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20년 김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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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4-02-15 20:45 조회1,500회 댓글0건본문
【세종20년 9월25일】
이날에 이르러 정사를 마치고 제신들이 다 물러가는데, 유독 김돈만을 머물러 있게 하고는 하교하기를, “내가 친히 태종께 듣자오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인년 8월에 변(變)이 발생하던 날 이방석(李芳碩) 등이 교지를 사칭하고 김중귀(金重貴)를 시켜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들어오도록 독촉하였는데, 내가 무안군(撫安君)을 불러 말하기를, 「나를 따라 오너라.」 하였더니, 무안군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머뭇머뭇하다가 대내
(大內)로 들어가므로, 나는 익안군(益安君) 등 몇 사람과 더불어 서문으로 빠져 나와버렸다.’고 하셨는데, 태종의 심중은 아마 무안군을 보전하시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들으니, 경진년 2월 변(變)에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장차 무슨 낯으로 군병을 내어 대응(對應)한단 말이냐.’ 하셨는데,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와 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등이 울며 ‘그만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하고, 청하여, 이에 마지못하여 군사를 내었다는 것이다. 태종 실록은 내가 볼 수 없는 것이고, 춘추관으로 하여금 태조와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실록을 대내로 들여오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실록을 보고는 도로 김돈에게 내어주며 말하기를, “경이 무인·경진년의 일에 관한 기사를 뽑아서 기록하여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김돈이 이를 발취하여 기록하여 바쳤던 바, 임금이 열어 보지도 않고 도로 김돈에게 주며 말하기를, “실록에 실려 있는 것이 너무 간략하여, 내가 들은 일들도 역시 많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록은 다시 고칠 수 없는 것이고, 비문만은 마땅히 소상하게 고쳐 써야 할 것이다.” 하고, 즉시 김돈으로 하여금 신개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신개는 말하기를, “신이 황희(黃喜)에게 듣사온즉, 무인의 변을 태종께서 먼저 아시고 단기(單騎)로서 동북 방면으로 피해 들어가시려고 하시는 것을 조영무(趙英茂)가 태종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면서 만류하였다고 하옵니다. 사관(史官)의 본초(本草) 기사는 꽤 상세하게 되어 있는 것을 실록을 편수하던 자들이 이를 간략하게 만들었다고 하오니, 실록도 역시 고쳐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김돈에게 이르기를, “신개는 이미 《춘추(春秋)》의 필법을 알고 있다. 이제 사관의 본초(本草)를 발취 기록해 올리게 하여, 그 본초의 기록이 과연 상세하다면 실록을 다시 고쳐 엮는 것이 옳을 것도 같다. 이는 큰 일이므로 두 의정(議政)도 역시 알아야 할 것이니, 네가 두 의정을 보고 이를 의논하여 보라.” 하였다. 이에 김돈이 두 의정에게 의논하니, 황희는 말하기를, “무인·경진년의 일을 신이 비록 목격하지는 못하였사오나, 신이 들은 바만 해도 실록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이 또한 많았습니다. 사초가 이미 자세히 되어 있다면 실록도 또한 고치는 것이 옳을 것이나, 만약 사초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면 실록은 진실로 고칠 수 없사옵고, 비문은 마땅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하고, 허조도 역시 황희의 의논과 같았다. 수일 후에 신개·권제(權?) 등이 사관의 본초(本草)를 발취해서 기록하여 바쳤는데, 역시 상세하지 않았다. 다만 무인년의 변이 발생하던 저녁에 여러 왕자가 서문으로 나갈 때, 혹은 다른 사람의 말을 빼앗아 타고 돌아갔다고 되었고, 정안군(靖安君)이 무안군(撫安君)을 보전하려고 하였다는 등의 말은 실록에 없는 사실이었다. 권제가 말하기를, “전에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전흥(田興)에게 듣사온즉, ‘태종께서 흥안군(興安君)의 죽음을 듣고 놀라고 애도하여 말하기를, 「살려도 괜찮은데, 죽일 필요까지는 없는 것을.」 하고, 즉시 전흥에게 명하여 시체를 거두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대개 전흥은 태종을 시종(侍從)하던 자입니다. 전흥에게 이를 물으실 것 같으면, 혹은 그 대개(大죏)를 알 수 있을 듯도 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김돈으로 하여금 전흥에게 이를 물으니, 전흥이 말하기를, “신이 태종의 도진무(道鎭撫)가 되어 항상 태종을 수종하였사온데, 태종께서 때로는 익안(益安)·회안(懷安)·상당(上黨) 등 여러 군들과 더불어 어두운 골방에서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하셨는데, 신은 속으로 무슨 일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 8월 25일 저녁에 태종께서 감순(監巡)를 끝마치고 궐내로 나아가서 직소(直所)로 들어가시니, 익안·회안·상당 등의 여러 군(君)들이 이미 먼저 나아가 있었는데, 때는 아직 인정(人定)의 종(鐘)이 울리지 않았었습니다. 태종께서 신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감순청(監巡廳)으로 돌아가서 순관(巡官)을 살피도록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중관(中官)이 나와서 말하기를, ‘성상께서 병환이 위독하시니, 여러 왕자들은 급히 입궁(入宮)하도록 하십시요,’라고 하였습니다.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형님들은 먼저 들어가 보시지요. 나는 복통(腹痛)이 나서 변소에 갔다가 온 뒤에 곧 들어가겠습니다.’ 하시고, 즉시 몰래 빠져 나와 본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신이 감순청에 있으려니까 초경(初更)이 이미 다하였는데, 태종께서 10여 인의 기병을 거느리시고 광화문(光化門)을 지나시기에, 신이 감순청에서 나와 말 앞에서 뵙고 말씀드리기를, ‘신도 따를까요.’ 하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곳에 있으면서 행순(行巡)하는 것을 살피라.’고 하시고는 태종께서는 동문(東門) 밖 남은(南誾)의 첩의 집에 이르시와, 그 이웃집에 불을 지르시어, 밝기가 마치 대낮과 같았으며,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 등을 목 베이셨는데. 이무(李茂)가 나오며 말하기를, ‘나는 이무란 사람이요.’ 하니, 명하시어 놓아주셨습니다. 이무는 그 앞서 그 중간에서 확실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까닭입니다. 남은은 도망하다가 체포되어 순군옥(巡軍獄)으로 송치되었습니다. 태종께서는 감순청으로 돌아오셨는데, 밤은 아직 3고(鼓)가 울리지 않았었습니다. 이리하여 익안·회안·상당 등 여러 군들이 꾸역꾸역 모여와 군세가 점차 떨치게 되었습니다. 유만수(柳萬殊)가 그 아들 유원지(柳原之)를 데리고 갑옷을 입고 말을 달려와서, 태종을 뵙고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말하기를, ‘이게 무슨 일이오.’라고 하니, 태종께서, ‘잡아내라.’고 말씀하시자, 만수는, ‘영공(令公)이 어찌 내게 이같이 핍박한단 말이요.’ 하는 것을, 군사들이 서로 다투어 그 머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이때 친군 도진무(親軍都鎭撫) 조온(趙溫)·박위(朴츂) 등이 도진무청(都鎭撫廳)에 입직하고 있었는데, 태종께서 사람을 시켜 조온과 박위 등을 부르시니, 조온은 명을 듣고 즉시 휘하의 갑사(甲士)와 패두(牌頭) 등을 인솔하고 광화문으로 나와 말 앞에 와서 뵙고, 박위는 즉시 명에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태종께서 조온에게 명하사 이로 하여금 입직한 갑사들을 다 데리고 나오게 하시니, 조온은 즉시 패두들을 시켜서 도로 궁궐에 들어가서 갑사를 다 데리고 나왔으며, 얼마 아니 되어서 바로 근정전 이남의 갑사들은 모두 뛰어나와서 가담하여 군세는 크게 성세를 이루게 되었고, 좌정승 조준(趙浚)·우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이 태종의 명을 받고 달려와서, 형조(刑曹)의 문밖에 회좌(會坐)하고, 무슨 일이든지 그 시행하는 바는 다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로 하여금 이를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공정왕(恭靖王)께서는 임금님의 병환이 위독하시어 소격전(昭格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내고 계셨는데, 태종께서 사람을 보내어 불러 오게 하셨으나, 공정왕께서는 이미 변을 들으시고는 도망하고 없었으므로 태종께서 사람을 시켜 널리 찾으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궁 안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어제 밤에 궁 안에서는 정안군이 도망해 나갔다는 말을 듣고, 흥안군이 놀라면서 이르기를, 「손이 미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습니다.’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26일 사시(巳時)에 세자(世子)가 광화문으로 나왔사온데, 장철(張哲) 등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옹위(擁衛)하게 하였으나, 남대문 밖에 이르러서 액사(縊死)를 당하였사오며, 오후에 무안군이 광화문으로 나오는 것을 명하사 통진(通津)으로 귀양보냈고, 해질 무렵에 흥안군 이제(李濟)가 서문으로 나오는 것을, 군사들이 그 집 앞까지 뒤쫓아가서 목을 베고 말았습니다. 태종께서 이를 들으시고 놀라면서 말씀하시기를, ‘살려 두어도 괜찮을 것을. 살아 있어도 해될 것은 없는데.’ 하고, 즉시 신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흥안군이 죽었다. 노비들이 다 흩어져 도망할 것이니, 네가 갑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시체를 거두어 염(斂)하고, 노비가 흩어지지 못하도록 하고 이르기를, 「만약 흩어져 가는 자는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고, 옹주(翁主)에게는, 「놀라지 말라.」고 이르도록 하라.’ 하옵시기에, 신이 이에 모두 명하신 바와 같이 하고, 여자종을 시켜 명을 전달하기를, ‘나는 정안군의 도진무(道鎭撫)이다. 정안군께서 흥안군의 죽음을 들으시고, 나에게 명하시어 시체를 거두어 염하게 하시고, 옹주로 하여금 놀라지 말도록 하게 하라고 하셨다.’고 하였더니, 옹주는 이를 들으시고 감격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무안군은 양화도(楊花渡)를 지날 무렵에 피살되었사온데, 태종께서 이 사실을 들으시고 역시 놀라며 애도하며 마지않으셨으니, 무안군과 흥안군의 죽음은 모두 태종의 뜻이 아니였습니다.” 하였다. 김돈이 전흥의 말하는 바를 그대로 계달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이제 전흥의 말씀은 단지 그 줄거리로서 상세한 것은 알 길이 없습니다. 전흥이 비록 태종을 수종하였사오나 본래 그 신분이 미천하였사오니, 어찌 그 계모(計謀)에 참예하여 그 사실을 알겠습니까. 무인·경진의 일을 아는 자로서는 이숙번(李叔蕃)만한 사람이 없사온데, 다만 숙번이 먼 지방으로 귀양가 있사오니, 사람을 시켜 가서 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에 다시 김돈에게 묻기를, “여러 대신들과 상의한 바, 모두들, ‘사람을 시켜 묻는 것이 옳다.’고 하고, 신개(申죏)는 이르기를, ‘데리고 와서 묻는 것이 옳다.’고 하는데, 네 생각에는 어떠냐.” 하니, 김돈이 대답하기를, “이숙번은 태종께 득죄한 사람이므로, 서울에는 들어올 수 없는 몸이오니, 춘추(春秋)의 직임을 겸한 영오(穎悟)한 사람을 택해 보내어 적소(謫所)로 가서 물어 보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물어 보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니므로, 반드시 서울로 오게 하여, 혹 친히 묻기도 하고, 혹은 너희들이 가서 물을 것 같으면, 빠짐없이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을 시켜서 가서 물었다가 혹시 미진한 것이 있게 되면 어찌 또 사람을 보내어 묻는단 말인가.” 하고, 숙번의 죄명(罪名)을 기록하여 올리게 하고, 즉시 지인(知印) 김직손(金稷孫)을 보내어 숙번을 부르고, 인하여 교지하기를, “숙번이 비록 죄는 범하였으나 나이 이미 늙었으니, 역마(驛馬)와 찬품(饌品)의 공궤 등을 네가 살피고 보호하여 노상에서 병이 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감사합니다. 출전이 어디인가요?
▣ 솔내 - 반갑습니다.
▣ 김주회 - 장문의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이날에 이르러 정사를 마치고 제신들이 다 물러가는데, 유독 김돈만을 머물러 있게 하고는 하교하기를, “내가 친히 태종께 듣자오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인년 8월에 변(變)이 발생하던 날 이방석(李芳碩) 등이 교지를 사칭하고 김중귀(金重貴)를 시켜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들어오도록 독촉하였는데, 내가 무안군(撫安君)을 불러 말하기를, 「나를 따라 오너라.」 하였더니, 무안군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머뭇머뭇하다가 대내
(大內)로 들어가므로, 나는 익안군(益安君) 등 몇 사람과 더불어 서문으로 빠져 나와버렸다.’고 하셨는데, 태종의 심중은 아마 무안군을 보전하시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들으니, 경진년 2월 변(變)에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장차 무슨 낯으로 군병을 내어 대응(對應)한단 말이냐.’ 하셨는데,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와 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등이 울며 ‘그만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하고, 청하여, 이에 마지못하여 군사를 내었다는 것이다. 태종 실록은 내가 볼 수 없는 것이고, 춘추관으로 하여금 태조와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실록을 대내로 들여오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실록을 보고는 도로 김돈에게 내어주며 말하기를, “경이 무인·경진년의 일에 관한 기사를 뽑아서 기록하여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김돈이 이를 발취하여 기록하여 바쳤던 바, 임금이 열어 보지도 않고 도로 김돈에게 주며 말하기를, “실록에 실려 있는 것이 너무 간략하여, 내가 들은 일들도 역시 많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록은 다시 고칠 수 없는 것이고, 비문만은 마땅히 소상하게 고쳐 써야 할 것이다.” 하고, 즉시 김돈으로 하여금 신개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신개는 말하기를, “신이 황희(黃喜)에게 듣사온즉, 무인의 변을 태종께서 먼저 아시고 단기(單騎)로서 동북 방면으로 피해 들어가시려고 하시는 것을 조영무(趙英茂)가 태종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면서 만류하였다고 하옵니다. 사관(史官)의 본초(本草) 기사는 꽤 상세하게 되어 있는 것을 실록을 편수하던 자들이 이를 간략하게 만들었다고 하오니, 실록도 역시 고쳐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김돈에게 이르기를, “신개는 이미 《춘추(春秋)》의 필법을 알고 있다. 이제 사관의 본초(本草)를 발취 기록해 올리게 하여, 그 본초의 기록이 과연 상세하다면 실록을 다시 고쳐 엮는 것이 옳을 것도 같다. 이는 큰 일이므로 두 의정(議政)도 역시 알아야 할 것이니, 네가 두 의정을 보고 이를 의논하여 보라.” 하였다. 이에 김돈이 두 의정에게 의논하니, 황희는 말하기를, “무인·경진년의 일을 신이 비록 목격하지는 못하였사오나, 신이 들은 바만 해도 실록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이 또한 많았습니다. 사초가 이미 자세히 되어 있다면 실록도 또한 고치는 것이 옳을 것이나, 만약 사초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면 실록은 진실로 고칠 수 없사옵고, 비문은 마땅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하고, 허조도 역시 황희의 의논과 같았다. 수일 후에 신개·권제(權?) 등이 사관의 본초(本草)를 발취해서 기록하여 바쳤는데, 역시 상세하지 않았다. 다만 무인년의 변이 발생하던 저녁에 여러 왕자가 서문으로 나갈 때, 혹은 다른 사람의 말을 빼앗아 타고 돌아갔다고 되었고, 정안군(靖安君)이 무안군(撫安君)을 보전하려고 하였다는 등의 말은 실록에 없는 사실이었다. 권제가 말하기를, “전에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전흥(田興)에게 듣사온즉, ‘태종께서 흥안군(興安君)의 죽음을 듣고 놀라고 애도하여 말하기를, 「살려도 괜찮은데, 죽일 필요까지는 없는 것을.」 하고, 즉시 전흥에게 명하여 시체를 거두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대개 전흥은 태종을 시종(侍從)하던 자입니다. 전흥에게 이를 물으실 것 같으면, 혹은 그 대개(大죏)를 알 수 있을 듯도 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김돈으로 하여금 전흥에게 이를 물으니, 전흥이 말하기를, “신이 태종의 도진무(道鎭撫)가 되어 항상 태종을 수종하였사온데, 태종께서 때로는 익안(益安)·회안(懷安)·상당(上黨) 등 여러 군들과 더불어 어두운 골방에서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하셨는데, 신은 속으로 무슨 일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 8월 25일 저녁에 태종께서 감순(監巡)를 끝마치고 궐내로 나아가서 직소(直所)로 들어가시니, 익안·회안·상당 등의 여러 군(君)들이 이미 먼저 나아가 있었는데, 때는 아직 인정(人定)의 종(鐘)이 울리지 않았었습니다. 태종께서 신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감순청(監巡廳)으로 돌아가서 순관(巡官)을 살피도록 하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중관(中官)이 나와서 말하기를, ‘성상께서 병환이 위독하시니, 여러 왕자들은 급히 입궁(入宮)하도록 하십시요,’라고 하였습니다.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형님들은 먼저 들어가 보시지요. 나는 복통(腹痛)이 나서 변소에 갔다가 온 뒤에 곧 들어가겠습니다.’ 하시고, 즉시 몰래 빠져 나와 본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신이 감순청에 있으려니까 초경(初更)이 이미 다하였는데, 태종께서 10여 인의 기병을 거느리시고 광화문(光化門)을 지나시기에, 신이 감순청에서 나와 말 앞에서 뵙고 말씀드리기를, ‘신도 따를까요.’ 하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곳에 있으면서 행순(行巡)하는 것을 살피라.’고 하시고는 태종께서는 동문(東門) 밖 남은(南誾)의 첩의 집에 이르시와, 그 이웃집에 불을 지르시어, 밝기가 마치 대낮과 같았으며, 정도전(鄭道傳)·심효생(沈孝生) 등을 목 베이셨는데. 이무(李茂)가 나오며 말하기를, ‘나는 이무란 사람이요.’ 하니, 명하시어 놓아주셨습니다. 이무는 그 앞서 그 중간에서 확실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까닭입니다. 남은은 도망하다가 체포되어 순군옥(巡軍獄)으로 송치되었습니다. 태종께서는 감순청으로 돌아오셨는데, 밤은 아직 3고(鼓)가 울리지 않았었습니다. 이리하여 익안·회안·상당 등 여러 군들이 꾸역꾸역 모여와 군세가 점차 떨치게 되었습니다. 유만수(柳萬殊)가 그 아들 유원지(柳原之)를 데리고 갑옷을 입고 말을 달려와서, 태종을 뵙고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말하기를, ‘이게 무슨 일이오.’라고 하니, 태종께서, ‘잡아내라.’고 말씀하시자, 만수는, ‘영공(令公)이 어찌 내게 이같이 핍박한단 말이요.’ 하는 것을, 군사들이 서로 다투어 그 머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이때 친군 도진무(親軍都鎭撫) 조온(趙溫)·박위(朴츂) 등이 도진무청(都鎭撫廳)에 입직하고 있었는데, 태종께서 사람을 시켜 조온과 박위 등을 부르시니, 조온은 명을 듣고 즉시 휘하의 갑사(甲士)와 패두(牌頭) 등을 인솔하고 광화문으로 나와 말 앞에 와서 뵙고, 박위는 즉시 명에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태종께서 조온에게 명하사 이로 하여금 입직한 갑사들을 다 데리고 나오게 하시니, 조온은 즉시 패두들을 시켜서 도로 궁궐에 들어가서 갑사를 다 데리고 나왔으며, 얼마 아니 되어서 바로 근정전 이남의 갑사들은 모두 뛰어나와서 가담하여 군세는 크게 성세를 이루게 되었고, 좌정승 조준(趙浚)·우정승 김사형(金士衡) 등이 태종의 명을 받고 달려와서, 형조(刑曹)의 문밖에 회좌(會坐)하고, 무슨 일이든지 그 시행하는 바는 다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로 하여금 이를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공정왕(恭靖王)께서는 임금님의 병환이 위독하시어 소격전(昭格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내고 계셨는데, 태종께서 사람을 보내어 불러 오게 하셨으나, 공정왕께서는 이미 변을 들으시고는 도망하고 없었으므로 태종께서 사람을 시켜 널리 찾으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궁 안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어제 밤에 궁 안에서는 정안군이 도망해 나갔다는 말을 듣고, 흥안군이 놀라면서 이르기를, 「손이 미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습니다.’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26일 사시(巳時)에 세자(世子)가 광화문으로 나왔사온데, 장철(張哲) 등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옹위(擁衛)하게 하였으나, 남대문 밖에 이르러서 액사(縊死)를 당하였사오며, 오후에 무안군이 광화문으로 나오는 것을 명하사 통진(通津)으로 귀양보냈고, 해질 무렵에 흥안군 이제(李濟)가 서문으로 나오는 것을, 군사들이 그 집 앞까지 뒤쫓아가서 목을 베고 말았습니다. 태종께서 이를 들으시고 놀라면서 말씀하시기를, ‘살려 두어도 괜찮을 것을. 살아 있어도 해될 것은 없는데.’ 하고, 즉시 신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흥안군이 죽었다. 노비들이 다 흩어져 도망할 것이니, 네가 갑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시체를 거두어 염(斂)하고, 노비가 흩어지지 못하도록 하고 이르기를, 「만약 흩어져 가는 자는 내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고, 옹주(翁主)에게는, 「놀라지 말라.」고 이르도록 하라.’ 하옵시기에, 신이 이에 모두 명하신 바와 같이 하고, 여자종을 시켜 명을 전달하기를, ‘나는 정안군의 도진무(道鎭撫)이다. 정안군께서 흥안군의 죽음을 들으시고, 나에게 명하시어 시체를 거두어 염하게 하시고, 옹주로 하여금 놀라지 말도록 하게 하라고 하셨다.’고 하였더니, 옹주는 이를 들으시고 감격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무안군은 양화도(楊花渡)를 지날 무렵에 피살되었사온데, 태종께서 이 사실을 들으시고 역시 놀라며 애도하며 마지않으셨으니, 무안군과 흥안군의 죽음은 모두 태종의 뜻이 아니였습니다.” 하였다. 김돈이 전흥의 말하는 바를 그대로 계달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이제 전흥의 말씀은 단지 그 줄거리로서 상세한 것은 알 길이 없습니다. 전흥이 비록 태종을 수종하였사오나 본래 그 신분이 미천하였사오니, 어찌 그 계모(計謀)에 참예하여 그 사실을 알겠습니까. 무인·경진의 일을 아는 자로서는 이숙번(李叔蕃)만한 사람이 없사온데, 다만 숙번이 먼 지방으로 귀양가 있사오니, 사람을 시켜 가서 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에 다시 김돈에게 묻기를, “여러 대신들과 상의한 바, 모두들, ‘사람을 시켜 묻는 것이 옳다.’고 하고, 신개(申죏)는 이르기를, ‘데리고 와서 묻는 것이 옳다.’고 하는데, 네 생각에는 어떠냐.” 하니, 김돈이 대답하기를, “이숙번은 태종께 득죄한 사람이므로, 서울에는 들어올 수 없는 몸이오니, 춘추(春秋)의 직임을 겸한 영오(穎悟)한 사람을 택해 보내어 적소(謫所)로 가서 물어 보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물어 보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니므로, 반드시 서울로 오게 하여, 혹 친히 묻기도 하고, 혹은 너희들이 가서 물을 것 같으면, 빠짐없이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을 시켜서 가서 물었다가 혹시 미진한 것이 있게 되면 어찌 또 사람을 보내어 묻는단 말인가.” 하고, 숙번의 죄명(罪名)을 기록하여 올리게 하고, 즉시 지인(知印) 김직손(金稷孫)을 보내어 숙번을 부르고, 인하여 교지하기를, “숙번이 비록 죄는 범하였으나 나이 이미 늙었으니, 역마(驛馬)와 찬품(饌品)의 공궤 등을 네가 살피고 보호하여 노상에서 병이 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감사합니다. 출전이 어디인가요?
▣ 솔내 - 반갑습니다.
▣ 김주회 - 장문의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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