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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의 충절!!! 문숙공 의재 김제갑 (03) 43-68세--- 선조 재위기간 (1567-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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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11 17:40 조회1,5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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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3/10/28 14:40 (from:211.114.248.22) 조회 : 78

문숙공 김제갑 연보



<문숙공 김제갑 연보 (조선왕조 실록. 의제비문 내 기록 종합)>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



10. 1569년(선조2). 45세 : 종부사정 사헌부지평(宗簿司正 司憲府持平)이 되고, 성균관전적직강사성군기사사 정사간원정언사온서령승문원판교(成均館典籍直講司成軍器寺寺 正司諫院正言司?署令承文院判校)



11. 1573년(선조6). 3. 11. 49세 : 정언 (正言)



12. 1578년(선조11). 54세 : 가을에 당상(堂上)에 진급(進級)하여 첨추(僉樞)가 되어 공마관압사(貢馬菅押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옴. 황제가 특히 명하여 보시고 비단 4필 말 1필 상홀(象笏) 1척을 하사(下賜)하시었다.



13. 1579년(선조12). 55세 : 연경에서 돌아옴. 임금이 관온(官?)과 호피담요를 특사하시고 동부승지를 제수. 곧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보냈다가 다시 진주목사로 바꾸었다. 겨울에 병조참지 예조참의(兵曹參知禮曹參議)



14. 1581년(선조14). 4. 4. 57세 : 봄 우부승지. 대사간, 여름에 충청감사



1582년 : 봄에 우부승지. 여름에 황해도 관찰사.



15. 1583년(선조16). 8. 6. 59세 : 좌승지, 사직. 집에 돌아옴.



16. 1587년(선조20). 4. 1. 63세 : 창성부사



17. 1588년(선조21). 11. 16. 64세 : 창성부사 체직



18. 1589년(선조22). 65세 : 광주목사



19. 1590년(선조23). 66세 : 황해도 관찰사



20. 1591년(선조24). 67세 : 대사간(大司諫)을 제수 받았다가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전보. 사직 요청, 원주목사.



21. 1592년(선조25). 8. 25. 68세 : 원주목사 전사.



22. 1592년(선조25). 10. 21. 68세 : 원주목사 죽음 비변사 보고. 이조판서 겸 지경연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 증직.







■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3/06/10 15:09 (from:211.114.248.22) 조회 : 28

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11)-金悌甲편(역문1)



임기를 채우고 들어와 종부사정 사헌부지평(宗簿司正 司憲府持平)이 되고, 성균관전적직강사성군기사사정 사간원정언 사온서령 승문원판교(成均館典籍直講司成軍器寺正 司諫院正言 司署令 承文院判校)를 지냈다.



무인년(戊寅年) 가을에 당상(堂上)에 진급(進級)하여 첨추(僉樞)가 되어 공마관압사(貢馬菅押使)로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 전의 관압사(菅押使)가 많은 공마(貢馬)를 도로(道路)에서 병으로 말려 죽게하여 양국으로부터 견책(譴責)을 엄하게 당했을뿐만아니라 도사(道死)하는 자도 있어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리었었다. 이 해에도 봉사자(奉使者)가 출발일(發行日)을 앞두고 홀연히 병보(病報)를 하여 담당자(當路者)를 공으로 대행케 하자 사람들이 공(公)을 위하여 근심하되 공(公)은 의연(毅然)하게 아무 근심도 아니하고 요동(遼東)에 이르는데, 삼베로 물통을 만들어 친히 점검하여 공마를 먹여 50필이 모두 무고히 황성까지 들어갔다. 태복(太僕)이 칭찬을 별다르게 하면서 황제께 주달(奏達)하였다. 황제가 보시고 특히 명하여 보시고 비단 4필, 말 1필, 상홀(象笏) 1척을 하사(下賜)하시었다. 그 이듬해 기묘(己卯)봄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께서 관온(官 )과 호피담요를 특사하시고 동부승지를 제수하셨으며 곧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보냈다가 다시 불러 진주목사로 바꾸었다.



진주(晉州)는 영남(嶺南)의 거읍(巨邑)일 뿐만아니라 호활(豪猾)한 자가 많아서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나 공(公)께서 판결이 물 흐르는 것같이 하여 위엄과 덕(德)이 아울러 시행되니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며 노래하고 외었다.



그 후 공(公)의 집안 조카인 시민(舍姪時敏)이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공(公)이 관리에서 바꾸어 간지(轉官後) 12년만이었다. 진주 백성(晉民)이 다 이 말을 듣고 기뻐 전하는 말이, "김사군(金使君)의 조카라네."하며, 한 지역이 다 흐뭇한 상태였다. 이런 까닭으로 영을 행하고 금하는데(令行禁止) 수고롭게 여기지 않고 선정(善政)을 이루었었다.



그 해 겨울에 병조참지 예조참의(兵曹參知禮曹參議)를 지내고 신사년(辛巳) 봄에 우부승지(右副丞旨)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고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역임타가 여름에 충청도관찰사(觀察使)를 거치어 겨울에 사임했다. 다시로 대사간(大司諫)으로 역임(歷任)하다가 임기가 되어 다시 서추(西樞)가 되었다. 임오년 봄(壬午春)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여름에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계미(癸未)년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제수받았으나 일로 인하여 사직하고 집에 와서 몇 해 수양하다가 정해(丁亥) 가을에 창성부사(昌城副使)로, 기축(己丑)에 광주목사(廣州牧使), 경인(庚寅)에 다시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로, 신묘(辛卯)에 대사간(大司諫)을 제수 받았다가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전보되었다.



이때에 공(公)이 여러번 천관(天官)에 있고 또 공의 장자 시헌(長子 時獻)이 역시 전랑(銓郞)으로 있는 관계상 마음이 항상 불안하여 사직을 간구(懇求)하였으나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제수(際授)하였다.







■ 연려실기술 제13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이이(李珥)가 졸서(卒逝)하다 이제신(李濟臣)의 귀양간 사실을 붙임



○ 태학생 유공신(柳拱辰) 등 462명이 상소하여 이이가 무함(誣陷)을 입었다고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이 상소의 사연을 보니 충성스럽고 곧으며 격렬하다. 그대들의 의기가 이러하니 내가 어찌 나랏일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상소할 때에 사사로이 서로 지휘하고 사주하여 유인하기도 하고 을러서 제어하기도 하였는데, 따르지 않는 자 또한 많았습니다. 상소하는 자들은 그들이 자기들과 다른 것을 분히 여겨 큰 소리로 꾸짖으며 좇아가서 소매를 잡고 끌고 들어가니, 명륜당이 싸움터가 되어 더러는 무리를 줄이고 명부에서 삭제하고야 맙니다. 선비들의 풍습이 이렇듯 극도로 패란(悖亂)한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칭찬하고 권장하셨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출근한 승지를 모두 내보내라주D-015.” 하고, 또 이르기를, “입직한 위장(衛將)권벽(權擘)ㆍ정복시(鄭復始)를 가승지(假承旨)에 차임하고, 승지 박근원(朴謹元)ㆍ김제갑(金悌甲)ㆍ이원익(李元翼)ㆍ성락(成洛)은 모두 체직하며, 이식(李?)ㆍ이인(李?)ㆍ박숭원(朴崇元)ㆍ유영립(柳永立)ㆍ김우옹(金宇?)을 승지에 임명하라.” 하였다. 《계갑일록(癸甲日錄)》











■ 의재유고(毅齋遺稿)



<상아 홀(笏)>

1)소장과정 : 1578년(선조 11. 54세) 공마관압사(貢馬菅押使)로 연경에 갔다 올 때 공이 크므로 명의 神崇皇帝로부터 비단4필, 말 1필과 함께 위 상아 홀을 하사 받으심

2)현 소장처 : 후손이 모처에 보관 중





<시문>

題詩刻石(시를 돌에 새기는 것에 제하여)-忠淸道 觀察使時 (2003. 8. 21. 항용(제) 제공)

翠壁千層立 비취색 절벽이 천길이나 서 있고

淸溪九曲流 맑은 시내는 아홉 구비로 흘러 가네

中間獨偃息 그 가운데 홀로 누워 쉬면서

嘯?不知愁 휘파람 불고 시 읊으니 근심을 모르겠도다

*출전 : <의재유고(毅齋遺稿)>(1992. 11. 의재공종중편찬위원회 간)







■ 타 문집 기록



◆ 한국문집총간 月川集 與忠淸監司金順初悌甲時佐幕湖西 조목(趙穆) - - - -

月川先生文集卷之三



與忠淸監司金順初悌甲時佐幕湖西 038_434c



比來。秋氣益淸。伏惟令體爽塏。動靜萬福。旌麾所屆。今在甚處。關嶺阻隔。仰慕轉切。穆區區賤懷。前狀已達。不敢再瀆。但伏蒙令眷深厚。未敢遽爲決然之計。而自量精神筋力。有難堪處。假使扶曳病軀。冒昧再赴。已呈辭狀。至于再度。人必皆爲無廉恥。無道義。傳

▶ 038_434d

笑士友。非細事也。無狀?跡。固不足責。以閤下處人之道。亦未必以爲盡善也。用是尤爲惶愧。不得已復依前度辭狀陳乞。伏惟令慈。曲垂三思。?賤拙。毋陷於嗤笑鄙唾之地。則仰荷令賜。爲幸莫大。專恃眷恤。敢此冒瀆。千萬懇乞。







◆ 한국문집총간 知退堂集 送晉牧金順初悌甲。次朴君沃啓賢韻。 이정형 미상 - - - -

知退堂集卷之一



五言律

送晉牧金順初悌甲。次朴君沃啓賢韻。 058_011d



漢北人愁臥。江南客倚樓。交情同萬里。離恨隔三秋。好善優爲魯。勝强要在柔。菁川一區勝。天遣?遊。與金同朝京。且時晉有豪石。難治之故云云。

















▣ 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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