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용장서원 배향인물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4-04-30 01:47 조회1,535회 댓글0건본문
배향인물
1)김구용(金九容)
본관(本貫)안동(安東)
자(字) 경지(敬之)
호(號) 척약재(척若齋)
이력(履歷)
문온공[文溫公] 대사성공[大司成公]
자(字) 경지(敬之). 호(號) 척약재(척若齋). 초명 제민(齊閔).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 그 뒤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主簿)를 거쳐 민부의랑(民部議郞) 겸 성균관직강(直講)이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자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등과 성리학을 일으키고 척불숭유의 선봉이 되었다. 친명파로서 1375년(우왕 1) 삼사좌윤으로 있을 때, 이숭인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등과 함께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1381년 풀려나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이듬해 대사성 ·전교시판사가 되었다.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1384년에 행례사(行禮使)로서 명나라에 가던 중 요동에서 붙잡혀 난징[南京]으로 압송, 영녕(永寧)현에서 병사하였다. 사장(詞章)을 잘하였으며, 《동문선》에 8편의 시가 전한다. 문집에 《척약재문집》, 저서에 《선수집(選粹集)》 《주관육익(周官六翼)》 등이 있다
여조십이가 [ 麗朝十二家 ] 문장가중의 한분이다.
고려시대의 12문장가.
김부식(金富軾) ·정지상(鄭知常) ·김극기(金克己) ·이인로(李仁老) ·진화(陳화) ·홍간(洪侃) ·이제현(李齊賢)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이규보(李奎報) ·이색(李穡) 등이다.
2)양능양(梁能讓)
본관(本貫)남원(南原)
호(號)돈암(遯菴)
이력(履歷)
호(號)는 돈암(遯菴), 병부공파(兵部公派) 파조(派祖)로 976년(경종 1) 봉사(奉事)를 지낼 때 송(宋)나라에 들어가 국자감(國子監)에서 김행성(金行成)과 같이 전례(典禮)와 경의(經義)를 강(講)하고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으며 귀국(歸國)하여 학교를 설립하며 영재육성(英才育成)에 힘썼다. 성종(成宗) 때 중봉대부(中奉大夫)에 책록되었고 병부 낭중(兵部郞中)을 거쳐 동궁내 시강학사(東宮內侍講學士)에 이르렀다. 1003년(목종 6) 김치양(金致陽)이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皇甫)와 사통(邪通)하여 낳은 아들로 왕위(王位) 계승을 꾀하여 대양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죽일 음모를 꾀하는 난정(亂政)을 피하여 그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남(湖南) 용성(龍成)의 풍악산(楓岳山) 아래 중산동(中山洞)에 은거(隱居)하여 평생을 살았으며 용장서원(龍章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3)양주운(梁朱雲)
자는 효직 호는 삼강 고려원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중윤에 이르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정주의주를 갖이고 와서 널리 포교하는데 공을 세웠다. 삼벌초의 난을 김방경과 함께 몽고군 철기 30만을 이끌고 제주에 들어가 토벌하고 도민을 안무한 공으로 찬화공신 삼중대광에 책록되였으며 정당문학에 관직이 올랐으며 용성부원군에 봉하여 졌다.
4)양대박(梁大樸)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사진(士眞), 호는 송암(松巖)·죽암(竹巖)·하곡(荷谷)·청계도인(靑溪道人).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관(學官)으로서 아들 경우(敬遇)와 가동(家#동06) 50명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해 6월 고경명(高敬命)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하고 유학(幼學)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같은달 7일 정군(整軍)하고, 8일 출사(出師)하자 그는 전주로 가서 의병 2, 000명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과로로 발병하여 진산(珍山)의 진중에서 죽었다.
1786년(정조 10)10월 전라도 진사 이진희(李鎭熙) 등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병조참의로 추증되었으며, 1796년 9월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兼兵曹判書)로 개증(改贈)되었다.
저서로는 《청계집 靑溪集》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침략에 맞서 청계동을 근거지로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장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양대박 의병장이다. 양 의병장은 중종 39년(1544)에 남원 양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불의를 보면 결코 참지 않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늘 너그러운 성품이 호탕한 사람이었다. 그가 오룡마(烏龍馬)라는 준마를 타고, 가보인 명검을 휘두르며 무예를 익히는 모습은 당시 백성들이 보기에도 큰 볼거리였던 듯하다. 백성들의 인심을 얻은 양 의병장은 청계동에 들어와 광활한 전답을 확보하고, 이곳에 亭子(9동), 內外舍(2동), 奴家(14동) 등 총 25동의 건물을 짖고 청계마을을 형성, 평시에 屯田兵을 조직 유사시 유효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스스로를 청계산인(靑溪山人)이라 지칭하고 김상헌, 정철, 고경명, 김장생 등과 교우하면서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그를 역사는 가만두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병들이 일어서자 양대박 의병장도 고경명, 유팽로와 함세하여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그는 모든 가산을 군량미로 내놓고 3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왜적과 전투를 벌인다. 그는 담양에서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 본인은 우부장, 유팽로는 좌부장이 되어 임진년 6월에 군사를 출진, 전북 임실 운암전투에서 왜적과 교전 1000여 명을 격살하는 대첩을 이룬다
▣ 김윤만 - 남원양씨 가문과 척약재 할아버님은 무슨 특별한 인연이 계셨나요?
▣ 김항용 -
1)김구용(金九容)
본관(本貫)안동(安東)
자(字) 경지(敬之)
호(號) 척약재(척若齋)
이력(履歷)
문온공[文溫公] 대사성공[大司成公]
자(字) 경지(敬之). 호(號) 척약재(척若齋). 초명 제민(齊閔).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 그 뒤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主簿)를 거쳐 민부의랑(民部議郞) 겸 성균관직강(直講)이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자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등과 성리학을 일으키고 척불숭유의 선봉이 되었다. 친명파로서 1375년(우왕 1) 삼사좌윤으로 있을 때, 이숭인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등과 함께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1381년 풀려나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이듬해 대사성 ·전교시판사가 되었다.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1384년에 행례사(行禮使)로서 명나라에 가던 중 요동에서 붙잡혀 난징[南京]으로 압송, 영녕(永寧)현에서 병사하였다. 사장(詞章)을 잘하였으며, 《동문선》에 8편의 시가 전한다. 문집에 《척약재문집》, 저서에 《선수집(選粹集)》 《주관육익(周官六翼)》 등이 있다
여조십이가 [ 麗朝十二家 ] 문장가중의 한분이다.
고려시대의 12문장가.
김부식(金富軾) ·정지상(鄭知常) ·김극기(金克己) ·이인로(李仁老) ·진화(陳화) ·홍간(洪侃) ·이제현(李齊賢)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이규보(李奎報) ·이색(李穡) 등이다.
2)양능양(梁能讓)
본관(本貫)남원(南原)
호(號)돈암(遯菴)
이력(履歷)
호(號)는 돈암(遯菴), 병부공파(兵部公派) 파조(派祖)로 976년(경종 1) 봉사(奉事)를 지낼 때 송(宋)나라에 들어가 국자감(國子監)에서 김행성(金行成)과 같이 전례(典禮)와 경의(經義)를 강(講)하고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으며 귀국(歸國)하여 학교를 설립하며 영재육성(英才育成)에 힘썼다. 성종(成宗) 때 중봉대부(中奉大夫)에 책록되었고 병부 낭중(兵部郞中)을 거쳐 동궁내 시강학사(東宮內侍講學士)에 이르렀다. 1003년(목종 6) 김치양(金致陽)이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皇甫)와 사통(邪通)하여 낳은 아들로 왕위(王位) 계승을 꾀하여 대양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죽일 음모를 꾀하는 난정(亂政)을 피하여 그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남(湖南) 용성(龍成)의 풍악산(楓岳山) 아래 중산동(中山洞)에 은거(隱居)하여 평생을 살았으며 용장서원(龍章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3)양주운(梁朱雲)
자는 효직 호는 삼강 고려원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중윤에 이르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정주의주를 갖이고 와서 널리 포교하는데 공을 세웠다. 삼벌초의 난을 김방경과 함께 몽고군 철기 30만을 이끌고 제주에 들어가 토벌하고 도민을 안무한 공으로 찬화공신 삼중대광에 책록되였으며 정당문학에 관직이 올랐으며 용성부원군에 봉하여 졌다.
4)양대박(梁大樸)
1544(중종 3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사진(士眞), 호는 송암(松巖)·죽암(竹巖)·하곡(荷谷)·청계도인(靑溪道人).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관(學官)으로서 아들 경우(敬遇)와 가동(家#동06) 50명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해 6월 고경명(高敬命)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하고 유학(幼學)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같은달 7일 정군(整軍)하고, 8일 출사(出師)하자 그는 전주로 가서 의병 2, 000명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과로로 발병하여 진산(珍山)의 진중에서 죽었다.
1786년(정조 10)10월 전라도 진사 이진희(李鎭熙) 등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병조참의로 추증되었으며, 1796년 9월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兼兵曹判書)로 개증(改贈)되었다.
저서로는 《청계집 靑溪集》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침략에 맞서 청계동을 근거지로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장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양대박 의병장이다. 양 의병장은 중종 39년(1544)에 남원 양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불의를 보면 결코 참지 않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늘 너그러운 성품이 호탕한 사람이었다. 그가 오룡마(烏龍馬)라는 준마를 타고, 가보인 명검을 휘두르며 무예를 익히는 모습은 당시 백성들이 보기에도 큰 볼거리였던 듯하다. 백성들의 인심을 얻은 양 의병장은 청계동에 들어와 광활한 전답을 확보하고, 이곳에 亭子(9동), 內外舍(2동), 奴家(14동) 등 총 25동의 건물을 짖고 청계마을을 형성, 평시에 屯田兵을 조직 유사시 유효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스스로를 청계산인(靑溪山人)이라 지칭하고 김상헌, 정철, 고경명, 김장생 등과 교우하면서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그를 역사는 가만두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병들이 일어서자 양대박 의병장도 고경명, 유팽로와 함세하여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그는 모든 가산을 군량미로 내놓고 3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왜적과 전투를 벌인다. 그는 담양에서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 본인은 우부장, 유팽로는 좌부장이 되어 임진년 6월에 군사를 출진, 전북 임실 운암전투에서 왜적과 교전 1000여 명을 격살하는 대첩을 이룬다
▣ 김윤만 - 남원양씨 가문과 척약재 할아버님은 무슨 특별한 인연이 계셨나요?
▣ 김항용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