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신돈과 우리가문 07---공민왕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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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2-29 20:45 조회1,773회 댓글0건본문
■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1996, 박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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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이 제거된후 공민왕의 행동은 예전같지 않았다. 즉위초의 개혁적인 성향은 거의 찾아볼 길 없었고, 자주 술에 취해 있거나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미행을 나가는 일이 잦았다.
그는 원래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성품이었기에 별궁 출입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항상 노국공주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여 급기야 정신병적 증세를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공민왕은 변태적인 행동을 자주 하였는데, 젊고 예쁜 시녀들을 방안으로 불러들여 귀족의 아들들로 구성된 자제위 소속 김흥경, 홍륜 등과 난삽한 음행을 하도록 하고 자신은 문틈으로 그것을 엿보곤 하였다. 또 마음이 동하면 홍륜 등을 자기 침실로 불러 들여 동성연애를 즐기기도 하였으며, 후계자가 없음을 염려하여 홍륜과 한안 등을 시켜 왕비를 강간토록 하고, 그들 사이에 아들이 생기면 자기 자식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런 가운데 1374년 9월에 그는 내시 최만생으로부터 익비가 아이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보고받는다. 그러자 익비의 몸 속에 있는 아이를 완전히 자기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최만생에게 왕비와 같이 잔 홍륜과 그의 무리를 죽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최만생은 홍륜 무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한안, 권진, 홍관, 노선 등과 공모하여 오히려 왕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날 밤 그들은 침전에 침입하여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 공민왕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공민왕은 즉위 23년만에 4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공민왕을 죽인 최만생과 홍륜 일당은 그 다음날 내시 이강달과 ★경복흥, 이인임 등에 의해 모두 체포되어 죽거나 유배되었다.
공민왕의 능은 현릉으로 개경 근처에 마련되었으며, 1385년 9월 명나라에서 공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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