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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역사 (김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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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4-03-02 04:50 조회1,9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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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

안동의 고고학적인 조사는 안동댐의 건설로 시작되었으나, 그 후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수몰 지역에 대한 한정된 조사로 그 한계가 있다.
최근의 조사에서 안동에도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들,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 간돌도끼, 돌칼, 돌화살촉 등이 발견되거나 조사되었다. 다만 신석기 시대의 유물, 유적이 발견 되고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 유적은 상당수가 조사되었는데, 가장 눈에 띠는 것이 고인돌이다. 안동시에 조사된 고인돌의 숫자가 100을 넘고 있는데, 이는 청동기 시대부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첩석이란 것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도 고인돌과 같이 거석(巨石)문화의 일종으로 보인다.

삼국 및 통일 신라시대

안동 영가지(永嘉誌)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안동은 삼한 때는 고타야(古陀耶)라고 하여 진한에 속하였으며, 삼국시대에 와서는 경북 북부 일대가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장이었던 까닭에 두 나라의 영토를 모두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때의 안동은 굴화현(屈火縣)으로 불리었으며, 예안은 매곡현(買谷縣)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현재 이 지역에는 고구려 문화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데 이는 고구려 영토의 최남단이었고 일시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안동 지역에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문화 유적으로는, 신라의 고분(古墳)이 대부분이다. 위치 하고 있는 곳은 주로 낙동강 좌우 연안으로 안동시 태화동, 풍산읍 막곡동, 와룡면 중가구동, 임하면 신덕동, 일직면 조탑동 등에 밀집되어 있다. 형식은 석실묘와 토광묘로 되어 있다. 이 시기에 안동 지방에 창녕국이 존재하였다고 하나 어떠한 형태로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안동이 본격적으로 신라의 영토에 편입.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은 통일 신라시대 이후이다. 경덕왕 때는 고창군(古昌郡)으로 이름이 바뀌어지고 있고 , 이 시기의 유적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데 대부분이 불교 유적이다. 봉정사의 극락전이 신라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고, 법흥사 7층 전탑, 평화동 3층 석탑 등을 비롯하여 안기동의 좌불, 옥산사 마애불 등이 중요한 자료이다.  이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것이 전탑(벽돌탑)이다. 이 전탑은 전국에서 유난히 안동에만 많은데, 아마도 이 지역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신앙체계가 다른 불교의 종파가 이곳에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고려 시대

오늘날 안동을 이야기 할 때 삼태사(三太師)로 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 등 안동을 대표하는 3성씨의 시조로 일컫는다. 이들은 權幸, 金宣平, 張吉  등 세사람인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한판 승부(甁山 전투)를 벌릴 때 왕건을 후원하였던 대표적인 호족들이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안동은 고창군에서 안동부로 승격되었는데, 이후 잠시 영가군으로 하였다가 고려 성종 14년(995) 길주(吉州)로 고치고 자사(刺使)를 두었다. 그 뒤 안동부, 안동도호부, 복주(福州), 안동도 등으로 바뀌었다.
현종 9년(1018)에 안동도호부가 되었는데, 이에 속했던 현은 모두 11개로 흥주(순흥), 의흥현(군위), 기천현(풍기), 은풍현(예천일부), 봉화현, 의성현, 강주(영주.순흥 일부), 보주(예천), 예안현, 의인현(예안일부), 안덕현(청송) 등이었는데 당시 안동지역의 범위를 추정할 수 있다.
고려 후기의 역사적 사건은 홍건적의 침입에 의한 공민왕의 피난이다. 이는 공민왕의 측근에 안동출신 신하가 많았고, 안동 주민들의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짐작케 하고 있는데, 놋다리 밟기라는 민속이 남아 있어 그 사실을 알게 한다.

고려시대의 안동 문화는 신라와 더불어 불교를 중심으로 발달해 왔는데, 봉정사 극락전, 도산면 용수사 옛터 등의 사찰 유적, 임하의 석탑들, 풍산 하리의 석탑, 제비원 석불 등의 유적이 있다. 현재 안동 지역 주변의 일백 수십개의 사찰 유적이 대부분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신라. 고려에 이어지는 불교 문화의 발달을 간과한 안동 문화의 이해는 한계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 안동대도호부에 소속된 현은 모두 9개로 오늘의 안동군, 봉화군을 포함한 지역인데 예안은 조선 말기까지 안동에 속하지 않은 독립현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개국공신 김사형, 초기의 대표적인 문인 권근, 중기에는 퇴계 이황 등에 의해 유학의 중심지로 등장하였다. 이황의 학문은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등에 이어져 소위 영남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유학의 발달과 조선의 억불정책은 고려조까지의 많은 불교 유적들을 파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며, 사찰의 파괴와 함께 서원의 건축을 가져 오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유성룡의 활약과 징비록(懲毖錄)의 기록은 오늘날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김성일은 전쟁 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와서 전쟁이 없을 것이란 보고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일본에서의 주체적인 외교활동, 전란 발발후 적극적인 전투 수행은 높이 평가 될 만하다. 또한 임란 당시 김해(金垓)의 의병 활동은 선구자적인 활동상을 보여 주었다.

17세기 이후 실학이 발생되어 그 논의가 활발하였으나, 안동은 유학의 전통이 깊은 곳인데다 학문적 보수성이 강하여 끝내 학문적인 실학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교 윤리적 보수성은 조선 말기 침략을 당하여 적극적인 투쟁에 가담하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데 이상룡, 김동삼, 류인식, 김지섭, 이만도, 김도화, 이육사, 권오설, 류림 등의 활약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 참고 자료: 안동 역사의 흐름. 『안동 문화의 이해(1)』안동문화 연구회. 임세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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