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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집: 연안(延安)이공(李公)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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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4-04-14 09:43 조회1,5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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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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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on09.gif 연안(延安)이공(李公)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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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만력(萬曆) 신묘년에 상(上)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일본의 추장 수길(秀吉)이 바다를 해자(垓子)로 삼고 한쪽 구석을 의지하여 이웃 나라에 공갈 위협을 가하다가, 침학 행위를 우리에게 자행하기 시작하여 끝내는 중국을 침략할 목적에서, 스스로 영웅인 체 교만을 부리면서 불손한 말을 내뱉고 있으니, 그 화복(禍福)의 이치를 엄중히 유시하여 간악하고 광패한 행동을 미리 꺾어서 두 번 다시 방종하지 못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해인 임진년에 수인(戍人)이 달려와서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했다고 외치었다. 이때 왜구는 부산(釜山), 동래(東萊)를 함락하고, 재를 넘고 호수를 건너서 무엄하게 내지(內地)를 밟아 들어와 잠깐 동안에 드디어 우리 사경(四境)을 크게 유린하였다. 그러자 당시에 통제사(統制使)이순신(李舜臣)은 수군(水軍)으로 한산(閑山)을 거수(拒守)하면서 적의 예봉을 해상에서 꺾었고, 절도사(節度使)김시민(金時敏)은 고군(孤軍)으로 진양(晉陽)을 지키면서 남주(南州)의 난(難)을 방어하였으며,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은 의병(義兵)으로 연안(延安)을 지키면서 앞에서 충성을 떨치었고, 원수(元帥)권율(權慄)은 남군(南軍)으로 행주(幸州)에 주둔하여 뒤에서 적의 예봉을 꺾었다. 또 마침 천조(天朝)의 대장군(大將軍)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이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평양(平壤)의 적을 격파함으로써 성세(聲勢)가 신장되어 서로 사방에서 기각(掎角)의 형세로 적을 협공하여 우리 삼경(三京)을 수복하고 재차 팔도(八道)를 온전하게 하였다. 그러자 천자(天子)가 조서를 내려 칭찬하고 금(金)을 하사하였다. 그래서 이에 천하의 유담(游談)하는 이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무부(武夫)는 그것이 직무이거니와, 유자(儒者)도 또한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을사년에 상이 공신(功臣)으로 책록하여 상(賞)을 내렸다. 또 그로부터 4년 뒤인 무신년에 연안인(延安人)으로 공의 공적을 기재해서 영원히 전하기를 꾀하는 이가 있어 나에게 와서 명(銘)을 청하였는데, 사양해도 되지 않았다.
삼가 상고하건대, 고(故)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議政府右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월천군(月川君)이공(李公)의 휘는 정암(廷馣)이고 자는 모(某)이다. 공이 이조 참의가 되었을 때에 주상(主上)이 서쪽으로 몽진하면서 공의 아우인 정형(廷馨)이 앞서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으면서 은혜를 끼친 것이 없어지지 않았다 하여 정형에게 개성에 머물러서 진무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정형이 형과 함께 가서 지키기를 요청하여 공과 함께 갔었다. 그랬다가 임진(臨津)의 군대가 궤멸됨에 미쳐서는 공이 형편을 가려서 나누어 지킬 계책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8월 22일에 연안(延安)에 당도하니, 부중(府中)의 유지인 송덕윤(宋德潤), 조광정(趙光庭) 등이 백여 인의 무리를 모아 놓고 공을 맞이하며 말하기를,
“공의 옛 은혜가 본토(本土)에 있으니, 여기에 머물러서 우리를 살려 주기 바랍니다.”
하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오늘에야 죽을 곳을 얻었도다.”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성(城) 안으로 들어가서 5백여 인을 모집하여 그들을 이끌어 통제하며 말하기를,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사문(四門)의 자물쇠를 관장해 주려는가. 누가 능히 갑옷을 입고 성가퀴에 올라가서 적들로 하여금 감히 참호를 범접하지 못하게 하겠는가. 누가 능히 우리 군량을 관장해 주겠는가. 누가 우리 기계(器械)를 수리해 주겠는가.”
하고, 재능에 따라 부서를 나누어 편성한 다음, 돈대(墩臺)에는 대포(大砲)를 모아 진열하고, 그 곁에는 솥을 줄지어 걸어 놓으니, 노약자들도 일을 돕고 뭇사람들이 다 직무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달 28일에 적추(賊酋)장정(長政)이 재령(載寧), 신천(信川) 등 여러 군(郡)을 겁략(劫掠)하고 해주(海州)를 함락시킨 다음, 군사 3천여 인 및 강음(江陰)의 적들을 거느리고 정예한 군대를 총동원하여 쳐들어오자, 성중(城中) 사람들이 크게 놀라서 진(陣)을 나가려는 자가 있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병민(兵民)들과 사생(死生)을 함께하기로 약속해 놓고 백성을 죽을 자리에 빠뜨리면서 자신의 일만 성취하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참으로 몹시 공포를 느끼는 자는 스스로 성을 나가도록 맡겨 두고 너희들을 구속하지 않겠다.”
하니, 온 군중(軍中)이 모두 사수(死守)하기를 원하였다.
이날 해가 이미 기울었을 때, 적들이 진격해 와서 세 겹으로 성을 포위하였다. 이윽고 한 적수(賊帥)가 성 밖을 두루 살피고 성루(城壘)에 접근하여 지나가는데 그 형세가 매우 치장하였다. 이때 문장(門將) 장응기(張應棋)가 일전(一箭)을 쏘아 그의 가슴을 관통시켜 죽이자, 적의 사기가 몹시 저상되어 감히 함부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적들이 별도로 서성(西城)에서 비충(飛衝)주D-001을 이용하여 성중을 내려다보고 대포(大砲)를 쏘아 대니, 화전(火箭)이 어지러이 발사되었다. 그런데 포위된 안에는 초옥(草屋)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연기와 불꽃이 밖으로 흩어져 버리니, 적의 계책이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적들이 여사(盧舍)를 훼철하여 참호(塹壕)를 메우고, 마침내 북을 울리는 가운데 군졸들이 성벽을 기어올라 떼를 지어 개미처럼 붙어 오르므로, 공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이에 쌓아 둔 마초(馬草) 위에 앉아서 아들 준(濬)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성이 함락되거든 분신 자결(焚身自決)해야 한다.”
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감읍(感泣)하여 모두 힘을 합쳐서 함께 죽기로써 싸웠다.
무릇 4일 동안을 이렇게 싸우다 보니, 적들 또한 사상자가 절반을 넘었으므로, 이날 밤에 적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그리하여 적들은 이미 죽은 병졸의 시체들을 한데 모아서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그 이튿날 아침에야 포위를 풀고 떠났다. 그래서 아군(我軍)은 겨우 적병의 목 18급(級)을 베고, 우마(牛馬) 90여 필과 군량 1백 30여 석을 탈취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공이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하(上下)가 모두 근심하여 위태롭게 여겼는데, 첩보(捷報)가 이름에 미쳐서는 다만,
“적이 모일에 성을 포위했다가, 모일에 포위를 풀고 갔다.”
라고만 말하였고, 장황(張皇)한 말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 의논하는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을 물리치기는 쉬우나, 자기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고 하였다. 그러자 상(上)이 공에게 특별히 가선(嘉善)을 더하여 본도(本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서 문무(文武)의 장관(將官)들이 모두 공의 절제(節制)를 받게 하고, 인하여 제장(諸將) 이하에게 상을 내렸다.
공이 군문(軍門)에 있을 적에 거가(車駕)는 서쪽으로 용만(龍灣)에 행행하였는데, 공은 몹시 더운 절기에 중병(重兵)을 거느리고 송경(松京)에 웅거하여 황주(黃州), 봉산(鳳山)에 군영(軍營)을 배열해서 강음(江陰)까지 죽 연결시키고, 패강(浿江)을 위동(危動)시키면서 곧바로 관서(關西)를 요동시켰다. 이때 적장 장정(長政)은 바닷가에서 미쳐 날뛰면서 병졸들을 놓아 사방으로 겁략을 자행함으로써 남로(南路)가 막혀 끊어졌었는데, 공이 한바탕 싸움을 벌여서 그들의 예봉을 꺾어 버리니, 적들은 숨이 차고 땀이 흘러서 스스로 겁략을 중지하였고, 꼴 베고 말 먹이는 적들도 감히 공의 성(城) 아래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해서(海西)의 십삼주(十三州)가 모두 다시 우리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남(二南)의 근왕병(勤王兵)들이 아산(牙山), 강화(江華)를 경유하여 용강(龍岡)을 건너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해서 분문(奔問)할 길이 있게 되고 수륙(水陸)의 화물 운송에도 장애가 없게 된 것은 모두 공의 힘이었다.
공은 경주인(慶州人)으로 나와 시조(始祖)가 같아서 서로 좋게 지냈었다. 나이 18세에 상상(上庠)에 올랐고, 21세에 명경(明經)으로 급제하였다. 잠시 지방의 수령이 되었을 적에는 백성들이 소두(召杜)주D-002로 호칭하였고, 전형(銓衡)에 참여함에 미쳐서는 세상에서 요송(姚宋)주D-003으로 기대했으며, 여사(餘事)로 여긴 문장(文章) 또한 세상을 울린 것이 많았다.
그런데 불행히 난리를 만나 소륵(疏勒)에 공훈이 빛나서,주D-004 국가 중흥의 우두머리가 되고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작질이 오르고 공훈이 높아서 큰 제사를 흠향하고, 국은(國恩)이 조선(祖先)에게 미루어져서 일의 기록이 끝없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미 충효(忠孝)를 겸전하였고 문무(文武)의 재능을 둘 다 지니었으니, 공과 같은 위인은 참으로 장부(丈夫)라 하겠다.
   
[주 D-001] 비충(飛衝) : 적진(敵陣)에 돌진(突進)하는 병거(兵車)로서, 즉 충거(衝車)의 별칭이다.
[주 D-002] 소두(召杜) : 지방민(地方民)들이 태수(太守)의 선정(善政)을 칭찬하여 이른 말이다. 전한(前漢) 때 소신신(召信臣)이 일찍이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 많은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이민(吏民)들이 그를 친애(親愛)하여 소부(召父)라 호칭했는데, 후한(後漢) 때 두시(杜詩)가 또 남양 태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자, 남양의 백성들이 말하기를, “전에는 소부(召父)가 있었고, 뒤에는 두모(杜母)가 있도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 D-003] 요송(姚宋) :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상(名相)인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을 합칭한 말이다.
[주 D-004] 소륵(疏勒)에 공훈이 빛나서, : 왜란(倭亂) 때에 왜적을 물리치고 지방민들을 잘 보호했음을 비유한 말이다. 소륵은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인데, 후한(後漢) 때 반초(班超)가 장군으로 서역에 출정(出征)하여 구자(龜玆)에게 멸망당한 소륵을 다시 세워서 오랫동안 돌봐 주어, 심지어는 소륵 사람들이 반초를 부모처럼 의지했던 데서 온 말이다.《後漢書 卷四十七 班梁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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