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당(湖堂)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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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4-02-20 07:28 조회1,827회 댓글0건본문
어제(2004. 2. 18) 오후, 1개월 전 관악산 산행시 주회대부님께서 탐방하셨다가 카메라가 준비되지 않아 촬영하지 못했던 옥수동의 <독서당>터입니다. 옥수역에서 마을버스로 5분만에 도착하는 이곳은 뒷쪽으로는 극동빌딩이, 앞으로는 삼성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1989년 11월에 세운 이 표석은 차량 이용이 많은 도로 옆에 있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습니다. 방향은 현 옥수역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20년간 이곳에 살아 왔다는 부동산 주인을 찾아 몇가지를 여쭤봤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파트가 지어지기 전 <독서당> 자리에서는 한강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고 합니다.
이곳을 호당(湖堂)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독서당(讀書堂)의 별칭으로 젊고 재주 있는 문신을 뽑아 일정기간 공부에만 전념케 하던 국비 장학생으로 대제학이 뽑았으며, 임금의 특명을 받아 쉬면서 공부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를 일명 賜暇讀書라고도 하며 문신의 명예로 여겼습니다. 우리 문중에서는 澍, 弘度, 瞻, 緻, 壽寧, 德龍 선조님들이 공부하던 곳입니다.
인터넷에서 독서당 관련 자료를 모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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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말(翰林)에 독서당 [讀書堂]
매봉산을 등지고 있는 산아래 마을을 한림말(삼성아파트자리)이라 부르고 있다 .
조선 전기에 뛰어난 젊은 관리에게 특별 말미를 주어 글을 읽게 한 곳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젊고 유능한 문신들을 위한 수양 ·연구 시설이며 선비들이 글 읽던 마을이라 하여 "한림(翰林)마을"이라는 이름이 구전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독서당은 일명 동호당(東湖當)이라고도 한다. 독서당제도는 세종 때 실시되었는데 중종때 이곳에 설치하여 영종 때까지 존속하였다. 모두 공정한 추천을 통해서 엄정히 뽑힌 인물들로 이곳 출신 중에 훗일 큰 인물이 많이 나왔다.
1426년(세종 8)에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이 세종의 명을 받아 재주와 덕행이 뛰어난 문신을 선정하여 장의사(藏義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게 한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세조 때 일시 폐지되었다가 1491년(성종 22)에 상설기구로 ‘남호(南湖) 독서당’이라는 현호(懸號)를 달고 복구되었다.
중종 12년 (1517)봄에 대사헌 최숙생, 권민수 등이 주장하여 자연풍광이 좋은 두모포의 동호송월암 서쪽(옥수동)에 건립되었으며 한강 연안의 두모포(豆毛浦)에 독서당을 신축하여 ‘동호(東湖)독서당’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1592)으로 소각될때까지 75년 동안 학문연구와 도서열람으로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였고,정조 때 규장각이 설치됨에 따라 완전히 소멸되었다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응교 등 문관요직이 모두 이독서당 수업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세인들이 모두 영광으로 생각하였으며, 임금이 물건을 하사하여 총애하고 우대함이 옥당 (집현전, 홍문관)보다 못지 않았다고 한다.
[약수동에서 옥수동 올라가는 고갯길 1956년] 조선시대 도성의 동남쪽인 오늘날의 광희동 2가 105번지에 위치한 광희문(光熙門)을 나서서 지금의 약수동에서 두뭇개(豆毛浦)인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긴 고갯길을 독서당고개라 하였으며,
두뭇개에 독서당(讀書堂)이 있어서 선비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며 독서당에서 공부하였으므로 독서당고개라고 하였는데 지금 한남동에서 옥수동을 거쳐 금호동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에 ‘독서당길’ 표지석을 만들어 놓았다.
조선시대 두뭇개 독서당은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 244번지에 있었다. 지금도 이 일대를 ‘한림말’이라 부르는데, 한림말이란 ‘한림(翰林)마을’을 말한다. 한림(翰林)이란 조선시대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통칭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곧 ‘선비가 글 읽던 독서당마을’이란 뜻이다.
[ 표석 : 극동아파트 정문 우측 ] 한림말 독서당자리에는 1950년대만 해도 부군당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공부자도통 고금연원기념비(孔夫子道統古今淵源 紀念碑)」라 새겨진 큰 돌비석이 서있어서 여기가 독서당터 부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두뭇개 앞 강을 동호(東湖)라고도 하여 이 곳에 있던 독서당을 동호당(東湖堂)이라 하였으며 한편 동호당에 앞서 용산에도 독서당이 있었으므로 이 곳의 독서당을 용호당(龍湖堂) 또는 남호당(南湖堂)이라 하였기에 독서당을 일명 호당(湖堂)이라고도 하였다.
독서당제도란 조선시대에 뛰어난 선비들에게 특별히 말미를 주어서 독서당에서 글을 읽게 한 제도를 말하는데, 그 연원은 세종 때부터이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선비 중에서 뛰어난 젊은 관리 20명을 뽑아 경연(經筵)에 들게 하고 아울러 문한(文翰: 문필에 관한 일)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집현전 학사들은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야 퇴근하기 마련이어서 일관(日官)이 퇴근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야만 궁궐에서 물러나올 수 있었다. 세종은 내시로 하여금 점심·저녁상을 차려 대접케 하는 등 이들에 대한 대우가 극진하였다. 이로부터 선비들이 다투어 공부에 열중하였고 이에 따라 뛰어난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세종은 왕 8년(1426)에 집현전학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자하문 밖(지금의 세검정) 장의사(藏義寺)에서 공부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시초가 되었다. 사가독서제는 문종·단종을 거쳐 세조 때에 이르러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다 하여 세조 2년(1456) 집현전이 혁파되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 후 성종이 즉위하자 용산 한강가 언덕에 있는 빈절을 고쳐서 사가독서하는 장소로 삼고 그 이름을 독서당이라 하였다. 이것이 독서당이란 이름의 시초로서 여기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공정한 추천을 통해 엄정히 뽑힌 사람들이었다. 이 독서당을 일명 남호당(南湖堂)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 후 독서당은 연산군 10년(1504)에 있었던 갑자사화로 폐쇄되었다가 중종 때 재개되었다. 중종은 즉위 직후 얼마동안은 정업원(淨業院)을 독서당으로 사용하다가 중종 12년(1517) 여염과 멀리 떨어져 있고 경치가 뛰어난 동호(東湖), 즉 두뭇개 뒷산 응봉 기슭에 새로 독서당을 짓게 하였다.
동호독서당은 그 규모가 크고, 차림새의 화려하기가 용산의 독서당보다 월등하였다 한다
독서당 계회도(讀書堂契會圖) 독서당은 항상 빈집 같이 조용하였다 한다. 그 규모는 처음에 대청과 남루(南樓)가 있었고 다락 북쪽에 침방(寢房)이 있었다. 광해군 4년(1612)에 문회루(文會樓)를 짓고 30년 후 다시 문회루 서북쪽에 있는 연못 뒤에 누각 하나를 더 지었다.
중종 12년(1517) 동호독서당이 세워진 후 임진왜란으로 불타기까지 70여년간 동호독서당은 문사(文士) 양성기관으로서 최대의 이바지를 하였으며, 이 곳을 거쳐간 인물들이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몇몇 사람들을 소개하면, 조광조(趙光祖)·민제인(閔濟仁)·주세붕(周世鵬)·이황(李滉)·정유길(鄭惟吉)·노수신(盧守愼)·심수경(沈守慶)·기대승(奇大升)·이산해(李山海)·심의겸(沈義謙)·정철(鄭澈)·이이(李珥)·유성룡(柳成龍)·이발(李潑)·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오억령(吳億齡)·한준겸(韓浚謙)·기자헌(奇自獻) 등을 들 수 있는데, 독서당 출신들이 얼마나 나라에 공헌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독서당은 집현전·홍문관의 옥당(玉堂) 못지 않게 높이 평가되었던 것으로, 중종 때는 고시(考試)하는 법이 대단히 엄격하여 만약 계속하여 입격(入格)하지 못하면 퇴학시켰다. 독서당에서 공부하는 당원(堂員)에 대한 예우는 극진하였다. 이들을 돌보기 위해 급여 사무자가 9명, 심부름꾼 8명이 배치되었으며, 물자 공급을 여유있게 하였다. 특히 성종·중종·명종 등 여러 왕들은 궁중의 음식을 내려주어 이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는데, 성종은 수정으로 만든 술잔까지 하사하였다.
독서당 당원의 선발숫자는 한번에 평균 6명 정도를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세종∼영조 때까지 350년간 320명이 선발되어 사가독서하였다. 그 선발과정은 대단히 엄격하였으며, 조정의 적극적인 권장과 관심 속에서 당원들은 학문에 정진함으로써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니, 조선시대 동호독서당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동호독서당은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에 타서 한 때 폐지되었다가 선조 40년(1607)에 다른 곳에 임시로 설치되어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숙종 35년(1709) 이후에는 이 제도가 시행되지 않았다. 정조 때 규장각을 개편하고 이 곳 학자들에게 두뭇개 유하정(流霞亭)에 가서 한동안 독서하게 하였는데, 이것도 호당제도(湖堂制度)를 본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독서당고갯길의 시발점에는 광희문(光熙門)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나루와 한남동 방면으로 통하는 광희문은 시구문(屍口門) 혹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다
▣ 김용주 - 감사합니다
▣ 김영윤 - 잘 보았습니다
▣ 솔내 - 독서당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 김주회 - 독서당 자료 총정리!!! 잘 보았습니다.
▣ 김윤만 - 잘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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