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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신돈과 우리가문 06---공민왕 재위 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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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29 20:42 조회1,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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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1996, 박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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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공민왕은 설상가상으로 개인적인 슬픔을 겪는다. 1365년 2월 만삭의 몸이던 왕비 노국공주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노국공주의 죽음은 계속되던 전란에 지친 공민왕을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왕사 편조(★신돈)에게 정권을 내맡겨 조신들을 견제토록 한후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사에 전념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돈의 힘이 막강해졌다. 왕의 후원을 받은 신돈이 일련의 개혁작업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시켜가자, 권문세족들의 반발은 매우 심했다. 그 결과 오인택, 조회고, 김원명 등 많은 공신들이 유배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은 노비로 편입되었다.



신돈의 힘이 날로 기세를 떨치자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공원왕후) 홍씨를 비롯한 왕실세력과 문신들의 우려가 높아갔지만 신돈에 대한 공민왕의 믿음은 여전하여 오히려 그 비판세력들이 제거당했다.



그래서 1370년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보낸 친서에는 공민왕을 고려국왕이라 칭하고 신돈을 상국으로 부를만큼 신돈의 위세는 왕 못지않게 대단해졌다. 하지만 그의 세력 확대는 공민왕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권문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내세운 신돈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공민왕이 신돈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부의랑 이인이 1371년 7월 익명으로 신돈의 역모를 고변하자 공민왕은 기현, 최사원, 정구한, 진유검, 기중수 등을 국문하여 처단하고,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시킨 후 사형시켰다. 이로써 6년간 지속되던 신돈 정권은 종말을 고하고 그의 도당들도 모두 유배되거나 처형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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