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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동문선; 송당 선생 김공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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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03-26 18:19 조회1,5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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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에서 인용하면



선생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광식(光軾)이고, 자(字)는 자여(子輿)이며, 호는 송당거사(松堂居士)이니, 광주(光州) 사람인 사공(司空)김길(金吉)의 후손이다.



그러나 안동김씨족보에서 찾아보면 양간공(휘 승택)의 사위는 김光載라고 되어 있으며

디지펄한국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광재(金光載)



시대 고려

생몰년 1289-1363(충렬왕15-공민왕12)

본관 광산(光山)

자 자여(子輿)

호 송당(松堂)

시호 문간(文簡)

활동분야 문신



김광재(金光載)

1289(충렬왕 15)∼1363(공민왕 12).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여(子輿), 호는 송당(松堂). 중찬(中贊) 태현(台鉉)의 아들이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 성균학관이 되고,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공로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승진, 이어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1339년(충혜왕 복위 1) 조적(曺#적42)이 난을 일으켰다가 복주된 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호종하였으며, 돌아와서 군부총랑(軍簿摠郎)이 되고,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올랐다.

이듬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군준(李君俊)과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대신들이 아부하지 않는다고 모함,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전임되었으며, 이어 밀직부사·제조전선(提調銓選)을 지내고 지사사(知司事)에 승진하였다.

1349년 충정왕이 즉위하자 서연(書筵)의 설치와 함께 그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에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어 인사권을 맡았으나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정사에 간섭이 심하여 물러났는데, 뒤에 덕녕공주가 수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1350년(충정왕 2)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는데, 이때 정방(政房)에서 문선(文選)과 무선(武選)을 총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이를 시정하도록 하였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직하였다.

1351년 공민왕 즉위 후 12년간이나 은거하며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어머니가 죽자 여막에서 상을 마쳤으므로 왕이 가상히 여겨 사는 곳을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 정표(旌表)하고 그 마을의 호(戶)일부에 부역과 조세를 면제하여 이를 봉사하게 하였다.

효제(孝悌)에 힘써 생산에는 관심이 없었고, 항상 금(琴)과 서(書)를 가까이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어딘가에 오류가 있는 듯합니다만. 디지탈한국과 족보를 보면 동문선에 오류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 김윤식 - 대부님 감사합니다.

▣ 김윤만 - 김광식(光軾)-김광재(光載) 이런 경우가 흔히 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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