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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원정과 태풍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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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4-03-06 20:25 조회1,5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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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최후

삼별초군이 조선소를 대대적으로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정에서는 원나라에 전면적인 토벌을 제안했다. 원나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해에 주둔하고 있는 원군 2천 명, 고려군 6천 명 등 군사 1만 명과 전함 160척을 토벌군으로 편성하고, 고려의 수군 3천 명도 동원되었다.
맨 먼저 김방경이 지휘하는 기마병이 탐라에 상륙하여 접전을 벌였고, 나머지 토벌군이 외성으로 들어가 불화살로 공격을 퍼부어댔다. 삼별초군의 주력이 무너지자 김통정은 부하 70여 명을 거느리고 한라산으로 들어갔다. 김방경은 내성으로 들어가 삼별초 장수 35명과 군졸들과 그 가족 1,300여 명을 사로잡았다. 1273년 4월 28일 사세가 끝났다고 판단한 김통정은 한라산 언저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의 역사적 소임을 끝마쳤다.

고려.원의 일본 원정

1266년 쿠빌라이는 흑적과 은홍을 정, 부국신사로 일본에 보냈으나 그들은 거제도에서 뱃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되돌아갔다. 그후로도 쿠빌라이 정부는 끈질기게 여러차례 사절단을 보냈다. 그중 4번은 다자이후(태재부)까지 찾아와 쿠빌라이가 일본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교토조정과 가마쿠라 막부에 전하였으나 회신은 없었다. 1274년 바얀이 주도한 남송 진격의 측면작전으로 남송과 해상교통을 하고있던 일본을 견제하려고 쿠빌라이는 힌두, 홍다구 등에게 몽한 주둔군과 여진족부대 그리고 고려군 5천 6백명을 더하여 총 1만5천으로 일본원정을 명하였다. 몽골에 쫓긴 고려는 백성 3만 5천명을 동원하여 병선 900척을 뽑아냈다. 함선은 지휘관들이 주력과 함께 타는 천료주, 선봉에 서서 싸우는 바아토르 쾌속주, 그리고 급수를 위한 작은 비 전투용 배가 3백척 씩 이었다.
뱃사람도 포함하여 2만 7천의 려.몽함대는 합포(마산)를 출항하여 대마도와 이키를 석권한 뒤 음력 10월에 하까다 만에 상륙하였다. 대륙의 여러 부대는 집단전에 익숙하여 일본식 전투방식을 웃돌았다. 또 대륙의 합성 단궁은 일본식의 장궁에 비하여 3-4배정도 사정거리가 길었다. 공격군은 2만으로 1만도 안되는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몽골군은 인해전술과 화약을 터뜨려 쇠와 돌 파편을 날려보내는 석화시의 위력으로 폭음과 굉음에 단련되지 아니한 일본군과 군마를 놀라게 하였다. 일본군은 연안의 하까다, 하코자끼 등을 버리고 본영인 다자이부(태재부)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일본군의 불의의 야습 등을 피하여 원의 도원수 혼도가 김방경의 속전속결 주장을 묵살하고 하까다만의 함선으로 야간 대피를 시켰다. 그런데 그 함선을 엄청난 태풍이 습격하였다. 태풍이 불어닥치자 수많은 병선들은 암초와 암벽에 부서지고 1만 3천 5백의 목숨이 수장되었다. 돌아오지 못한 자는 대부분 사역된 고려의 사졸 들이었다. 연합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연합군은 싸워서 패한 것이 아니었다. 태풍이 없어다면 일본의 운명은 달라 졌을 것이다.
1차 원정 다음해 쿠빌라이가 파견한 두세충, 하문저, 사투르웃딘의 정식사절을 호조 집정부는 도전의 뜻으로 모두 살해하였다. 그리고 큐슈(구주)와 서일본을 중심으로 당번과 부역이 조직화되었다. 적군상륙이 예상되는 하까다만 일대에는 분할담당으로 석축지가 건설되었다. 또 호조도쿠소가를 정점으로 하는 군사 망이 만들어졌다. 몽골의 두 번째 일본원정은 처음보다 7년의 세월이 흘러 남송이 사라진 뒤에 이루어졌다. 1281년 항주의 바다관문이라 불리는 경원항(영파)에서 10만명을 태운 3천5백여 척의 강남군이 동중국해를 향해 출발하였다. 새로 만들어진 거함을 중심으로 옛것과 새것을 섞어 편성하였다.
1백만을 넘는 남송군은 대부분 몽골군에 항복하였다. 그들은 직업군인으로 급여생활자였다. 쿠빌라이는 전투력이 풍부한 우수병사들을 먼저 선발하여 시위친군이나 중앙아시아 전선에 투입하였다. 다음으로 선발된 자들은 광동, 광서 지역의 산악토벌전이나 육상진출이 가능한 베트남, 버마 등으로 출전시켰다. 그러나 아직도 실전에는 무익한 병사가 많았다. 쿠빌라이는 이러한 약병들을 제2차 일본원정에 투입하였다. 이리하여 합포의 동로군과 합하여 총 14만명의 대 함대가 일본을 향했다.
제2차 원정의 실제전력은 동로군이었다. 동로군은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힌두를 주장으로하고 홍다구도 함께 한 연합군과 김방경 휘하의 고려 병이었다. 실제전력도 1차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번에는 물가에서의 싸움이 되었다. 동로군은 쉽게 상륙할 수 없었다. 석축지에 근거한 일본군에 저지되어 고전하였다. 멀리서 온 원정군 부대를 상륙이전에 친다는 일본의 작전은 효과가 있어 동로군은 하까다만 해상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6월 방대한 강남군이 기타큐슈 서북부에 도착하였다. 이키에서 양군이 합류한 5천척이 넘는 함대는 배를 안전한 곳에 띄워놓기도 힘든 상태였다. 인마가 뒤엉킨 배에는 불결한 위생상태로 돌림병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급히 히라도만에서 다카시마 해역으로 이동하여 상륙을 위한 탐색전을 펼치는 동안 이번에는 거대한 풍랑이 밀어닥쳐 배가 뒤집어져 열명에 두세명 정도만 살아 남았다. 피해는 강남군에 집중되었다.
제2차 일본원정 뒤에도 긴장은 계속되었다. 호조 집정부는 맞받아 칠 태세를 풀지 않았으며 쿠빌라이도 본격적으로 일본원정에 나서려 하였다. 하지만 동방3왕가가 대 반란을 일으켜 동북아시아 전역이 전쟁터가 되자 일본정벌용 예비부대도 여기로 투입되었다. 그 6년후 쿠빌라이는 사망하였다. 그 뒤 중앙아시아의 카이두가 원조에 도전함으로서 일본원정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2차 태풍의 성격

1274년 10월20일의 밤 가미카제(神風)라는 태풍이 불어 거칠어져 몽고의 군선이 죄다 침몰 , 혹은 대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 지금의 과학지식에서는 이 시기에 일본 열도에 도래하는 태풍은 없고 , 게다가 「하카타만두를 목표로 하는 코스」를 잡는 태풍은 전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 강풍이 불었던 것은 사실 이라고 생각된다.
이동성의 저기압은 집중호우를 가져오고 , 태풍 같은 수준의 강렬한 악천후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센 바람이 불어 거칠어 졌다고 하는 음력의 10월20일은 , 태양력으로는 11월26일에 해당해 , 만추에 해당되는 이 시기는 센 바람비에 거칠어지는 날도 많다. 몽고군의 9백척에 이르는 큰 배단이 겐카이나다의 이키와 하카타의 사이의 바다에서 태풍급 수준에 강한 바람에 약 반수가 바다에 침몰 되었다. 원정군의 반수는 살아났다.

1281년 , 6월30일부터 다음윤 7월1일에 걸쳐 맹렬한 태풍이 큐슈 서부를 종단 했던 것이다.
지금의 태양력이면 , 8월23일의 무렵이다. 현재에도 , 2백10일에 가까운 이 시기에는 큐슈 북부에 내습하는 태풍은 매년 있어 ,지금도 폭풍우가 심대한 피해를 가져오고 있다.
몽고의 많은 선단은 , 히라도의 타카시마를 시작해 오도 열도까지의 해역에 집결하고 있어 , 더 후속 하는 선단이 남지나해를 북상중에 태풍을 만났다고 생각된다. 모두 거대 태풍의 진로에 해당되고 당시 의 배로 정박해 난을 피해도 파손은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상에 있으면 돌풍은 직접 배를 파괴해 버렸을 것이다.
몽고의 많은 선단은 , 한꺼번에 파괴되 파도에 가라앉아 , 거의 병사의 전원이 빠지고 죽어 갔다.
태풍의 맹위가 지나자, 타카시마에는 2천명 이상의 원병이 남겨졌다.
그중에, 배가 대파해 가까스로 침몰을 면해 섬 근처에 떠돌아 , 이미 병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카마쿠라의 무사들은 , 가차 없이 소탕잔적을 시작하었다.
그리고 , 홍안4년 7월7일 , 모든 싸움은 종결을 보았다.
그토록 날뛴던 바다는 맹렬한 싸움을 잊었는지 반짝반짝 물결은 조용하게 퍼지고 있었다.

자료수집 정리; 金泰瑞




▣ 김윤만 - 1274년10월20일. 음력일텐데, 양력으로 11월 말에 태풍이라 정말 이상하네요. 아믛튼 정리하시느라 수고하셨고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 김윤식 - 귀하고 흥미로운 자료 감사합니다.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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