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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의 孫 김세익(1634-1698)의 글 (03끝)---柳惠源(1632-1695)의 <허재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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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3-26 18:12 조회1,8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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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원(1632-1695)의 <허재집>에 보면

김세익(1634-1698) 선조님께서 전주부윤으로 계실 때 1687, 1688년경에 지은 글이 있습니다.



내용이 너무 길고 이해하기 어려운 글 2편은 생략하고 제목만을 일단 적어 두고,

쉬운 글 한 편은 소개해 봅니다.







■ 허재집 (원광대학 역)

虛齋와 그 文學 (원광대 교수 柳在泳)





● 謝宛山府伯金亮卿世翊助貝+盡石溪崔先生祠宇啓 /사완산부백김양경세익조○석계최선생사우계

鳳谷金東準沙溪石溪門人配此祠宇在全州府 /봉곡김동준사계석계문인배차사우재전주부

완산부윤 김양경 세익이 석계 최선생 사우에 부조한 걸 사례한 글

봉곡 김동준은 사계 석계 문인으로 이 사우에 배향되었는데 전주부에 있다.



---내용 9페이지 분량, 추후 보완---





*석계 최선생 :

*봉곡 김동준 :









● 謝宛山府伯金亮卿粧匣具籤於歷代史要啓 /사완산부백김양경장갑구첨어역대사요계

전주부윤 김양경이 역대사요에 장갑 구첨해 준 걸 사례하는 글



---내용 5페이지 분량, 추후 보완---





*歷代史要(역대사요) : 중국의 전국시대로부터 5대 말까지의 역사를 간추려 10권으로 엮은 책. 권청하 편찬

*權靑霞(권청하) :

*粧匣(장갑) : 책을 좋게 보존하기 위해 갑을 만들어 끼워 둠

*具籤(구첨) : 籤紙(첨지)를 붙여 둠. 찾기 쉽게 종이 쪽지를 붙여 둠









허재집 권지3

부록

● 安東金世翊贈虛齋序 /안동김세익증허재서

안동 김세익이 해재(▶유혜원)께 준 서문



내(▶김세익)가 전주부윤으로 있을 때 문서와 편지2) 로 바빠3) 한 가지 아름다운 정서도 없고 술잔 들고 시를 읊는 그러한 겨를 또한 거의 없었다. 정묘년(▶1687년 숙종13) 여름 공무가 조금 한가하여 두건을 벗어 놓고5) 의의정에서 아이들과 새로 자란 대 수백 그루를 완상했다.



그때 고부6) 김중심(金仲深)7) (金聖淵의 자는 仲深. 文科하여 결성현감 이조좌랑을 했는데 허재▶유혜원 門下에서 受業했다) 이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나의 스승 흥덕8) 유처사(▶유혜원)는 이름이 혜원(惠源)이고 자는 원중(源中)이며 세속을 벗어난 한 시인인데 그 심사를 논한다면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고 탐하는 것은 오직 술9)일 뿐인데 마침 일이 있어 이 부(全州)에 이르렀다" 고 했다.



나는 처음 문인(文人) 운사(韻士)로 알고 소동을 보내어 맞아 왔는데, 상대하니 용의가 소박하고 수염과 머리가 희였으며 혼연히 지란의 방에 들어 앉은 듯 향기로왔다. 함께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내며 백가서를 다 논해 보았는데 계합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가 지었다고 하는 시문을 외는데 거의 조금도 이속한 말이 없어 그 내력을 알아보니 ★권청하의 문인이었다.



그가 뜻이 있는 것을 알만한데 먼지를 털 즈음에 그 손가락이 끊어진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척연(戚然)하여 중심(▶김성연)에게 물어보니, 연전에 그 어버이 병에 단지 진혈하여 바로 회소되었고 지금까지도 근심없이 살아 계시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나는 듣고 섬찍하나 공경심이 나 중심에게 말하기를,

"어버이를 위한 정성 지극하다. 임종 창황 중에 이렇게 하기 진실로 어렵고 하물며 그 피를 드려 오늘이 있게 한 것은 참으로 이른 바 성효의 소감이 백행의 근원인 이에 있다 하겠다. 이 어찌 문인 운사로 대접해도 좋으리오"

드디어 눈물을 씻고 술을 두어 잔 권한 뒤에 정자에 머물게 하고 글과 술의 즐거움으로 허일이 없었으니 지난 적 부서(簿書)의 괴로움을 조금 잊었다.



한 보름쯤 되어 문득 돌아간다 알리기에 말려도 그치지 않는 것은 차마 어머님10)을 오래 떠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에 또 왔었고, 이제까지 무릇 세 번 이르렀는데 그 부지런히 와 상방하는 뜻을 감동할 만하다.



나는 그 사는데 청취(淸趣)가 있느냐고 물으니, 집이 가난하기에 겨우 두어 간 집을 얽어 양친하는 겨를에 형제숙질이 한방에 단란하게 모여 술 한병 고기 한 마리라도 함께 그걸 들었으며 술마신 즐거운 여흥으로 때에 따라 시를 짓되 그 공졸은 헤아리지 않고 계산의 좋은 경치도 없지 않으나 지극한 즐거움은 이 집 이름 한 허(虛)자와 바꾸기 어려우니 내 뜻을 아리로다 했다.



나는 웃으면서 짓궂게 말하길

"허중수물(虛中受物)11) 한다로 군자가 하는 것은 이 어찌 집을 이름한 뜻이리요." 하니,

말하길

"아니다. 장자(南華子)12)의 말에 허실생백(虛實生白)13) 한다는 것은 오직 도집허의(道集虛義)14) 이니 대개 여기에서 땄다." 고 했다.



나는 말하기를,

"선생(▶ )은 근본 ★청하에게서 수업하고 청하는 ★사계(沙溪) 김선생의 문인이라 일생용공(一生用功)이 우리들에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어찌 꼭 장수(莊손수변빼고搜)15)의 말을 끌어다가 호했는가" 하니, 말하기를,

"나는 호락(瓠落)16) 해서 때의 모습에 맞지 않고 말이 어지러워 때의 귀에 맞지 않으며, 모습이 고목(槁木)17) 같아 오래도록 멍하니 앉아 저 대방가(大方家)의 비웃음을 면치 못했다. 오직 그 근본 뜻은 올빼미와 썩은 쥐를 다투지 않으니, 그렇다면 장자의 말을 버리고 내 집을 이름할 수 없다." 고 했다.



내 듣고 옳게 여겨 마침내 허재(虛齋)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돌려 주고 그 강산의 승경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처사의 즐거움 같은 것은 이에 짐짓 생략한다.



아아, 바야흐로 이제 성상(▶숙종)께서 효도로 국가를 다스리니 포록(褒錄)할 은전이 아마도 꼭 머지 않아 처사(▶유혜원)의 집에 내려지리라. 내가 순복(淳複)18) 하는 것은 백행의 근원(孝)이기 때문에 이걸로 이에 서문한다.



때는 숭정후 무진(▶1688, 숙종14) 팔월 이십 사일











▣ 솔내 - 연재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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