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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신돈과 우리가문 15---포은 정몽주 (1337-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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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4-06 18:12 조회1,8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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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한국학



정몽주(鄭夢周)

시대 고려

생몰년 1337-1392(충숙왕복6-공양왕4)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시호 문충(文忠)

활동분야 문신, 학자

다른 이름 정몽란(鄭夢蘭)/정몽룡(鄭夢龍)



1. 가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운관(云瓘)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임신하였을 때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하였다가 뒤에 몽룡으로 개명하고, 성인이 된 뒤에 다시 몽주라 고쳤다.



2. 관직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하여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모해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이듬해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하여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그는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아 슬픔과 예절을 모두 극진히 하였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이듬해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 朱子集註》에 대하여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르게 뛰어나 모두들 의아해하더니,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 四書通》이 전하여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고, 대사성 ★이색(李穡)이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 사예·직강·사성 등을 역임하고,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파선을 당하여 일행 12인이 익사하고, 정몽주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생략---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太宗實錄, 圃隱集, 治平要覽, 鄭夢周(金庠基, 朝鮮名人傳, 文豪社, 1965)

鄭夢周(河炫綱, 韓國의 人間像 1, 新丘文化社, 1969). 〈朴千圭〉











▣ 김태영 -

▣ 김윤식 - 김득배와의 새로운 사실을 더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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