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낙서의 孫 김세익(1634-1698)의 글 (01)---강화도 충렬사 제문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4-03-23 17:49 조회2,080회 댓글0건

본문



■ 江都古今詩選제2집 (2001, 강화문화원)



● 忠烈祠 祭文 (좌승지 金世翊, 1634-1698)



깊숙이 병자 정축년에 있어서랴. 어찌된 운수인지 재앙을 만나다니. 임금의 수레는 떠나려 하는데, 장관의 말은 급함을 알려오니 조정은 물끓듯이 어지러워라. 먼저 섬으로 피신을 해야지, 임금이 계신 곳은 소식이 끊겨지고 소리쳐 도와주는 이 없네. 긴 강물로 띠를 둘러 있는데 이른바 험한 요새지라 믿고만 있었는데.



사람의 꾀로서는 선악을 가리지 않는데 북녘 오랑캐는 나는 듯이 건너 오네. 천작의 요충이라지만 창졸간에 빼앗겼으니 인축이 문드러져 산성에 그득하고 일반 백성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갈팡질팡 하는데 짐승도 놀라 뛰고 새는 숨기가 바쁘니 팔진미도 먹다가 버려야 하니 누가 일찍이 이를 분별하였으랴.



슬프다 그대 여러분 신하들이여 풍상은 급한데 굴하지 않는 분이 있으니 오직 이때의 元老인지라. 중요한 직분이 있는 것도 아니로데 용렬하게 결단을 내려 이곳에 부임하였으니 배운 것은 저버리지 않아 혹은 재상으로 봉직하면서 혹은 임금을 뫼시는 일에 앞장서는데 평복차림이 있었으니 음으로 보직되어 이바지 하였는데 서로가 이어서 이 나라에 신명을 바치었노라.



義는 중하고 생명은 가벼운 것이지, 하물며 여러 軍官에 이르기까지, 그 자취에 종과 편술관 패관 등이 있었으니 총책임자를 꾸짖으며 강물에 뛰어들었으며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중에 뛰어 들어가니 장수들은 패주하련만 우리는 열명 가운데 한 분이 살았겠지.



간은 이날 순국하였으니 신위야말로 비록 가지런하지 않아도 충신으로서는 서로가 짝지어 있노라. 예부터 난리에 있어서야 어찌 충의심이나 절개가 없을손가. 한편으로 드디어 모시었으니 더욱 높여야만 하네.



(이하 생략)



(註) 김세익은 수군절도사 삼도 통어사 도호부사로 本島(▶강화도)에 있었다.







■ 강화군청 홈페이지



● 충렬사 (忠烈祠)

시도유형문화재 21호

소재지 인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371



선원 김상용과 공조판서 이상길 외 26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김상용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인천이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자 순절한 충신이다.



인조 19년(1641)에 지어 현충사라 불렀으나, 효종 9년(1658)에 나라에서 충렬사라는 이름을 다시 받았다. 197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는 없어지고, 사당과 책을 보관하는 전사청· 출입문인 외삼문 등이 남아있다.

---











▣ 솔내 - @!!!

▣ 김항용 - 보고 싶었던 제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전문이 길은가 봅니다. 길지 않으면 본 홈에 올릴까 합니다.

▣ 김주회 - 강화문화원에서 펴낸 <강도고금시선 2집> 번역본 자체에 (이하 생략)으로 처리되어 있어, 출처와 전문을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김윤식 -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김태영 - 충렬사 제문 잘 보았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