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김질)할아버지의 시는 높다.
페이지 정보
김태서 작성일04-02-15 21:08 조회1,541회 댓글0건본문
차원부설원기서 역(譯)
옥을 쪼으고 사석(沙石)으로 문지르는 것은 문채(文彩 : 아름다운광채)를 내기 위해서이고 사건을 기록할 때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은 진실을 얻기 위해서이다.
옥을 쪼으고 문채를 내지 않거나 사건을 진실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이사를 가면서 아내를 잊어버리는 것이나 수레를 타면서 가슴걸이를 떼어놓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장차 옥을 쪼아 무엇에 쓰겠으며 사건을 기록해 무엇하겠는가?
근자에 차원부의 억울한 원한을 씻어 주려는 일에 관해 임금에게 올린 글을 얻어 보고 박팽년(朴彭年)에 대해 사적(私的)으로 매우 의심하고 원망하였다.
그런데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 이 기사를 신에게 물으셨는데 생각하지 못하였던 부분까지 간곡히 말씀하셨으며, 신에게 이 기록으로 경계(警戒)할 수 있도록 서문(序文)을 쓰라고 명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주상전하께서 백일(白日)처럼 명백한 차원부의 사실을 간파(看破)하시고 박팽년이 사적으로 숨기는 바를 괘시(掛示 :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하여 써서 내 붙히거나 내걸어 두어 보게 함)하시려는 뜻인가 싶다.
말을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는 것이나 사건을 알고도 거론하지 않는 것은 신이 모두 그 때 그 때 하교(下敎)를 거쳐 바로잡고 신이 모두 대강을 총괄(總括)하여 밝힘으로써 기사중의 사실을 훤히 알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리고 주석(註釋) 중 별도의 의미는 분명하게 알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대체로 고려 말엽의 사건을 살펴보면 조선조(朝蘚朝)의 사람은 처음부터 국인(國人 : 나라의 국민)들이 아에 피차(彼此)를 달리 여기지 않았으니, 도시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두 사람 중의 사람이었다. 다만 탐탁치 않게 여긴 분은 차원부였고 또 불행한 분은 차안경(車安卿)이었다.
그들이 고려 조정에서 처음 벼슬할 때에 임견미와 염흥방이 세력을 문미(門楣 : 문위에 가로댄 나무)처럼 공고히 다지고 뿌리를 산악의 반석처럼 뻗치었으나 자신을 더럽히기라도 할 것처럼 배척하고 그들을 피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깊은 숲속으로 숨어야 했다.
그런데 위대하신 우리 태조께서는 임견미와 염흥방의 무리를 진무(鎭撫 : 진압하고 어루만짐이나 事實은 誅殺하였음)하고 순리(順理)에 응하는 운수(運數 : 인간의 힘을 초월한 天運)를 성대히 열어 요양(遼陽 : 중국의 요동지방)의 정벌에서 대의(大義)를 제창하였으며(위화도 회군을 뜻함), 사심(私心)없이 고려의 정권을 이양받았다. 그리하여 삼각산(三角山)의 남쪽에다 도읍을 정하고 목멱천(木覓川 : 지금의 청계천)의 북쪽에다 궁(宮)터를 잡고 백악산(白岳山 : 지금의 북악산)과 대산(대산 : 지금의 남산) 두 줄기 안의 산 밑에다 종묘(宗廟 : 王室의 私堂)와 사직(社稷 : 土地神과 穀神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을 건설하였다.
백성들이 편안히 밭갈고 우물을 팔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태조께서 하늘에 순응한 공로이고 춤추며 즐겁게 사는 것은 모두 태조께서 사람의 뜻을 따른 힘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태조께서 꿈결에 갑자기 차원부의 토옥(土屋 : 토담집)에 들어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깊숙한 계곡에 망아지가 울고 있는데 산골에 어찰(御札 : 임금의 편지)이 내려지자 차원부의 몸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어 매일 다섯 번씩 칙서(勅書)가 석달이 다되도록 내려오므로 마음가짐이 누구러지기는 하였으나 은총으로 하사한 도포(道袍)조차도 버리고 초야의 의관(衣冠) 차림으로 보내준 역마(驛馬)도 타지 않은 채 하얀 채찍으로 푸른 노새를 몰아 평상시 고산(故山 : 지금의 平山 水雲巖洞)의 모습 그대로 였다. 태조를 뵙는 전상(殿上)의 자리에는 하나의 편복( 服 : 임금이 입는 옷이 아닌 보통사람이 입는 옷)차림의 사람과 몇 명의 시종(侍從)이 있었다.
구중궁궐의 임금과 일개 초야의 선비가 만나자 기쁨이 눈썹에 생동하고 얼굴에 넘치었다. 옛날의 일을 이야기하고 의견도 토론하면서 정담을 나누었다.
그 뒤 원정(園亭 : 上林苑, 궁궐 뒷뜰)에 가 비를 맞으며 파씨를 뿌릴 때에 태조가 비로소 대군들의 왕위 순서를 정하겠다는 말을 하자, 차원부가 그 일이 중난(重難 : 몹시 어려움)함을 깊이 생각하고 겉으로는 끄덕이면서도 내심으로는 대답하지 않으려 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불가(不可)하다고 말하기를 『옛날 당 고조(唐高組 : 唐나라를 開國한 李潚을 말함)가 창업(創業)할 때 진왕(秦王 : 唐太宗인 李世民을 말함)이 남다른 공을 세웠는데도 건성(建成 : 唐高組의 長子)을 황태자로 삼고 세민을 그 다음으로 삼았다가 결국 상잔(相殘 : 서로 싸우고 해침)에 이르러 형제간에 칼을 겨누다가 건성과 원길(元吉 : 唐高組의 아들로 齊나라의 王이됨)이 모두 죽었는데, 이것이 비록 태종(太宗 : 李世民)의 죄이기는 하나 모두 당 고조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당현종(唐玄宗)이 아우로서 즉위(卽位)할 때에 녕왕(寧王 : 唐나라 玄宗의 兄)이 형으로서 사양하기를
「시대가 태평할 때에는 적장자(嫡長子)를 우선으로 하고 시대가 어지러울 때에는 공로가 있는 자를 우선으로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시기에 따라 알맞게 하는 권도(權度)인 것이고 이것이 정말 변화에 대처하는 의리인 것입니다.
지금 주상의 적실(嫡室) 아들들이 비록 아버지의 중한 명을 받아 형제들이 편안히 부귀(富貴)를 누리며 차례로 복록(福祿)을 전한다 하더라도 여러 아들들의 재신(宰臣 : 家臣)과 중신(重臣 : 힘있는 部下)들이 주인을 위하여 각자 사사로이 적장(嫡長)의 자리를 다툴 경우 군사를 일으켜 혁명하는 번거로운 일이 아니더라도 하늘이 준 공고(鞏固) : 탄탄하고 튼튼함)한 왕업(王業)이 응당 타인의 소유가 되어 필시 만세에 조롱거리(萬世之機→譏)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齊)나라 환공(桓公 : 春秋時代 五覇중 하나인 齊나라 桓公임)이 죽자 아들들이 왕위를 다투다가 환공(桓公)의 시체에 벌레가 생긴 역사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또 두 달이 넘도록 염(殮 : 염습)을 하지 못하고 왕위를 다투는 것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누구를 정해야겠다는 뜻이 있더라도 지금 생각을 들추어 낼 일이 아닙니다. 전철(前轍)도 경계해야 하는데 장래의 변화(變化)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비로소 차원부가 불가하다는 뜻을 알고 누구를 세자로 세울까 망설이는 생각을 끊어 버리고 심기(心氣)를 편안히 가지고 차원부에게 위안의 말씀을 하였다.
그리고 차원부에게 「나와 같이 정사를 하자.」는 뜻으로 권유하였으나 차원부는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차원부가 남이 의도한 바대로 하기 어렵다는 뜻에 대해 태조께서 비로소 높이 나는 기러기가 덫을 멀리 파한다는 것으로 허락(許諾)하였다. 태조가 미복(微服) 차림으로 차원부가 머물러 있는 곳에 가기도 하고 평상시에 궁궐로 맞아들이는 등 어느덧 한두 달이 지났다.
그런데 차원부가 갑자기 고향생각(집에서 기르던 원숭이와 학이 주인을 원망하며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이 난데다가 『집안의 여러 형들이 송원(松原 : 지금의 개성 근교의 地名)과 마원(麻原 : 지금의 개성 근교의 地明)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받고 고산(故山)으로 한 마리의 노새를 타고 되돌아갔다.
애당초 조선을 존숭(尊崇)하던 사람들이 전에 태조가 왕자들에게 돌려가며 임금을 시키려는 틈을 타서 항상 옛날 자기의 뜻과 달리한 사람들에게 혐의(嫌疑 : 꺼리어 싫어함)를 품고 은밀히 오늘날 이(利)끗을 노리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하여 태조께서 차원부에게 마음을 쏟을 때에 몰래 화살을 겨누고 하륜(河崙)이 방석(芳碩 : 太組의 막내아들)을 미끼로 연좌시켜 사적인 앙갚음을 하였으니,
설원기(雪寃記)에 이른바 『이 사이 미세한 틈을 파고든 자는 누구인가?』라고 한 뜻을 볼 수 있고 설원기에 이른바 『여러 음흉한자들이 옳고 바른 분들을 할퀴는 때가 이보다 더 심한 적이 없다.』는 뜻을 징험(徵驗)할 수 있다.
그리고 차원부는 본디 고려조의 사람이므로 조선의 조정에 벼슬할 리가 만무하고 공적(公的)으로나 사적(私的)으로나 털끝만큼도 개의치 않은 것은 초야로 숨기 전의 일이다.
처음에 정언(正言 : 고려, 조선조 正六品의 벼슬(司諫院))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간흉(奸凶)에게 배제(排除)당한 것은 벼슬을 사양하고 떠날 때의 일이다.
지금 박팽년이 자아(自我 : 車原 를 말함)를 그르게 하면 자아를 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아를 그르게 하여 자아를 위한 것은 차원부가 멸문(滅門)의 큰 화를 당할까 염려한 것뿐만 아니라 사실 성삼문(成三問)도 차원부의 후손을 비호(庇護)하는 대의(大義)를 중히 여긴 까닭이다.
그리고 이석형(李石亨)이 주상이 내린 주석(註釋)을 넣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유없이 주석을 넣지 않은 것은 정도전(鄭道傳)이 차씨의 서얼 사위라는 세세한 생각을 하지 않은게 아니라 차원부의 사람됨이 불의(不意)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어서였다.
박팽년이 은연히 성삼문에게 글을 주면서 눈물을 흘렸고 성삼문이 이석형의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사람은 비록 신의가 중요하나 멸문의 화가 더 중요하니, 이 사람의 사실(史實)을 바르게 한다 하더라도 또한 이사람의 재앙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박팽년이 거듭 성삼문의 글을 헤아려 밝혔으며 이에 성삼문이 다시 이석형의 뜻을 되돌리게 함으로써 후일의 어려움을 판단 멸문의 화가 다시 일어날 단서를 끊고 과거의 일을 인용하여 첫머리에다 태조가 차원부를 부르라고 명한 뜻을 기록한 것이다.
설원기에 차원부는 조선 조정(朝廷)의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사실 고려 조정의 사람으로서 정말 우리에게 굽히지 않은 분이고 사실 올바른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응당 조운홀(趙云 : 고려의 文臣으로 이조 때 江陵府使를 지냄)의 분노와 원한이 없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양중(李養中)의 원한도 없었을 것이다. 또 차원부가 「차라리 다섯 말의 초를 마시겠다.」는 뜻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고 차원부가 「공신(功臣)의 선발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마음속에 다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도전이 도륙(屠戮)을 당하기 전에 정인(正人 : 車原 )을 모함하는 간사한 모의가 이루어졌고 하륜이 발호(跋扈)한 뒤에 공론을 무시한 사술(詐術)이 크게 드러났다.
박팽년이 차원부의 후손을 비호(庇護)한 것은 후하기 때문이고 이석형이 주석을 넣지 않은 것은 바르게 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조정과 재야(在野)의 의논이 「최항(崔恒)과 신숙주(申叔舟)는 차원부의 조상 계통의 뿌리를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주상께서 특별히 그에 대한 주석을 내렸으며,「성삼문과 이석형은 차원부가 애매하게 당한 이유를 두루 알고 있다.」고 하자 주상께서 별도로 주석을 달도록 명을 내렸다.
성삼문이 비호한 것은 자신의 사적인 것을 혐오하여 비호한 것이 아니고, 이석형이 피한 것은 정도전으로 말미암아 피한 것이 아니라 고려의 차원부를 조선의 차원부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사 가운데 「그 뒤 간흉에게 배제당하였다.」는 대목 아래의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박팽년이 스스로 주석을 낸 깊은 뜻을 알 수 있고 차원부가 실행하였던 실지의 뜻을 얻을 수 있다.
시 가운데 진정(眞正)한 말 뜻을 보고 주석 안에 진실(眞實)한 사리를 본다면 이석형이 장인(聘丈)이라는 혐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차원부가 조선조에 있지 않다는 뜻이 또한 분명하다.
계사(啓辭)이외에 응제(應製詩 : 임금이 낸 제목에 따라 신하들이 써내는 시문) 가운데 차원부의 후손을 비호하는 뜻을 명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사(記辭)의 뜻도 아울러 밝혔다.
차원부의 뜻이 저기에 있다는 것을 그 누가 모르겠으며 박팽년이 이를 인용한 뜻을 어느 사람이 모르겠는가?
최항과 신숙주는 기사의 근본을 근거한 것이고 성삼문과 이석형은 그 기사의 근원을 펼친 것이다.
강희안(姜希顔), 강맹경(姜孟卿), 유진(兪鎭), 박팽년(朴彭年)의 시 주석을 살펴보면 변론(辯論)을 들을 것도 없이 차원부의 뜻을 알 수 있으며, 이예장(李禮長), 정인지(鄭麟趾), 권람(權擥), 이개(李塏)의 시 주석을 살펴보면 사람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차원부가 행한 일을 알 수 있다.
윤자운(尹子雲), 이함장(李 長), 황효원(黃孝源), 원효연(元孝然)의 시는 뜻이 곧고도 맑으며, 윤사균(尹士畇), 강희맹(姜希孟), 한계희(韓繼禧), 이숙기(李叔埼)의 시는 말이 진실하고도 아름답다.
간결하고도 직실(直實)한 것은 권반(權攀)의 시이고 아름답고도 화호(和好)한 것은 심회(沈澮)의 시이고 곧고도 공평한 것은 류성원(柳誠源), 어세겸(魚世謙)의 시이고 질박하면서도 화평한 것은 양성지(梁誠之), 노사신(盧思愼)의 시이다.
그리고 이서장(李恕長), 김질(金 ), 이숙함(李叔 )의 시는 높고 정창손(鄭昌孫), 한확(韓確), 황수신(黃守身)의 시는 엄숙하고 서거정(徐居正), 홍달손(洪達孫)의 사운(詞韻)은 매우 참담하고 박원형(朴元亨), 구치관(具致寬)의 사의(詞意)는 엄숙 진실하고 이극증(李克增), 이극배(李克培), 이극균(李克均)의 시 뜻은 진실하고도 화평하고 이극감(李克堪), 이극돈(李克墩), 이계전(李季甸)의 시 뜻은 온오(蘊奧 : 학문이나 기예 등이 쌓이고 깊음)하다.
질박(質撲 : 꾸밈이 없이 수수함)하면서도 할말을 다한 것은 이륙(李陸)의 시이고 청화(淸和 : 말고 온화함)하면서도 뜻이 섬실(纖實 : 바르고 섬세하다)한 것은 홍응(洪應)의 시이고 포괄적이면서 격이 뛰어난 것은 윤필상(尹弼商), 홍유손(洪裕孫)의 시이고 좋으면서 진실하고 둥근 것은 김국광(金國光), 남효온(南孝溫)의 시이다.
제현(諸賢)들이 응제한 시를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살펴보면 우리 조정( : 조선왕조)의 차원부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이밖에 신덕왕후(神德王后)께서도 「차원부가 뜻하지 않은 재앙(災殃)을 당했다.」는 뜻을 내심으로 체념(體念 : 깊이 생각함)해 보면 또한 차원부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림(士林)들에게 타이른 것을 보면 박팽년의 소회를 알 수 있고 멸문의 화를 막으려고 한 것을 보면 성삼문의 뜻한 바를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누구나 기문(記文)과 응제(應製)의 시작(始作)을 의심하고 두려워하였으나 결국에는 이 사람( : 車原 )의 원한을 푸는 지극(至極)함을 알게 되었다.
하륜의 친지(親知) 3, 4명이 응제한 사람들 가운데 들어 있는데 매우 바르게 뜻을 말하였고, 하륜의 아들과 사위들 중 연관된 자는 또 선발하는 사이인데도 말뜻이 너무나도 곧았으니, 공론으로 격발(激發)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앙금을 풀 수 있겠는가?
그러나 원한은 씻어졌지만 은명(恩命)은 막히었고 명령은 내려졌으나 은덕(恩德)은 두루 입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머리를 삶는데 귀가 익지 않을 리가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사면하고 그의 아들은 사면하지 않은 것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높은 관작(官爵)을 내려 보답하고 나서 반대로 도륙하는 것은 태조께서 옛 친구에게 보답하는 본보기가 아니고 사사로운 혐의를 만들어 군친(君親)을 어지럽히는 것이 어찌 왕위를 계승한 분이 화를 부채질한 징험이겠는가?
약간의 사사로운 것과 몇 가지 혐의로 인해 군부(君父)를 어지럽히고 허위로 조작하여 공을 탐하였으니,
차원부는 바로 하륜의 기화(奇貨 : 못되게 이용하는 기회)였고 신덕왕후는 차원부가 당한 화근의 함정(陷穽)에 빠진 것이었다.
그의 자손들에게 벼슬과 녹(祿 : 벼슬살이를 하여 받는 녹봉(祿俸))을 주었을 때에는 다시금 후손을 염려할 것이 없었지만 돌아서서 그의 후손을 죽인다면 이 기록에 뜻한 바가 아닐 것이다.
지난날에 억울한 차상도에 대한 의논이 아직 없었을 때이며 또한 그당시 단종(端宗)의 외삼촌 권자신(權自愼)이 사람을 평하지 않았다면 태조의 옛 친구 일이 어찌 여기에만 그치고 말았겠으며 태조께서 노성인(老成人 : 차원부를 말함)을 얻으려는 생각이 어찌 이것 뿐이었겠는가?
구름을 헤치고 달을 캐는 시기를 정말 만날 수 있었을 것이며 강을 더듬어 구술을 줍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때를 불리하게 만난 것이 이 사람과 같은 사람이 없었고 기쁨을 당했는데도 도리어 슬퍼하게 된 것이 전하(殿下)와 같지 아니한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얻어도 기뻐하지 말고 잃어도 슬퍼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전하께서 스스로 위안할 것이 아니겠으며 이것이 옛사람이 실정을 이야기한 바른 글귀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부축하고 싶어도 두 팔이 끊어졌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차원부가 한을 품은 것이 아니겠으며 이것이 고인이 바르게 말한 실지의 글귀가 아니겠는가?
몇 분의 어진분들(賢人)이 낸 주석의 뜻을 보면 사세(事勢)는 비록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 말은 엄정하였으며 여러 현량(賢良)들이 응제한 글을 보면 행실은 다르지만 그들의 마음은 속이지 않았다.
이것이 실지(實地)로 속일 것이 없는 것인가? 이것이 정말 스스로 속이는 바가 없는 것인가? 속이지 않은 천성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는 마을이 없는 것이며, 스스로 속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속이지 않는 실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속이지 않는 것은 득(得)이고 또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실(失)이다. 속임이 없는 것으로 어떻게 하면 천년의 뒤에까지 하륜을 경계할 수 있으며, 스스로 속임이 없는 것으로 또 어떻게 신(臣)을 당세(當世 : 그 시대)에 경계할 수 있단 말인가?
신(臣)의 이름이 문장으로 뽑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흠뻑 받았으면서도 비록 세종 30년(戊辰) 이후 단종 1년(癸酉)에 이르도록 많은 날이 있었음에도 작성(作成)할 때가 없었으므로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신이 매우 부끄러움을 안고 나아갔다가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물러나오고 있다.
그 누가 신이 때에 맞게 진퇴(進退)를 한다고 말하겠는가? 신이 때에 맞게 진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로는 하늘의 태양처럼 밝게 임하시는 주상께 부끄러우며, 그 누가 신이 절도(節度)있게 거취(去就)를 한다고 말하겠는가?
신의 거취는 절도가 없으므로 아래로 지하에 계신 선왕의 성령(聖靈)을 저승에서 만나기 부끄럽다. 그러므로 억울하게 그친 것을 분개할 뿐이고 누적(累積)되고 만 것을 한스러워할 뿐이다.
그러나 박팽년이 기재(記載)한 논의와 제현(諸賢)이 주소(註疏)한 의논에 대해 비록 그 사람에 대한 사실을 미흡하게 편집하였으나 기록 중의 대의(大義)는 엄하고도 바르며, 비록 대략이나마 그 사람에 대한 사실을 수집하였으니 주석 중의 실사(實事)는 곧고도 공평하였다.
왕실(王室)이 극도로 미약해져서 천산(千山 : 수없이 많은 산) 너머에서 대할 적에 시대가 어렵다는 뜻이 없으면 낱낱히 말하여 지난 옛날을 헤쳐서 뒷날을 총괄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약한 사람에게는 통쾌한 일이며 흉악한 무리에게는 분노할 일이었으니 이 기록 가운데 온오(蘊奧 : 학문이나 지식이 쌓이고 깊음)를 그 누가 꿰뚫겠으며 이 말 사이의 온오를 다시금 누구와 같이 분별한단 말인가?
깊고도 깊은 사설(詞說)을 담고 있으나 범범(泛泛 : 사물에 대하여 꼼꼼하지 않는 것)치 않고 사사롭지 않은 기(氣)가 존재해 있으며, 격절(激切 : 격렬하고 절실함)한 사의(事義)를 펼치고 있으나 또한 위엄이 있고 정직이 있는 맥(脈)이 많이 있다.
대개(大 : 記文中에 鄭道傳, 趙英珪는 먼저 禍의 根本을 만들었다는 뜻임)의 이상은 글 줄거리의 사리가 명주(明珠)와 백옥(白玉)처럼 정정(貞精), 진실(眞實)한 의리를 내포하고 있으며 대개이하(大 以下)는 사원(詞源)의 의기(意氣)가 파란을 진압하여 구슬처럼 서로 모나지 않는 도량이 있다.
뜻은 비록 간략하나 이것이 일시의 하교하심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며, 말은 비록 간략하나 참으로 만세(萬世)의 정론(正論)인 태사(太史 : 史官)의 필치이다.
신이 인성(仁聖)한 주상의 하교를 받고 신이 인성한 주상의 간청을 견디지 못하여 지금 다시 억울한 사람의 설원(雪寃)을 밝혀서 아첨하는 자의 악을 거듭 들추어 보이고 또 후세의 높은 식견(識見)이 있는 호걸(豪傑)들로 하여금 밝은 창문 아래 깨끗한 책상에서 이를 보도록 한다.
때는 경태(景泰 : 明 景帝의 年號) 7년(세조2년 一四五六)5월 21일에
가정대부(嘉靖大夫) 행예조참판(行禮曹參判)
신(臣) 하위지(河緯地)는 하교를 받들어 삼가 서한다.
▣ 김항용 - 귀한 자료 보았습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
▣ 김윤만 - 잘 보았습니다.
▣ 솔내 -
▣ 김주회 - 잘 보았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