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원주의 충절!!! 문숙공 의재 김제갑 (06)--- 先後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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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4-05-13 17:50 조회1,650회 댓글0건본문
● 증조부 金壽亨(김수형) : 승지공(承旨公).생몰년 미상,1440(세종22)--1476(성종7) 추정.
자(字)는 통지(通之), 과시(科試)에는 나가지 않았고, 벼슬은 장예원(掌隸院) 사의(司議)를 지냈으며, 후에 좌승지(左丞旨)에 추증(追贈)됨. 향년 37세. 묘는 경기도 시흥군 개죽동에서 1968년 천안시 병천면 백전으로 천봉(遷封)함.
曾祖父 수형은
사위 기찬과 外孫子 기준, 外孫子 정황 정환 형제, 孫子 익 문과급제
● 조부 金彦默(김언묵) : 참판공(參判公) 1472년(성종3)--1506년(중종1)
자는 우경(愚卿). 공은 혼조(昏朝:중종반정이 일자 연산군때 좌의정이었던 이모부 신수근(愼守勤)과 매제인 감역(監役) 정세명(丁世明)등이 살해 됐던 일)로 인해 공은 권세가들의 친척이라 하여 은둔불사함. 향년 35세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됨. 묘는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소래산.
배위(配位-義城金氏) 묘소는 충북 괴산군 괴산읍 수진리 수진산에 손(孫)인 양덕공(陽德公-諱 時說) 묘소 위에 있었는데, 1997년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자(子) 영상공(領相公-諱 錫)의 묘소 위로 천봉(遷封)함.
祖父 언묵은
사위 이문건, 孫子 충갑 효갑 제갑, 外孫子 신윤록 문과급제
● 부 김석(金錫) 1495∼1534
字는 공하(公瑕), 충렬공의 7세손이다. 을묘년(1495) 10월 11일에 출생하였다.
中宗朝 進士에 급제하고, 정암 趙光租의 門人으로 學文이 높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기묘사화로 은사인 조정암이 화를 당하자 서울 남산 아래인 주자동(지금의 회현동)에서 충북 槐山郡 文光面 양곡리(文法里)로 일시 은둔불사 하였다가 외가인 의성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典法里로 옮겨 은거 하였다. 이곳은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공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소지명을 금석골이라 한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장남 金忠甲은 晋州牧使인 金時敏의 아버지이고, 4남 金悌甲은 原州牧使로 壬辰亂때 순절하였다. 墓는 槐山郡 槐山邑 陵村에 있고 四子 悌甲이 쓴 碑文이있다.
父 석은 아들 충갑 효갑 제갑, 사위 이휘, 손자 시회 시헌 시언 문과급제
석의 아들 5형제 (충갑, 효갑, 우갑, 제갑, 인갑) 중, 1충갑, 3우갑, 5인갑 사마시급제, 1충갑, 2효갑, 4제갑 문과급제
▣ 5甲派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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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괴산군 문광면 문법리) 공(=김석)은 5男 2女를 낳고 훌륭하게 교육시켰다. 그 결과 아들 모두는 과거에 합격하였고 크게 성공하여 입신양명하는 영광이 있었으며 문운이 크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자녀들은 부친께서 학문수업을 받다가 공이 몰하자 공의 매부인 묵재 이문건
---(李文楗. 주:星州人. 호는 默齋. 趙光祖 문하생. 기묘사화로 9년간 停擧를 당하여 괴산 호암리(현 문광면 유평리)로 낙향, 은둔불사 하다가 별시문과하여 丞旨에 오름. 淸白吏에 녹선. 乙巳士禍로 성주에 23년간 유배. 유배지에서 사망. 괴산의 花巖書院에 배향됨. 詩書에 능함. 저서<默休唱酬>)---
에게서 공부하였다.
특히 四子 悌甲은 안동의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이 황으로부터 수업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 때 忠甲은 퇴계와 아주 친분이 두터웠고 자신이 직접 아우인 제갑을 말에 태워 도산서원에 가서 공부시키기도 했다 한다.
一子 휘 忠甲은 안악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二子 휘 孝甲은 아산군수를 지냈고,
三子 휘 友甲은 진사로 공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홀로되신 할머니 의성김씨와 어머니 행주기씨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四子 휘 悌甲은 충청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원주목사로 재직중 임진란을 만나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부인과 아들 시백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숙의 시호를 받았다.
五子 휘 仁甲은 비안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 五子의 훌륭한 업적으로 인해 이들을 일컬어 특별히 오갑파(五甲派)라 하며 제학공파에서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 형 김충갑(金忠甲) 1515(중종10)∼1575(선조8)
字는 恕初, 號는 龜岩·悟竹山人, 1545年(明宗 1) 別試文科에 급제하여 持坪, 獻納, 北平事를 거쳤다. 乙巳士禍 때는 서울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削職되고, 서청주(현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 유배되었다가 宣祖初에 放還되었다. 그 후 安岳郡守가 되었으며 妖僧普雨를 벌할 것을 누차 上疏한 바 있다. 후에 輔祚功臣 左贊成 上洛君에 추증되었다. 墓는 충북 중원군 살미면 무릉동에서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로 遷封하였다. 문집으로 <龜巖集>(구암집)이 전한다.
형 충갑은
子 시회, 孫子 경 치 형제 문과급제, 子 시민은 임진왜란시 진주성대첩, 子 시약은 병자호란시 충절로 유명
<천안시지, 1987>
金忠甲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龜巖(귀암)이다. 1543(중종38) 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1545년에 일어났던 을사사화때 정암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잡혀서 옥에 갇히어 고생하였다. 뒷날 풀려서 괴산에 살았는데 김충갑은 조광조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에 뛰어났다.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면서 나이어려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억불정책으로 나오던 국책을 바꾸어 고려조에 실시하였던 승과를 다시 실시하고 승 보우를 입궐시켜 정치에 참여케 하였다. 그래서 유생들과 관리들은 모두 보우를 배척하자는 소리가 높아졌는데 이때 김충갑이 많은 관리들과 더불어 보우를 배척하는 데 앞장서서 성리학자들 간에 이름이 높아졌다.
홍문관에서 수찬 벼슬을 하던 충갑의 매서 이휘(李煇)이 을사사화때 왕에게 직간을 하다가 화를 입어 죽음을 당하였다.
충갑은 이때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장송가를 한 수 지어 시체 옆에 놓았다
代之耳 伐之耳 落落長松 伐之耳
小焉(사람인빼고)傾置之 棟材成之耳
大廈將傾式于 何以柱之
베엿도다 베엿도다 落落長松 베엿도다 (베었도다 베었도다 낙락장송 베었도다)
조곰 두엇던들 棟樑之材 되올너니 (조금 두었다면 동량지재가 되었을 텐데)
우(口+于)嗟홉다 大厦기우러진덜 그 무엇으로 기동할고 (슬프도다 큰 집이 기울어진들 그 무엇으로 기둥을 할까)
1546(병종1)년에 별시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사헌부에 재직하면서 을사사화때의 간신들을 탄핵하다가 청주땅에 귀양가게 되어 오랜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선조초에 유배로부터 풀리는 은전을 입어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간원의 헌납(정5품직)에 이르렀으며 뒷날 보조공신 좌찬성 상락군에 봉하여졌다. 또 충청도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서원을 세워 김충갑의 곧은 영혼을 제향하였다고 한다.
김충갑이 처가로 인연이 있어 목천땅에 머물러 산 것이 안동김씨의 집단 거주지인 병천면의 가전리 잣밭 부락이다.
● 형 김효갑(金孝甲) 1520(중종15)--1560(명종15)
자는 행초(行初) 호는 만헌(曼軒) 또는 채진(采眞). 제학공의 7대손. 영상공 휘 錫의 次子이며 세칭 五甲의 둘째. 1540년(중종35)에 생원 진사 兩試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8) 문과에 등과함. 내한(內翰),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거쳐 아산현감에 이름. 향년 41세이며 묘는 경기도 시흥시 소래산 선영하에 있다.
형 우갑은
사위 황락 문과급제
● 동생 김인갑(金仁甲) : 1534년(중종29)--1594년(선조27).
자는 선초(善初). 충북 괴산읍 전법리 출생. 어려서 부친(領相公 諱 錫)의 작고로 나이 18세에 비로소 학문 시작. 1569(선조1. 35세)에 진사(進士) 급제. 1578(선조11)년에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從六品), 직장(直長)·제주의 감(監)을 거쳐 1586년(선조19) 주군자부(主軍資簿), 영산현감(永山縣監), 1590년(선조23. 57세)에 비안현감(庇安縣監)이 되었다.
1592년(선조25.59세) 임진왜란 발발 후 괴산 향가(鄕家)로 돌아왔다가 발병하여 壽 61세로 몰(歿)함.
후에 자(子) 시양(時讓:忠翼公. 호-荷潭)의 귀(貴)로 이조판서 지의금부사(吏曹判書 知義禁府事)에 추증(公 歿後 33년뒤인 1627년) 되었으며, 9년 뒤(1636년. 인조 14)에 子 시양(時讓)이 청백리에 녹선되자 다시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義禁府事 世子貳師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從一品)으로 추증됨.
동생 인갑은
子 시언, 孫子 소 휘 문과급제
■ 작성자 :김항용 작성일 : 2003/06/10 15:09 (from:211.114.248.22) 조회 : 28
제학공파 괴산 선조님 신도비문(11)-金悌甲편(역문1)
<문숙공 의재 김제갑 신도비>
---文肅公 毅齋 金悌甲(1525~1592)의 신도비는 1976년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공의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權容稷이 짓고 글씨는 12대손 金相衡이 썼다.---
부인 이(李)씨가 공(公)이 피해(被害)함을 듣고 시비(侍婢)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공께서 이미 돌아가셨는데 내가 구차하게 살아서 적에게 욕을 당할 것인데 죽지 않고 어쩌랴?"하고 성에서 떨어져 명을 마쳤다. 소자(小子) 시백(時伯)은 공(公)을 따라 성에 들어가 궁시(弓矢)를 잡고 힘을 다해 강하게 막다가 성이 함락됨을 보고 궁시(弓矢)를 그 종에게 주며 말하기를 " 너희들은 이것을 가지고 살길을 취하라. 나는 부모가 다 돌아가셨는데 도망갈 뜻이 없다."하고 하직(下職)하고 공(公)의 시체를 붙들고 잠시도 떠나지 않다가 적의 칼에 몸과 머리가 두 조각이 나니 공(公)의 집에 소속된 식구가 다 적(賊)의 칼날에 죽었다. 이것은 임진(壬辰) 8月 25일이었다. 이때 공(公)의 나이 68세이고 부인 56세이고 소자(小子)는 21세였다.
적이 공(公)의 머리를 종로거리의 나무 위에 매달아놓고 한 길되는 흰나무에 조선열사 김제갑(金悌甲)의 머리라 써 회시(廻屍)하였다. 공(公)은 수십일이 되어도 안색이 변치않고 생시(生時)와 같았다. 공(公)의 서자(庶子) 시걸(時傑)이 밤에 성에 들어가 부모형의 시체를 모시어 권조자(權 子) 고을 동쪽 주천현(酒泉縣) 산록(山麓)에 장사하였다. 다니는 길의 누구든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없었다. 고을 사람들이 많이 제문(祭文)과 만사(挽詞)를 지어 조상하는데, "한 모퉁이 외로운 성에 만고의 삼강일세." 이란 축문을 읽었다.
선조께서 정문에 "일우고성만고삼강(一隅孤城萬古三綱)." 8자를 친히 명하여 문미(門楣)에 달게 하였다. 관찰사(觀察使) 강신(姜紳)이 장계(狀啓)로 인하야 높은 벼슬을 증직(贈職)하고 시호를 문숙(文肅)이라 했다. 현종(顯宗)11년 경술(庚戌)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시고 비(碑)를 세웠다. 호서(湖西)의 선비들이 또 괴산(槐山)의 취병서원(翠屛書院)에 배향(配享)하니, 지금의 화암서원(花巖書院)이다. 숙묘기축(肅廟己丑)에 아들 시헌(時獻)이 임금을 호종(護從)한 공(功)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고 겸직(兼職)이 있었다.
공(公)의 모습은 매우 위엄있어 스스로 엄숙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색이었다. 기개(氣槪)와 절도(節度)가 뭉치고 원대(遠大)하고 확실하여 빼앗을 수 없는 절개가 있다. 품성은 어질고 후하며 처신이 간정(簡靜)했으며,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했으며 봉직(奉職)할 때는 그 정성을 다하여 화합하되 분파(分派)를 만들지 않았다. 공손(恭遜)하되 위엄이 있었다. 평소에 단정하게 앉아있어 일찍이 정이 있지 않았다. 술을 마실 때도 일찍이 지나침이 없었다. 벼슬에 있어 정사(政事)를 할 때도 모두 성적(聲績)이 있으며, 사람을 대접하고 만물을 접할 때 충성스럽고 정성을 다 했으며, 번화한 것을 기뻐하지 않고, 나아갈 때도 조용히 하여, 붕당권세(朋黨權勢)를 피하여 은일(隱逸)할 것 같았다. 사람을 대할 때 담화하기를 좋아하고 산수 새 물고기(山水禽魚)의 즐거움, 전야(田野)의 상마(桑麻)의 정취를 누렸으며, 비록 관직이 요직(要職)에 올랐으나 소연(蕭然)하여 한사(寒士)같았다. 당시 평소 일이 없는 날에 사람들이 다만 고요함을 지키고 화후(和厚)한 장자(長者)인줄 알고 있다가 변란(變亂)을 당하여 그 수립(樹立)한 것이 높기가 저와 같으니 즉 이에 고이 평생 배양(培養)하고 더한 것이니 사람들이 비로소 그 덕을 완전히 갖춘 군자라는데 감복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공(公)은 "일우고성만고삼강(一隅孤城萬古三綱)"인데 누가 수 백년 후에 그 아름다움을 기술해주겠는가? 신도(神道)에 새긴 비(碑)가 없으니 길가는 사람이 모두 탄식(歎息)한다. 그 종후손(宗後孫) 상형(相馨)이 부탁는데 내가 진실로 잘 하지 못하나 감히 그 명(銘)을 지었다.
명(銘)에 말한다.
청산(靑山)에 소 매놓은 것을 보고, 청산(靑山)에 한 점 누른 빛 띠었네 라고 지었네.
듣는 사람이 그것을 남다르다 여기지 않음이 없었으며, 7세부터 이와 같이 빛났네.
배움에 나아가서는 도(道)를 궁구(窮究) 하고, 잠심(潛心)하고 함영(涵泳)하여 침식을 잊었네.
다만 도산(陶山)에 가서, 그를 사사하여 그 직분(職分)을 다했네.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흉년을 당해서는 두루 구휼(救恤)했네.
종친이 감동하여 추앙이 돌아가고 효성이 사헌부(司憲府)에 전해갔네.
오랑캐나라에 갔을 때 청렴(淸廉)하고 화평(和平)하게 하였으며,
진주는 영남의 큰 읍일세.
호걸(豪傑)하고 사나운 사람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데,
결단하기를 물 흐르듯 하게하고 위엄있게 덕을 베풀었네.
섬 오랑캐가 창궐(猖獗)하니, 임진년 이 악(惡)을 어찌하리.
오직 충의가 속으로부터 말미암아,
팔꿈치를 떨치고 간절히 하고자했으나 오래되어 퇴각(退却)했네.
병기와 식량을 저장하고 샘을 치며, 아침에 함거를 설치하고 돌을 공중에 매달았네.
이미 스스로 맹서하기를 죽음으로 지키고자하니,
일각(一刻)을 참을 수 없으며 잠시도 충성을 잊지 않았네
큰 아들이 이때 어가를 호종하는데, 경계하여 절개를 잃지 말라 했네.
그 스스로 힘쓰고 아들에게 힘쓰라하니, 직책을 지키고 심절에 구차하게 살으랴.
비록 기이(奇異)함을 계획하여 군대에게 명령했으나,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했으니 어찌하랴.
적에게 활을 쏘려했으나 시기가 늦어, 먼저 등에 맞았으나 오히려 엎으러 지지 않았네.
나라에서 은정(恩政)이 있어 그를 포상하고,
벼슬을 추증(追增)하고 시호(諡號)를 주고 정문(旌門)을 내렸네.
선비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향(祭享)하니, 충렬사 취병서원(翠屛書院)에 양쪽에 제향(祭享)받네.
安東 權容稷 謹撰. 傍十一代孫 金相馨 謹書
● 제갑은
子 시헌, 外孫子 허적 허치 형제가 문과에 급제
참판을 역임한 시헌은 그의 맏아들인데 후사가 없고 영월군수를 역임
한 상중(尙重)은 둘째 시백의 손자이다. 좌의정을 역임한 허적(許積)과 목사 허질
(許秩)은 외손이다. 허질 또한 원주목사가 되어 그가 끼친 교화를 이어갔다고 한
다.
○ 1자 김시헌(金時獻) 1560(명종 15)∼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서 왜장과 싸우다 전사한 제갑(悌甲)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이조좌랑·정언(正言)을 거쳐 1595년 사간·전한(典翰)·시강관(侍講官)·사인(舍人)이 되고, 이듬해 집의(執義)·사간 등을 거쳐, 1597년 승정원동부승지·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소모관(召募官)으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이어 병조참의·우승지·좌승지를 거쳐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립(申砬)이 전사한 탄금대(彈琴臺)를 돌아보고 임진왜란 뒤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1603년 동지사행(冬至使行)에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순천군수를 거쳐 병조참의·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병조참판에 올랐다. 선조가 죽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1년(광해3)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 등과하였으며, 역학(易學)에 밝아 일대(一代)의 명류(名流)로 이름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그의 아버지 제갑이 적에게 죽음을 당하자 호남·영남 지방의 복수별장(復讐別將)이 되어 나갔다. 묘소는 중원군 앙성면 영죽리에 있다
○ 2자 김시백(金時伯)
원주목사 毅齋 金悌甲의 둘째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를 따라 원주에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의 아버지가 원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자 「어버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어찌 홀로 살랴」하고 그의 아버지를 끌어안고 함께 죽으니 후에 선조가 이를 듣고 탄식하여, 「一門忠孝 萬古三綱」이라 하였으며 호조참의를 증직하고 후에 원주 충열사와 괴산군 능촌리 충열사에 합향하였다.
▣ 김윤만 - 금년중 산행지로 만헌공(김효갑)의 산소가 있는 시흥 소래산을 잡아야 겠습니다.
▣ 김윤식 - 문숙공과 그 아드님의 순국 장면이 애처롭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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