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의 충절!!! 문숙공 의재 김제갑 (06)--- 괴산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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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13 17:47 조회1,563회 댓글0건본문
1670년(현종11). 2. 7일에 원충갑, 김제갑, 원호의 원주 사우에 충렬이란 편액이 사액되었으며, 1711년(숙종37년)에 문숙(文肅)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재추증 되었다. 원주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는데 1866년(고종3)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그 사액인 <충렬사>현판은 괴산의 충민사 경내의 구 사우에 보관하고 있다. 괴산의 충민사 경내의 구 사우,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괴산 능촌리의 제각에 제향(祭享) 되었다.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 부활위원회(江原道愛國愛族復活委 員會)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문집으로 <의재유고(毅齋遺稿)>가 전한다. 묘소는 1988. 10. 5. 괴산읍 능촌리로 이안하였다.
1. 괴산 화암서원(花巖書院)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 화암 서원(花巖書院)
【관리번호】 367-860-240-232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 서원
【유적위치】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유적 분포지도 참조
【소 재 지】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송동리
【시 대】 조선시대
【관 리 자】
【유적내용】
화암 서원(花巖書院)은 광해군 14년 칠성면 송동리에 창건하고 문순공 좌찬성 이황(文純公 左贊成 李滉)을 주향(主享)하고 있다.
고종 6년에 사원훼철령으로 폐쇄되었고 1955년 괴산 유림(儒林)들이 다시 재건하고 매년 향사(享祀)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며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는데 1974년에 보수한 바 있다.
【참고문헌】
【비 고】
□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巖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이문건(李文楗)<호는 검재(黔齋)며 승지를 지냈다.> ㆍ노수신(盧守愼)ㆍ김제갑(金悌甲)<목사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호는 의재(毅齋)이다.> ㆍ유근(柳根)<광해조의 문형(文衡)> ㆍ이신의(李愼儀)ㆍ허후(許?)<이상(貳相)을 지냈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ㆍ박세무(朴世茂)<헌납을 지냈고,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 ㆍ전유형(全有亨)<호는 학송(鶴松)이며 형조 참판을 지냈다.>
2. 괴산 충민사 內 충렬사(忠烈祠)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 충렬사(忠烈祠)
【관리번호】 367-800-271-016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 사묘(사)
【유적위치】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유적 분포지도 참조
【소 재 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시 대】 조선시대
【관 리 자】 기타(안동 김씨 문중)
【유적내용】
충렬사는 영조 13년(1736)에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 순절한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 1525∼1592)과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다 순절한 그의 조카인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을 합향한 사당인데 매년 3월 중정일(仲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사당에 있던 선조의 윤음(倫音)인 ‘일우고성 만고삼강(一遇孤城 萬古三綱)’이란 편액은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일주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참고문헌】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괴산군 문화유적>>, 70.
【비 고】
1) 선조대왕 친필 一隅孤城萬古三綱 (현 괴산 충민사 경내 의재공 사당안에 보관)
2) 충렬사 현종 친필 사액 (현 괴산 충민사 경내 문숙공 사당안에 보관)
(좌측 기록 : 康熙九年 賜額---1670. 현종11년)
3) 충민사 경내의 충렬사 내에 있는 문숙공 위패 (2004. 5. 10. 성수(제) 제공)
4) 문숙공, 충무공이 함께 배향되어 있는 충민사 경내의 불천자위 구 사우(충렬사) (2001. 10. 항용(제) 촬영 제공)
□ 문화재청 홈페이지
종 목 시도기념물 12호
명 칭 김시민장군충민사 (金時敏將軍忠愍祠)
분 류 사묘,제단
수 량 1동
지정일 1976.12.21
소재지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57
소유자 사유
관리자 김팽응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1544∼1592)과 충숙공 김제갑(1525∼1592)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김시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가 되어 사천, 고성, 김해 등지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진주성 싸움에서 3800여명의 병력으로 2만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김제갑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원주로 쳐들어오자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영원산성에 들어가 항쟁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그의 부인 이씨, 아들 김시백과 함께 순절하였다.
선조 때 이분들의 절개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문화재명 김시민장군충민사(金時敏將軍忠愍祠)
이곳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운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충숙공(忠肅公) 김제갑(金悌甲)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사당으로 조선(朝鮮) 선조(宣祖)때 건립하였다. 김시민(1554∼1592) 장군의 자(字)는 면오(勉吾),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24년(1591)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사천(泗川), 고성(固城), 진해(鎭海)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嶺南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올라 금산(錦山)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후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다.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의 호를 받고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김제갑(1525∼1592) 선생의 자(字)는 순초(順初), 호(號)는 의재(毅齋),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명종(明宗) 8년(155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명종 10년(1555)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가 되고 병조좌랑(兵曹佐郎)을 거쳐 선조(宣祖) 14년(1581) 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아들과 부인도 순절(殉節)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 김제갑 신도비-괴산 충민사 경내
<문숙공 의재 김제갑 신도비>
---文肅公 毅齋 金悌甲(1525~1592)의 신도비는 1976년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공의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權容稷이 짓고 글씨는 12대손 金相衡이 썼다.---
3. 괴산 능촌리(陵村里)
1) 묘소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2002. 10. 항용(제) 촬영 제공)
2. 문숙공 묘역 우측에 있는 차자 참의공(휘 시백)의 단소와 배위 묘소 (2002. 10. 항용(제) 촬영 제공)
3) 문숙공 제각 - 괴산읍 능촌리 내 (2002. 5. 항용(제. 촬영 제공)
4) 교지 (1711년(숙종 37)에 받은 영의정 추증 교지)
5) 충.열.효 삼정문 현액 (2003. 10. 3. 항용 촬영 제공)
괴산읍 능촌리 金成銖(문숙공 14대손) 보관중
1711년(숙종 37)에 영의정에 추증된 후 받은 <충열효 삼정문 현액>을 1787년(정조11)에 중건한 것임. <上十一年丁未重建>이라 기록되어 있음
3)원주의 충렬비(1670. 3. 건립. 생원 鄭錫衡 찬)에 의하면 <--만력 무신년(1608)에 옛 정승 完平, 白沙가 김공이 출생한 마을에 정표문려(旌表門閭)를 세우도록 건의하여 이제 그 마을에 충신 효자 열녀의 정문이 서 있고--> 로 보아 상기의 것과 다른 정려와 현판이 괴산의 능촌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됨)
원판 재질은 적송인 것 같으며 현재 양호한 상태임.
6) 의재유고
▣ 솔내 -
▣ 김항용 -
▣ 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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