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과 신돈과 우리가문 24---조준(趙浚) <1346-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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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02 08:17 조회1,455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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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趙浚){2}
시대 고려, 조선
생몰년 1346-1405(충목왕2-태종5)
본관 평양(平壤)
자 명중(明仲)
호 우재(#우07齋)/송당(松堂)
시호 문충(文忠)
활동분야 문신
다른 이름
가계와 관력
문하시중 인규(仁規)의 증손으로, 판도판서 덕유(德裕)의 아들이다. 아들 대림(大臨)이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함으로써 태종과는 사돈이 된다.
원래 평양조씨는 이름없는 집안이었으나, 인규의 대에 이르러 몽고어를 잘하여 역관(譯官)으로서 출세, 충선왕의 국구(國舅)가 되면서 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6형제 중의 5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제가 아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항상 개탄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였다.
1371년(공민왕 20)책을 끼고 수덕궁(壽德宮)앞을 지나가자, 왕이 보고 기특히 여겨 마배행수(馬陪行首)에 보하였다.
1374년(우왕 즉위년)문과에 급제하고, 1376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으로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겸하고,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로 뽑혔는데, 정치를 잘하여 이민(吏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어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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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國朝人物考, 松堂集, 朝鮮王朝의 政治․經濟基盤(韓永愚,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73)
趙仁規와 그의 家系(閔賢九, 震檀學報 42․43, 1976․1977)
朝鮮初期 三功臣硏究(鄭杜熙, 歷史學報 75․76, 1977)
明初 朝鮮의 遼東攻伐計劃과 表箋問題(朴元#고38, 白山學報 19, 1975). 〈韓永愚〉
■《고려사》 제75권 - 지 제29 > 선거 3 > 전주 >
봉증 제도
봉증(封贈-관원의 친족에게 작위를 주는 것. 녹은 없음)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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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조준(趙浚)이 왕에게 의견을 제기하기를 ꡒ공로 있는 사람이 아니면 후작(侯爵)을 주지 못하는 것이 우리 나라의 법입니다. 김부식(金富軾)은 참람한 반란을 제거하고 서도(西都-평양)를 평정하였으므로 낙랑후(樂浪侯)를 봉하였고 ●김방경(金方慶)은 반역하는 탐라(耽羅-제주도)를 토벌하고 왜국의 죄를 힐문하였으므로 ★상락공(上洛公)을 봉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재상으로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외적을 평정한 공신이 아니면 군을 봉하지 못하게 하십시오ꡓ라고 하였다.
☞조준은 충렬공 둘째아들 김흔장군의 사위 조련의 손자, 즉 김흔장군의 외증손자 (조인규-조련-조덕유-조준)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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