귀밑 털이 서녘바람에 또 얼룩지려 한다.

<●함경도 단천군 마운령에서>



누런구름은 국경에 가득하여

나그네의 근심을 자아내는데.

성 아래에 한줄기의 강물이 길게 흐르네.

구슬픈 오랑캐의 피리소리 행여나

나그네 귓전을 스치지 말아다오

소리마다 국경 여행을 괴롭혀 주느니.

<●함경도 경흥 아오지성(阿吾地城)에서>



호기(豪氣)는 백척(尺)의 다락 이라고 들었을뿐

나는듯한 누각이 시원스런 이 바닷가에 있을줄을

어찌 알았으리요.

십천두(十千斗)의 술을 가지고 진왕(陳王)의

즐거움을 하려 하지 않으니

한번 웃는 월녀(越女)의 만류함에 관계없는 것일세.

대지는 찌는듯 더운데 바람은 고요하고

하늘은 감색(紺色)으로 푸른데 불이 흘러 내리는듯 하네.

당시의 더위먹어 죽은사람을

응당 헤아릴수 없었을것인데

이같이 시원하게 노는것을 기뻐하노라.

<●함경도 문천군 절문루(節文樓)에서>



천제가 맑은 시냇물을 보내어 땅에서 솟아나오니

성한 아름다운 기운이 신주를 싸고있네.

순(舜)임금의 옛날 밭갈고 고기잡던 그자취는

모두 이 용흥강과 성력산(聖歷山)머리에 있구나.

<●함경도 영흥 횡강(橫江)에서>







■작성자 :郡/김태영 작성일 : 2002/08/23 19:06 (from:61.40.41.61) 조회 : 84

선조님의 시소개 (2)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엇비슷한 고목을 앞 여울에 가로질러서

자국마다 서늘한 마음 몇번이나 놀랬던가,

평지에 이는 풍파 아무도 모르면서

다리에 와서는 두렵게 보누나.

삼척도호부 <김수녕>



●평창군(平昌郡)

빨리 달리는 역마(驛馬)를 타고 머물겨를 없어

바로 산그늘이 넓고 먼곳에 이르렀다.

사마천 같이 멀리 유람함은 아직 그치지 않았고

진등(陳登)같은 호기는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노라.

시름을 씻는데 병에 술이 없을수 있으랴

기이한것을 구하는데 도리어 상자에 글이 있구나,

이번 유람의 기절(奇絶)함이 평생에 으뜸되니

좀먹은 책속의 좀벌래 같은 생활이 우습기만 하여라.

평창군 <김수녕>



동국여지승람에서 옮김.





●이요루(二樂樓)

홰나무는 천년이나된 고을에 늙었고

꽃은 백척 누대에 둘렀네.

못이 열리니 태화(太華)에 이어진듯,

산이 가까우니 나부산(羅浮山)을 껴안은듯,

이세상에 선경(仙境)이야 있으랴.

하늘 서쪽에 좋은 고을이 있네.

공부(工部:두보)의 시흥 참을수 없어

때때로 낭만(浪漫)한 놀이를 한다네.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김수녕>





●강선루(江仙樓)

우연히 송양(松讓)을 지나다 꽃다운 샘에 목욕하고

머리 말리며 흘골산(紇骨山) 앞으로 돌아오네.

한 물은 뜰을 따라 물결이 다시 고요한데,

두어 봉우리는 문을 헤치고 들어와 푸르게 잇닿았네,

안개가 개인 산시(山市)의 저물려는 햇빛에 안개가 맑고,

비가 내릴려는 때에 바람은 강루(江樓)에 가득하네.

재주없어 황학루(黃鶴樓)의 글귀를 이루지 못하니

다만 앵무주(鸚鵡洲)에 풀만 처량하네.

평안도 성천도호부 <김수녕>





●덕원(德源)

반도(蟠桃)가 열매를 맺으려면 천년이 걸리는데,

선리(仙李)의 뿌리가 서리는데 8백년이 걸렸다네.

아름답다, 이 덕원은 하늘이 만드신 땅이로다.

면면(綿綿)하게 뻗은 오이덩굴 한악장(樂章) 왕업(王業)의

아름다움을 찬송 하였네.

함경도 덕원도호부 <김수녕>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 작성자 :김은회 작성일 : 2003/10/22 10:08 (from:211.49.113.13) 조회 : 38



●차문천판상시운(次文川板上詩韻)-김수녕(金壽寧)

盛漢當千載(성한당천재) : 한 나라는 천 년을 갔고

匈奴値百年(흉노치백년) : 흉노는 그 나라가 백년을 갔었노라

掃?長白嶺(소분장백령) : 요나라 재앙을 장백산 고개에서 쓸어버리고

歇馬黑龍川(헐마흑룡천) : 말은 흑룡강 물 가에서 쉬게 하리라

聖德元和上(성덕원화상) : 성덕은 당나라 헌종인 원호의 위 시대이요

戎功大雅前(융공대아전) : 훈공은 시경 “대아”편의 앞이도다

燕然須勒頌(연연수륵송) : 두현이 연연산에 공을 기록하듯 기록하여

留取後來傳(류취후래전) : 모아서 후세에 전하게 하리로다



●차삼척죽서루와수목교(次三陟竹西樓臥水木嬌)-김수녕(金壽寧)

?牙古木截前灘(사아고목절전탄) : 늙은 나무로 베어 떼 만들어 앞 여울에 걸쳤니

步步寒心幾駭瀾(보보한심기해란) : 걸음걸음 조심하며 몇 번이나 물결에 놀랐던가

平地風波人不識(평지풍파인불식) : 평지에도 풍파 있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到橋猶作畏途看(도교유작외도간) : 이 다리에 이르러 도리어 두려운 길이라 여긴다오









■ 작성자 :김태서 작성일 : 2003/06/09 19:52 (from:61.98.21.220) 조회 : 49

용인 신정 기(龍仁新亭記)



용인(龍仁)은 작은 고을이나 서울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밤낮 없이 폭주하는 대소의 빈려(賓旅)가 이곳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으니, 대개 남ㆍ북의 인후(咽喉)라 하겠다. 옛 관원(館院)이 적어서 겨우 하룻밤을 지낼 만하며, 한더위를 당하면 막히고 답답하여 손이 오더라도 회포를 풀 길이 없어 번열(煩熱)에 허덕이니, 병으로 여긴 지가 오래였다. 천순(天順) 4년 겨울에 박군(朴君)이 와서 이 고을을 맡게 되자, 과세(課稅)에 너그럽고 정사에 민첩하여 온갖 폐단이 다 없어지니, 서리(胥吏)는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리워하였다. 하루는 군이 서리와 상의하기를, “내가 재목을 모아 정자를 지어 손님의 납량(納凉)할 곳을 만들고자 하는데 옳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이미 군의 정사를 덕으로 여기는 처지라 모두 하는 말이, “원컨대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장인(匠人)은 정신을 가다듬고 역사하는 자는 힘을 부지런히 하여, 새벽과 밤으로 일을 서둘러서 한 달 안에 낙성을 고하게 되었다. 시작할 때에 백성은 정자를 짓는 줄도 몰랐다가 완성된 뒤에 바라보며 말하기를, “우리 원님은 옛날의 이른바 신명(神明)이 아닌가. 정자를 지었는데도 어찌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을까.” 하며, 서로 우러러 보고 감탄하며 그 새로 지은 것을 경축하였다. 요즘 세상의 수령들을 보면 도취한 꿈속에서 날을 보내며, 관청을 여관집 보듯이 하여 기울어진 뒤에야 기둥을 바꾸고 비가 샌 뒤에야 수선하며, 심한 자는 기와 하나도 갈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나는 백성을 아껴서 그렇다.” 하며, 풀 한 포기도 제거하지 아니하고서, “내 뜰에는 송사가 없어서 그렇다.” 하니, 관사의 퇴락은 항상 이러한 무리에게 기인하는 것이다. 어찌 능히 일에 분발하여 처음부터 튼튼히 하는 자가 있으며, 또 어찌 능히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게 하고 이와 같이 짓는 자가 있으리요. 내가 일찍이 남쪽에 노닐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용인(龍仁)을 지나는데, 박군이 나에게 붓을 주며 기(記)를 청하므로 나는 이미 이와 같이 졸하게 적었었다. 군은 말하기를, “정자가 기(記)를 얻었으니 다행이나, 명칭이 아직 없으니 어찌하랴.”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명칭이 있어야 의당 옳겠지만, 명칭이 없더라도 또한 불가할 것은 없다. 용인 고을에 그대 같은 원이 없었으면 정자가 세워질 까닭이 없고, 정자가 세워지지 않았으면 명칭이 어디서 나오리요. 명칭이 없는 것으로써 명칭을 하는 것도 역시 좋은 명칭이 아닌가 싶다.” 하였다. 군이 나에게 간청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므로 인하여 용인 백성이 우러러보며 새로 지어진 것을 경축하는 뜻을 채택하여 이름을 신정(新亭)이라 하자고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이르지 않았던가. “신(新)이라 이른 것은 옛날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또한 처음부터 군자가 중히 여기는 의(義)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박군의 이름은 거명(居明)이요, 자는 회보(晦父)요,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출전;동문선









■ 작성자 :김주회 작성일 : 2002/12/12 14:48 (from:211.57.153.114) 조회 : 62

김종직과 김수녕 (원문 검색)



¤ 국역 점필재집 ¤ 점필재집 시집 ¤ 시집 제1권

▣ 합천 동헌에 있는 서 참판과 김 승지의 운을 차하다

합천 동헌에 있는 서 참판 【거정】 과 김 승지 【수녕】 의 운을 차하다[次陜川東軒徐參判 【居正】 金承旨 【 壽寧 】 韻] 【2수】



지루한 세월을 말 위에서 보내노라니 荏苒光陰馬上消

장안에 머리 돌리매 더욱 멀기만 해라 長安回首轉遙遙

눈에 가득한 봄바람은 이별을 슬프게 하고 春風滿眼堪傷別

창중에 뻗친 살기는 문득 높아짐을 알겠네 劍氣橫空?覺高

이 문지르는 청담 9) 은 달뜬 밤이 좋겠거니와 ?蝨淸談宜月夕

게 다리 쥔 미친 흥 10) 은 꽃핀 아침을 저버렸네 持?狂興負花朝

징심루 아래 흐르는 한계의 물에 澄心樓下寒溪水

술취해 난간 치니 귀밑머리 비치는구려 醉拍欄干燭?毛



남쪽에 온 정황은 몹시도 느슨하여라 南來情況苦騰騰

풍광을 관령하는 것도 잠시 뿐이로세 管領風光且暫能

한가한 놀이를 위해 항상 신에 밀을 바르고 11) ?爲優游常蠟?

말라빠진 환상 혐의해 문득 중을 멀리하네 還嫌枯幻便疎僧

취중의 별천지는 반드시 끝까지 찾는데 醉鄕日月須窮討

속세의 공명은 매양 만나기 어려워라 塵世功名每錯?

쓸모없는 이 사람을 그 누가 채용해주랴 跌宕散人誰省錄

등한히 동으로 갔다 다시 서로 오르네 等閑東度復西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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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9] 진(晉) 나라 때 청담으로 이름이 높던 왕맹(王猛)이 환온(桓溫)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방약무인한 태도로 옷속의 이를 문지르면서 당세(當世)의 일을 담론한 데서 온 말이다. ☞



[註 10] 진(晉) 나라 때 필탁(畢卓)이 일찍이 말하기를 “술 수백 섬을 배에 가득 싣고 사시(四時)의 감미(甘味)를 비치하고서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 왼손에는 게의 앞다리를 쥐고 주선(酒船) 안에 떠서 노닌다면 일생을 마치기에 만족하겠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註 11] 진(晉) 나라 때 완부(阮孚)가 나막신을 좋아하여 항상 신에다 밀을 발라 광택(光澤)을 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四十九》 ☞









▣ 김윤만 - 일목요연한 정리에 수고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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