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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忠烈公 송상현의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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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3-15 18:15 조회1,6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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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홈



1 시도기념물 66 (충북) 송상현묘소및신도비(宋象賢墓所및神道碑) 충북 청주시 흥덕구 여산송씨종중

2 보물 392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본문정보>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3 시도유형문화재 7 (부산) 충렬사(忠烈祠) <본문정보> 부산 동래구 충렬사관리사무소

4 시도유형문화재 223 (충북) 천곡송상현유물(泉谷宋象賢遺物) <본문정보> 충북 청주시 흥덕구 청주시

5 시도무형문화재 5 (부산) 충렬사제향(忠烈祠祭享) <본문정보> 부산 동래구

6 시도기념물 5 (부산)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 <본문정보> 부산 동래구 동래구

7 시도기념물 11 (부산) 송공단(宋公壇) <본문정보> 부산 동래구 동래기영회

8 시도기념물 13 (부산)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본문정보> 부산 동래구 동래구

9 시도기념물 16 (충북) 동래부사송상현충렬사(東萊府使宋象賢忠烈祠) <본문정보> 충북 청주시 흥덕구 송용준

10 시도기념물 21 (부산) 동래남문비(東萊南門碑) <본문정보> 부산 남구 부산광역시립박물관

11 시도기념물 42 (충북) 신항서원(莘巷書院) <본문정보>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유도회

12 시도기념물 74 (전북) 정충사지(旌忠祠址) <본문정보> 전북 정읍시 김성철







종 목 시도기념물 16호

명 칭 ■동래부사송상현충렬사 (東萊府使宋象賢忠烈祠)

분 류 사묘,제단

수 량 일원

지정일 1977.12.06

소재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05

소유자 사유

관리자 송용준



조선 전기 문신인 충렬공 송상현(1551∼1592)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선조 38년(1605) 당시 동래부사였던 윤훤이 세운 이 사당은 효종 3년(1652) 내산 아래 안락리로 장소를 옮겨 동재, 서재, 강당을 갖추고 ‘안락서원’이라 하였다. 송상현과 함께 임진왜란 때 충신 37분과 효열(孝烈) 4분을 봉안하고 있어서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무사하였다.



사당은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문화재명 동래부사송상현충렬사(東萊府使宋象賢忠烈祠)

이곳은 충렬공(忠烈公) 송상현(1551∼1592)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선쟁의 자(字)는 덕구(德求), 호(號)는 천곡(泉谷), 시호(諡號)는 충렬이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9년(1576)에 문과에 급제한 후 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역임하고 선조 24년(1591)에는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부사로서 동래성을 사수(死守)하기 위해 항전하다 순절(殉節)하였다. 광해군(光海君) 2년(1610) 공의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사당을 창건하였는데 그 규모는 3칸 팔작집이다.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223호

명 칭 ■천곡송상현유물 (泉谷宋象賢遺物)

분 류 고문서류기타

수 량 일괄(5건 10점)

지정일 2003.05.09

소재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여산송씨종중(충렬공파)

관리자 청주시



문화재명 천곡송상현유물(泉谷宋象賢遺物)

조선 선조 25년(1592)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재임 중 왜구(倭寇)에 맞서 목숨을 바친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의 업적을 알려주는 기록물들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동래성전투(東萊城戰鬪) 상황 및 천곡 송상현의 인품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천곡 송상현 유물은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1폭, 교지(敎旨) 3매, 치제문(致祭文) 4매, 혈선발(血扇跋) 1첩, 『천곡수필집(泉谷隨筆集)』 1책 등 5건 10점이다. 이들 유물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천곡 송상현의 일괄 유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이다.



동래부순절도는 효종 9년(1658) 동래부사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이 임진왜란 당시의 동래성 전투상황을 잘 아는 노인(老人)의 말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숙종 35년(1709)에 이 순절도를 모사한 동래부순절도가 보물 제392로 지정되어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지는 3매로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추증(追贈) 교지는 영조 17년(1741) 정이품(正二品)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던 천곡 송상현에게 다시 종일품(從一品) 숭정대부의정부(崇政大夫議政府)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한 교지이다. 부인 이씨(夫人 李氏) ‘정경부인(貞敬夫人)’ 추증 교지는 영조 17년(1741)에 종일품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된 천곡 송상현의 품직(品職)에 따라 부인 이씨에게 정경부인의 품계를 추증한 교지이다. ‘충렬공(忠烈公)’ 시호(諡號) 추증 교지는 천곡 송상현의 시호를 ‘충렬공(忠烈公)’이라 추증할 때의 교지이다. 교지의 말미부분(末尾部分)이 손상되어 시호와 교지를 내린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숭정대부’에 추증된 것으로 미루어 ‘의정부좌찬성’으로 추증되었을 때의 교지와 함께 하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치제문은 4매로 숙묘정유(肅廟丁酉) 사묘제문(賜墓祭文)은 숙종 43년(1717) 예조정랑(禮曹正郞) 김윤해(金潤海)를 송상현의 묘소로 보내 치제(致祭)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영묘경오(英廟庚午) 사묘제문(賜廟祭文)은 영조 26년(1750) 영조가 송상현의 묘소 인근을 지나다가 예조정랑 신일청(申一淸)을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영묘어제(英墓御製) 임진사묘제문(壬辰賜墓祭文)은 영조 48년(1772) 예조정랑 변경진(邊景鎭)을 송상현의 묘소로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순묘임진(純墓壬辰) 사동래단제문(賜東萊壇祭文)은 순조 32년(1832) 동래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 박제명(朴齊明)을 동래단(東萊壇)으로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혈선발은 송상현이 죽기를 결심하였을 때에 그의 대인(大人) 송화공(松禾公)을 영결(永訣)하면서 부채면(面)에 ‘고성월훈 열진고침 군신의중 부자은경(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이라 혈서(血書)한 16자가 전해지던 것을 조선 영조 31년(1756)에 윤봉구(尹鳳九)가 송상현을 칭송(稱頌)하여 제술(製述)한 것이다.



천곡수필집은 종가(宗家)에 전해오는 천곡 송상현의 유필(遺筆)로 추정되는 불분권(不分卷) 1책의 필사본(筆寫本)이다. 송상현이 개인적인 처신과 정치 및 학문에 관한 사항들을 당시 여러 선생들로부터 문답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표지를 포함하여 전체 52장(張) 1책이며, 표지의 해정(楷正)한 필체로 ‘천곡수필집(泉谷隨筆集)’이라 제첨(題簽)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서(序)’는 없고 내지(內紙)에 후손인 수일(秀一)이 쓴 ‘발(跋)’이 있다. 또한 수일이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문답에 대한 주제와 문답자가 정리되어 있다. 이 수필집은 필사시기(筆寫時期)와 그 경위도 분명치 않으며, 후손 수일의 발문(跋文)도 숭정(崇禎)4 임신(壬申, 1812)년으로 천곡 송상현 사거(死去)한지 200여년이 지난 후의 기록이다. 그러나 종가에 전해오던 것이므로 천곡 송상현이 직접 정리하고 필사(筆寫)한 것으로 추정된다. 송상현의 저술(著述)이 적지 않았음은 선생의 유저(遺著) 『천곡선생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임진왜란 때에 순절한 후로 많은 저술이 일실(逸失)되어 현재 『천곡선생집』 외에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



천곡 송상현 유물은 천곡 송상현이 조선 선조 25년(1592) 동래부사로 재임 중 왜구와 맞서 목숨을 바친 천곡 송상현 선생의 업적 및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전투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로서 역사자료 및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가치가 크다.







종 목 시도기념물 66호

명 칭 ■송상현묘소및신도비 (宋象賢墓所및神道碑)

분 류 묘

수 량 일곽

지정일 1984.12.31

소재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1

소유자 여산송씨종중

관리자 여산송씨종중



조선 중기의 충신 천곡(泉谷) 송상현(1551∼1592) 선생의 묘소이다.



선조 9년(1576)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며, 당시 잦은 왜구의 노략질과 왜적의 침입 소문에 대비하기 위하여 성곽을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성에 침입한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의 충적을 기리어 이조판서의 관직을 내렸다. 그리고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며 충신문을 세웠다.



강촌 묵방산에 자리잡은 이 묘는 원래 동래에 있던 것으로 광해군 2년(1610)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주위에는 상석과 문인석 등이 세워져 있으며, 묘의 오른쪽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묘소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것이다.



문화재명 송상현묘소및신도비(宋象賢墓所및神道碑)

이곳은 조선(朝鮮)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충신인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1551∼1592)의 묘소이다. 공(公)은 선조(宣祖) 9년(1576)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임진왜란때에는 동래(東萊) 부사(府使)로 있었다. 공은 동래성(東萊城)에 침입한 왜병(倭兵)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묘역은 강촌(剛村) 뒷산인 묵방산(墨坊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상석(床石), 양(羊),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과 우측에 묘비가 갖추어져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산 아래에 있는데, 화강석(花崗石)으로 이수(이首)에는 조각이 정교하며 효종(孝宗) 10년(1659)에 세웠다. 비문(碑文)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이정영(李正英)이 전자(篆字)를 썼다. 비는 높이가 280cm로 1980년에 보호각을 새로 지었다.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의 충적을 기리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충렬(忠烈)로 내리고 충렬사(忠烈祠)에 제향하고 충신문(忠臣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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