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Re:남원양씨의 인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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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4-04-30 01:55 조회1,795회 댓글0건본문
양씨의 인물들
양헌수(梁憲洙)
【생몰년】 1816(순조 16)∼1888(고종 25) 【본 관】 남원(南原) 양(梁)【자·호】 경보(敬甫)【시 호】 충장(忠莊)조선 후기 무신
1816(순조 16)∼1888(고종 25).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로서 부사정 양종임(梁鍾任)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면서 무예를 익혔다. 헌종 14년(184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철종 때 참상관(參上官)에 올랐다. 고종 3년(1866) 어영청의 천우위(千摠)으로 있으면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강화도 정족산성(鼎足山城)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프랑스함대의 로즈제독이 보낸 해군대령 올리비에의 부대 160여 명을 맞아 다수를 살상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려 프랑스군을 물리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 병마절도사사를 지내고, 1873년 어영대장, 1874년 좌변 포도대장, 1875년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金炳學), 홍순목(洪淳穆) 등과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斥和論)을 끝까지 주장하였다. 1882년 재집권한 대원군에 의해 다시 설치된 삼군부(三軍府)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임명되었으며, 1884년 공조 판서, 1887년 독련사(督鍊使)가 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高宗時代史
양성지 (梁誠之) 병부공파 후 13세 문양공파 파조
양성지의 자는 순부요 호는 눌재 또는 송파이다. 본관은 남원이 다. 그는 구주의 아들로 조선 태종 14년(1415)에 태어나 성종 13 년(1482)에 죽었다. 세종 23(1441)에 생진문과에 합격한 뒤 경창 부승 성균전적 등을 엮임. 훈구파의 중진으로써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 교리 등을 거치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뒤 춘추관 기주관 고려사수사관을 겸직하여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기도 하 였다. 집현전 직제학에 승진되었다. 단종 1년(1453)에는 왕의 명 을 받아 <조선도도> <팔도각도>를 작성하였다. 다음해 <황극치 평도>를 작성하여 왕에게 올렸다. 예종 1년(1469) 그는 지중추관 사를 겸직하면서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다음해 성종 1년(1470)에는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모든 학문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능통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로는 <눌재집> <시정기> <삼강사략> <동국도경><농잠서> <축목서> <고려사지리지>등이 있다.
대포서원
○ 종 별 : 향토유적 제1호
조선전기의 대학자이며 문신인 양성지(梁誠之 1451∼1482)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우(祠宇)이다.
선생의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송파(松坡) 본관은 남원(南原), 구주(九疇)의 아들이다.
세종 23년(144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이후 훈구파의 중진으로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고려사 개찬(改撰)에 참여했고 팔도지리지 동국지도 등을 찬진(撰進)했다.
위치 김포시 양촌면 대포리 산32 번지 종손 양원규 031-988-9405
양능양 (梁能讓)
號는 돈암 兵部公派 派祖로 976년 고려 경종 1년 봉사를 지낼 때 宋 나라에 들어가 國子監에서 金行成과 같이 典禮와 經義를 講하고 賓貢科에 급제를 하였으며 귀국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영재육성에 공헌하였으며. 성종때 中奉大夫에 책록되였고 兵部 郞中을 거처 東宮 內 侍講學士 에 이르렀다.
1003년 목종 6 년 김치양이 천추태후 황보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로 왕위 계승을 꾀하여 대량원군 순을 죽일 음모를 꾀하는 난정을 피하여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호남 용성의 풍악산 아래 중산동에 은거 하며 평생을 살았으며 용장서원에 제향 되였다.
양주운(梁朱雲)
자는 효직 호는 삼강 고려원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중윤에 이르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정주의주를 갖이고 와서 널리 포교하는데 공을 세웠다. 삼벌초의 난을 김방경과 함께 몽고군 철기 30만을 이끌고 제주에 들어가 토벌하고 도민을 안무한 공으로 찬화공신 삼중대광에 책록되였으며 정당문학에 관직이 올랐으며 용성부원군에 봉하여 졌다
양대박 [ 梁大樸 ]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 남원. 자 사진(士眞). 호 송암(松巖) ·죽암(竹巖) ·하곡(荷谷) ·청계도인(靑溪道人). 시호 충장(忠壯). 학관(學官)으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털어 의병 약 50명을 모아, 전라도 담양(潭陽)에서 고경명(高敬命)을 맹주(盟主)로 삼고 5월에 군사를 동원하였다. 전주(全州)에서 의병 약 2000명을 모았으나, 의병 모집 때의 과로로 발병하여 진산(珍山)의 진중에서 죽었다. 정조 때 병조판서가 추증되었으며, 문집에 《청계집》이 있다.
양대사마실기 [ 梁大司馬實記 ]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 양대박(梁大樸:1544~1592)의 사적을 기록한 책. 저자 : 심환지 시대 : 조선 후기(1799)
목판본. 11권 5책. 1799년(정조 23) 심환지(沈煥之) 등이 왕명으로 간행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털어 두 아들 및 가복(家僕)들로 의병을 조직, 고경명(高敬命)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진산(珍山)에서 과로로 순국하였다. 정조 때 병조판서가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책머리에 심환지의 봉교서(奉敎書)가 있다.
梁大司馬實記(奎1494, 奎1496, 奎1564, 奎2862, 奎2966, 奎3443), 正祖(朝鮮)命編.
11卷 5冊 圖 木版本 33.5×21.6cm. 四周單邊 半郭:21.2×14.8cm.
有界 10行 20字 注雙行. 版心:上黑魚尾.卷首:沈煥之(1799).
임진왜란때 義兵將으로 활약한 梁大樸(1544∼1592)의 遺文과 行蹟 등을 모아놓은 책으로 正祖의 命에 의해 1799년(正祖23)에 편찬되었다. 梁大樸의 아들 慶遇(1568∼ ? )와 亨遇(? ∼1623)의 遺文 및 행적도 霽湖集(鄭遇)과 東崖集(亨遇)이라하여 附錄으로 첨부되어있다. 卷首에 沈煥之의 奉敎書(1799)가 있다. 梁大樸의 字는 士眞이며 號는 松巖·竹巖·荷谷·靑溪道人, 본관은 南原이고 執義 艤의 아들이며 南原출신으로 成渾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聰明絶倫했으며 窮理盡性之學問에 전심했다. 明宗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廢擧하고 朴淳, 鄭澈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時勢를 토론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學官으로서 家財를 털어 의병을 모집, 두 아들과 家童 백여명도 이끌고 대오를 편성하여 潭陽으로 갔다. 이 해 6월 8일 이곳에서 高敬命을 만나 그를 盟主로 추대하고 자신은 副將이 되었다. 義兵 3천여명을 이끌고 全州로 가는도중 任實의 雲巖에서 倭兵을 大破, 큰 공을 세웠으며 全州에 들어가 과로로 發病하여 陣中에서 죽었다. 글씨를 잘썼으며 詩를 잘했고 兵書에도 밝았다. 死後 정閭門이 세워졌으며 正祖 때 병조판서에 追贈, 謚號는 忠壯, 著書로 《淸溪集》이있다. 梁慶遇의 字는子漸, 號는 霽湖·點易齋·蓼汀·泰巖이며 張顯光의 문인이다. 25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義兵에 가담, 병기제작과 격문전달 등의 일을 보았으며 특히 軍粮米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陣中에 군량미가 떨어지자 名文의 포고문을 지어 식량사정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일거에 7천여석을 모으기도 했다. 1597년 參奉으로 別試文科에 丙科로 급제, 竹山과 連山의 현감에 이어 判官이 되었다. 1616년(光海君 8) 文科重試에 丙科로 급제, 校理를 거쳐 奉常寺僉正에 이르렀으나 정치가 문란해지자 향리에 퇴거했다. 金長生등과 道義之交를 맺었다. 詩를 잘했다. 吏曹參議에 追贈되었으며 著書로 《霽湖集》이 있다. 梁亨遇의 字는 子癸이며 號는 東崖이다. 임진왜란때 雲巖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 1603년(宣祖 36) 進士가 되고 1607년 庭試文科에 급제, 典籍까지 되었으나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지자 형과 함께 향리로 퇴거했다. 1618년(光海君10) 仁穆王后가 西方에 幽閉되자 抗疏, 會寧에 유배되었으며 5년 뒤인 1623년(仁祖 1) 석방되어 忠淸都事로 소환되는 도중 사망했다. 詩를 잘했으며 明나라 學士 吳明濟의 《朝鮮詩選》에 2수가 수록되었다고 한다. {권1∼6}이 梁大樸의 遺文·遺事이고 {권7∼10}이 아들慶遇의 遺事(霽湖集), {권11}이 亨遇의 遺事(東崖集)이다. 卷首에 御製致祭文(正祖)과 雲巖破倭圖(亨遇 畵), 請斬倭使書上松江鄭相國, 倡義檄文, 世譜, 目錄이 수록되었다.卷{1}(倡義):從軍日記上中下(慶遇撰), 雲巖破倭圖記(亨遇記), 家狀(6代孫 周翊撰), 傳2수(鄭琢과 金祖淳撰), 雲巖勝戰碑(尹行恁撰), 神道稗銘幷序(閔鍾顯撰), 墓碣銘幷序(黃景源撰), 墓表(南公轍撰). {권2}(褒忠):정閭, 贈職, 賜謚(金載瓚撰). {권3}(遺藁):古近體詩 167수(次晩翠堂韻上牛溪先生, 與尹梧陰斗壽泛舟漢江, 送柳眉巖希春歸江南등.편{4}(遺藁):古近體詩 159수(懷德縣感舊, 文狀臺 등). {권5}(遺藁):書 4수(上松江鄭相國澈請斬倭使書, 呈招討使高霽峯敬命牒 등), 論 2수(盜殺李輔國論, 趙鼎張浚孰優論),奏 1수(擬漢王陵勿王呂氏奏), 記 3수(重修簡儀臺記, 游金剛山記, 游頭類山記), 祭文 2수(祭長子文, 祭鶴文). {권6}(附錄):倡義檄序(詔使 淸江熊化), 題梁靑溪傳後(柳根),題倡義檄 4수(李植), 黃景源, 洪良浩, 李書九), 倡義帖序(尹行恁), 題倡義帖(具庠),倡義錄跋(兪최基), 祭義兵將梁公文 2수(金益福, 閔維重), 龍章書院合享祭文(洪良浩),龍章書院重建上樑文(尹蓍東), 題梁靑溪倡義檄(李秉模), 題靑溪集(李始源), 一片心劒歌幷序(李秉鼎), 烏龍馬行(黃昇源), 贈梁靑溪(北海勝達), 江界謫中次梁靑溪韻(鄭澈), 기타 次韻 17수. {권7}(霽湖集):詩 191수(五言古詩 29수, 七言古詩 1수, 七禽言 14수,五言絶句 22수, 六言絶句 2수, 七言絶句 123수 등). 권 {8}(霽湖集):詩 210수(五言律詩 110수, 七言律詩 100수). {권8}(霽湖集):詩 89수(七言律詩 77수, 五言排律 6수, 七言排律 6수), 雜著 3수(座右銘, 閑居箴, 臨終奮筆自挽). {권10}(霽湖集):雜文 10수(天兵留糧檄, 祭南原古戰場文, 耆老所祭月汀尹公文등), 附錄 3수(序 2수, 家狀), 「天兵留糧檄」은 임진왜란때 明나라 援軍을 위한 군량미모집에 적극 호응해 달라는 호소문이다. 「詩話」는 長文의 것으로 古今의 詩體와 韻이 논의되고 일화들이 들어있다. {권11}(東崖集):詩 65수, 東崖精舍上樑文, 龍城客舍上樑文, 家狀略등.
양기탁 [ 梁起鐸 ] 언론인 ·독립운동가. 활동분야 : 독립운동, 언론출생지 : 평양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호는 우강(雩岡)이다. 아명은 의종(宜鍾)이다. 평양에서 출생했다. 1895년 영국인 선교사 J.S.게일(Gale:奇一)의 《한영자전(韓英字典)》 편찬을 도왔고, 1904년 영국인 E.T.베셀(Bethel:裵說)과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하고, 이듬해 국한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4년간 복역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편집고문에 취임, 1921년 미국의회의원단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가(假)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의성단(義成團)을 결성하였으며, 오동진(吳東振) ·김동삼(金東三) 등과 통의부(統義府)를 창설하고, 1925년 지청천(池靑天) ·김동삼 등과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이때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 ·화성의숙(華成義塾) ·동명의숙(東明義塾)을 세워 혁명간부양성에 힘쓰는 한편, 잡지 《전후》와 《대동민보(大東民報)》를 발행하여 재만한인 계몽에 진력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여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하였다. 1938년 장쑤성[江蘇省]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양주동 [ 梁柱東 ]
호 무애(无涯). 경기 개성(開城) 출생. 1928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으며, 그 이전 1923년 시지(詩誌) 《금성(金星)》을 발간하였다. 1928년 평양 숭실전문(崇實專門) 교수에 취임하고, 1929년 《문예공론(文藝公論)》을 발간, 1940년 경신중학(儆新中學) 교사로 취임했다. 1945년 동국대학 교수가 되고,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 1958년 연세대학 교수에 취임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1962년 다시 동국대학 교수가 되어 동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학술원상을 수상하고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으며, 신라 향가(鄕歌) 등 한국 고가(古歌)를 연구하여 초기 국어학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 《여요전주(麗謠箋注)》 《국학연구논고(國學硏究論考)》 《국문학고전독본(國文學古典讀本)》 등이 있고 시집으로 《조선의 맥박》, 에세이집으로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 《인생잡기(人生雜記)》 등이 있다. 역서로 《T.S.엘리엇 전집》 《영시백선(英詩百選)》 《세계기문선(世界奇文選)》 등이 있다.
▣ 김윤만 -
▣ 김항용 -
양헌수(梁憲洙)
【생몰년】 1816(순조 16)∼1888(고종 25) 【본 관】 남원(南原) 양(梁)【자·호】 경보(敬甫)【시 호】 충장(忠莊)조선 후기 무신
1816(순조 16)∼1888(고종 25).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로서 부사정 양종임(梁鍾任)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면서 무예를 익혔다. 헌종 14년(184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철종 때 참상관(參上官)에 올랐다. 고종 3년(1866) 어영청의 천우위(千摠)으로 있으면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강화도 정족산성(鼎足山城)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프랑스함대의 로즈제독이 보낸 해군대령 올리비에의 부대 160여 명을 맞아 다수를 살상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려 프랑스군을 물리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 병마절도사사를 지내고, 1873년 어영대장, 1874년 좌변 포도대장, 1875년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金炳學), 홍순목(洪淳穆) 등과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斥和論)을 끝까지 주장하였다. 1882년 재집권한 대원군에 의해 다시 설치된 삼군부(三軍府)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임명되었으며, 1884년 공조 판서, 1887년 독련사(督鍊使)가 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高宗時代史
양성지 (梁誠之) 병부공파 후 13세 문양공파 파조
양성지의 자는 순부요 호는 눌재 또는 송파이다. 본관은 남원이 다. 그는 구주의 아들로 조선 태종 14년(1415)에 태어나 성종 13 년(1482)에 죽었다. 세종 23(1441)에 생진문과에 합격한 뒤 경창 부승 성균전적 등을 엮임. 훈구파의 중진으로써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 교리 등을 거치면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뒤 춘추관 기주관 고려사수사관을 겸직하여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기도 하 였다. 집현전 직제학에 승진되었다. 단종 1년(1453)에는 왕의 명 을 받아 <조선도도> <팔도각도>를 작성하였다. 다음해 <황극치 평도>를 작성하여 왕에게 올렸다. 예종 1년(1469) 그는 지중추관 사를 겸직하면서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다음해 성종 1년(1470)에는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모든 학문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능통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로는 <눌재집> <시정기> <삼강사략> <동국도경><농잠서> <축목서> <고려사지리지>등이 있다.
대포서원
○ 종 별 : 향토유적 제1호
조선전기의 대학자이며 문신인 양성지(梁誠之 1451∼1482)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우(祠宇)이다.
선생의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송파(松坡) 본관은 남원(南原), 구주(九疇)의 아들이다.
세종 23년(144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이후 훈구파의 중진으로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고려사 개찬(改撰)에 참여했고 팔도지리지 동국지도 등을 찬진(撰進)했다.
위치 김포시 양촌면 대포리 산32 번지 종손 양원규 031-988-9405
양능양 (梁能讓)
號는 돈암 兵部公派 派祖로 976년 고려 경종 1년 봉사를 지낼 때 宋 나라에 들어가 國子監에서 金行成과 같이 典禮와 經義를 講하고 賓貢科에 급제를 하였으며 귀국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영재육성에 공헌하였으며. 성종때 中奉大夫에 책록되였고 兵部 郞中을 거처 東宮 內 侍講學士 에 이르렀다.
1003년 목종 6 년 김치양이 천추태후 황보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로 왕위 계승을 꾀하여 대량원군 순을 죽일 음모를 꾀하는 난정을 피하여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호남 용성의 풍악산 아래 중산동에 은거 하며 평생을 살았으며 용장서원에 제향 되였다.
양주운(梁朱雲)
자는 효직 호는 삼강 고려원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중윤에 이르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정주의주를 갖이고 와서 널리 포교하는데 공을 세웠다. 삼벌초의 난을 김방경과 함께 몽고군 철기 30만을 이끌고 제주에 들어가 토벌하고 도민을 안무한 공으로 찬화공신 삼중대광에 책록되였으며 정당문학에 관직이 올랐으며 용성부원군에 봉하여 졌다
양대박 [ 梁大樸 ]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 남원. 자 사진(士眞). 호 송암(松巖) ·죽암(竹巖) ·하곡(荷谷) ·청계도인(靑溪道人). 시호 충장(忠壯). 학관(學官)으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털어 의병 약 50명을 모아, 전라도 담양(潭陽)에서 고경명(高敬命)을 맹주(盟主)로 삼고 5월에 군사를 동원하였다. 전주(全州)에서 의병 약 2000명을 모았으나, 의병 모집 때의 과로로 발병하여 진산(珍山)의 진중에서 죽었다. 정조 때 병조판서가 추증되었으며, 문집에 《청계집》이 있다.
양대사마실기 [ 梁大司馬實記 ]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의병 양대박(梁大樸:1544~1592)의 사적을 기록한 책. 저자 : 심환지 시대 : 조선 후기(1799)
목판본. 11권 5책. 1799년(정조 23) 심환지(沈煥之) 등이 왕명으로 간행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털어 두 아들 및 가복(家僕)들로 의병을 조직, 고경명(高敬命) 휘하에서 활약하다가 진산(珍山)에서 과로로 순국하였다. 정조 때 병조판서가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책머리에 심환지의 봉교서(奉敎書)가 있다.
梁大司馬實記(奎1494, 奎1496, 奎1564, 奎2862, 奎2966, 奎3443), 正祖(朝鮮)命編.
11卷 5冊 圖 木版本 33.5×21.6cm. 四周單邊 半郭:21.2×14.8cm.
有界 10行 20字 注雙行. 版心:上黑魚尾.卷首:沈煥之(1799).
임진왜란때 義兵將으로 활약한 梁大樸(1544∼1592)의 遺文과 行蹟 등을 모아놓은 책으로 正祖의 命에 의해 1799년(正祖23)에 편찬되었다. 梁大樸의 아들 慶遇(1568∼ ? )와 亨遇(? ∼1623)의 遺文 및 행적도 霽湖集(鄭遇)과 東崖集(亨遇)이라하여 附錄으로 첨부되어있다. 卷首에 沈煥之의 奉敎書(1799)가 있다. 梁大樸의 字는 士眞이며 號는 松巖·竹巖·荷谷·靑溪道人, 본관은 南原이고 執義 艤의 아들이며 南原출신으로 成渾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聰明絶倫했으며 窮理盡性之學問에 전심했다. 明宗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廢擧하고 朴淳, 鄭澈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時勢를 토론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學官으로서 家財를 털어 의병을 모집, 두 아들과 家童 백여명도 이끌고 대오를 편성하여 潭陽으로 갔다. 이 해 6월 8일 이곳에서 高敬命을 만나 그를 盟主로 추대하고 자신은 副將이 되었다. 義兵 3천여명을 이끌고 全州로 가는도중 任實의 雲巖에서 倭兵을 大破, 큰 공을 세웠으며 全州에 들어가 과로로 發病하여 陣中에서 죽었다. 글씨를 잘썼으며 詩를 잘했고 兵書에도 밝았다. 死後 정閭門이 세워졌으며 正祖 때 병조판서에 追贈, 謚號는 忠壯, 著書로 《淸溪集》이있다. 梁慶遇의 字는子漸, 號는 霽湖·點易齋·蓼汀·泰巖이며 張顯光의 문인이다. 25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義兵에 가담, 병기제작과 격문전달 등의 일을 보았으며 특히 軍粮米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陣中에 군량미가 떨어지자 名文의 포고문을 지어 식량사정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일거에 7천여석을 모으기도 했다. 1597년 參奉으로 別試文科에 丙科로 급제, 竹山과 連山의 현감에 이어 判官이 되었다. 1616년(光海君 8) 文科重試에 丙科로 급제, 校理를 거쳐 奉常寺僉正에 이르렀으나 정치가 문란해지자 향리에 퇴거했다. 金長生등과 道義之交를 맺었다. 詩를 잘했다. 吏曹參議에 追贈되었으며 著書로 《霽湖集》이 있다. 梁亨遇의 字는 子癸이며 號는 東崖이다. 임진왜란때 雲巖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 1603년(宣祖 36) 進士가 되고 1607년 庭試文科에 급제, 典籍까지 되었으나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지자 형과 함께 향리로 퇴거했다. 1618년(光海君10) 仁穆王后가 西方에 幽閉되자 抗疏, 會寧에 유배되었으며 5년 뒤인 1623년(仁祖 1) 석방되어 忠淸都事로 소환되는 도중 사망했다. 詩를 잘했으며 明나라 學士 吳明濟의 《朝鮮詩選》에 2수가 수록되었다고 한다. {권1∼6}이 梁大樸의 遺文·遺事이고 {권7∼10}이 아들慶遇의 遺事(霽湖集), {권11}이 亨遇의 遺事(東崖集)이다. 卷首에 御製致祭文(正祖)과 雲巖破倭圖(亨遇 畵), 請斬倭使書上松江鄭相國, 倡義檄文, 世譜, 目錄이 수록되었다.卷{1}(倡義):從軍日記上中下(慶遇撰), 雲巖破倭圖記(亨遇記), 家狀(6代孫 周翊撰), 傳2수(鄭琢과 金祖淳撰), 雲巖勝戰碑(尹行恁撰), 神道稗銘幷序(閔鍾顯撰), 墓碣銘幷序(黃景源撰), 墓表(南公轍撰). {권2}(褒忠):정閭, 贈職, 賜謚(金載瓚撰). {권3}(遺藁):古近體詩 167수(次晩翠堂韻上牛溪先生, 與尹梧陰斗壽泛舟漢江, 送柳眉巖希春歸江南등.편{4}(遺藁):古近體詩 159수(懷德縣感舊, 文狀臺 등). {권5}(遺藁):書 4수(上松江鄭相國澈請斬倭使書, 呈招討使高霽峯敬命牒 등), 論 2수(盜殺李輔國論, 趙鼎張浚孰優論),奏 1수(擬漢王陵勿王呂氏奏), 記 3수(重修簡儀臺記, 游金剛山記, 游頭類山記), 祭文 2수(祭長子文, 祭鶴文). {권6}(附錄):倡義檄序(詔使 淸江熊化), 題梁靑溪傳後(柳根),題倡義檄 4수(李植), 黃景源, 洪良浩, 李書九), 倡義帖序(尹行恁), 題倡義帖(具庠),倡義錄跋(兪최基), 祭義兵將梁公文 2수(金益福, 閔維重), 龍章書院合享祭文(洪良浩),龍章書院重建上樑文(尹蓍東), 題梁靑溪倡義檄(李秉模), 題靑溪集(李始源), 一片心劒歌幷序(李秉鼎), 烏龍馬行(黃昇源), 贈梁靑溪(北海勝達), 江界謫中次梁靑溪韻(鄭澈), 기타 次韻 17수. {권7}(霽湖集):詩 191수(五言古詩 29수, 七言古詩 1수, 七禽言 14수,五言絶句 22수, 六言絶句 2수, 七言絶句 123수 등). 권 {8}(霽湖集):詩 210수(五言律詩 110수, 七言律詩 100수). {권8}(霽湖集):詩 89수(七言律詩 77수, 五言排律 6수, 七言排律 6수), 雜著 3수(座右銘, 閑居箴, 臨終奮筆自挽). {권10}(霽湖集):雜文 10수(天兵留糧檄, 祭南原古戰場文, 耆老所祭月汀尹公文등), 附錄 3수(序 2수, 家狀), 「天兵留糧檄」은 임진왜란때 明나라 援軍을 위한 군량미모집에 적극 호응해 달라는 호소문이다. 「詩話」는 長文의 것으로 古今의 詩體와 韻이 논의되고 일화들이 들어있다. {권11}(東崖集):詩 65수, 東崖精舍上樑文, 龍城客舍上樑文, 家狀略등.
양기탁 [ 梁起鐸 ] 언론인 ·독립운동가. 활동분야 : 독립운동, 언론출생지 : 평양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호는 우강(雩岡)이다. 아명은 의종(宜鍾)이다. 평양에서 출생했다. 1895년 영국인 선교사 J.S.게일(Gale:奇一)의 《한영자전(韓英字典)》 편찬을 도왔고, 1904년 영국인 E.T.베셀(Bethel:裵說)과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하고, 이듬해 국한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4년간 복역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편집고문에 취임, 1921년 미국의회의원단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가(假)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의성단(義成團)을 결성하였으며, 오동진(吳東振) ·김동삼(金東三) 등과 통의부(統義府)를 창설하고, 1925년 지청천(池靑天) ·김동삼 등과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이때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 ·화성의숙(華成義塾) ·동명의숙(東明義塾)을 세워 혁명간부양성에 힘쓰는 한편, 잡지 《전후》와 《대동민보(大東民報)》를 발행하여 재만한인 계몽에 진력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여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하였다. 1938년 장쑤성[江蘇省]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양주동 [ 梁柱東 ]
호 무애(无涯). 경기 개성(開城) 출생. 1928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으며, 그 이전 1923년 시지(詩誌) 《금성(金星)》을 발간하였다. 1928년 평양 숭실전문(崇實專門) 교수에 취임하고, 1929년 《문예공론(文藝公論)》을 발간, 1940년 경신중학(儆新中學) 교사로 취임했다. 1945년 동국대학 교수가 되고,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 1958년 연세대학 교수에 취임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1962년 다시 동국대학 교수가 되어 동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학술원상을 수상하고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으며, 신라 향가(鄕歌) 등 한국 고가(古歌)를 연구하여 초기 국어학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 《여요전주(麗謠箋注)》 《국학연구논고(國學硏究論考)》 《국문학고전독본(國文學古典讀本)》 등이 있고 시집으로 《조선의 맥박》, 에세이집으로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 《인생잡기(人生雜記)》 등이 있다. 역서로 《T.S.엘리엇 전집》 《영시백선(英詩百選)》 《세계기문선(世界奇文選)》 등이 있다.
▣ 김윤만 -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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